147편「중국」 덩샤오핑9 - 개인숭배의 권위자 마오쩌둥과 실용주의자 등소평
마오쩌둥과 등소평의 본질적 차이점
사상을 앞세우는 ‘홍紅노선’과 실용주의를 앞세우는 전‘專노선’의 차이점에서 모택동과 등소평은 확연한 차이점을 보였다. 마오쩌둥과 등소평은 장개석 군대를 상대하면서 비록 분야는 달랐지만 백만 대군을 상대로 싸운 전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이 둘의 상대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마오는 그동안의 실전경험이 축적되었으나 그 경험이 기계적으로 과거에 머물러 정체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체상황을 가진 사람은 환경이 바뀌거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상황판단이 흐려지기에 조직을 발전적으로 운용하지를 못하게 된다. 반면 등소평은 새로운 환경에서 더욱 그 능력을 발휘하여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역량을 발휘했고, 그 생각 또한 효율적으로 작동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연결시켜 궤 뚫는 통찰력과 하나의 계획이 행동에 옮겨지면서 그 목표를 끝까지 관철 시키는 일관성,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부딪치고 깨지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성을 읽어 낼 수 가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구체적인 그림을 가지고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낼 때 마오쩌둥은 개인우상화의 사상을 만들어냈고, 등소평은 현실적인 실용주의를 있는 그대로 선택한 것이다. 현재의 중국이 마오와 등소평의 노선 중 어느 노선을 군중들이 따랐는지는 상상에 맡겨도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끌어주던 관계에서 대립적인 관계로
1950년 후반부터 중국과 소련은 이념적으로 대립적인 앙숙관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등소평은 프랑스를 거쳐 소련에도 유학을 했던 경험에 비춰서 1956년, 1957년, 1960년, 1963년 4번에 걸쳐서 소련을 방문했다. 그는 소련을 방문하면서 중국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하는 대변인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소평은 중국과 소련의 이념논쟁에서 제 1인자 자리를 굳건하게 굳힐 수 있었다.
등소평이 4차례의 소련을 방문할 시점인 1957년 11월이 마침 소련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계 공산당대회가 열리던 시점이다. 이때 마오쩌둥은 등소평을 포함한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에게 등소평을 소개하면서 “이 작은 친구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장제스의 정예군 백만을 궤멸시킨 사람이오. 이 사람 앞에서는 밝은 미래가 있소”라고 밝혔다. 이 내용은 솔즈베리가 쓴 『새로운 황제들』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즉 마오쩌둥이 흐루쇼프에게 등소평을 평가한 사연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책이다. 적어도 이 때만 해도 마오는 등소평을 치켜 세워주었고 그의 능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소련을 방문한 이후인 1958년부터 마오가 대중노선을 앞세우는 사상전을 전개하는 방향성을 제시한 이후부터 소평은 전문가 중심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돌아섰고 유소기를 지지하면서 마오쩌둥- 등소평은 서서히 대립하게 된다. 마침 1958년 등소평이 발을 다쳐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고, 그의 다리는 4년이 지난 1961년이 되어서야 완쾌 되었다.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 정착한 황장엽씨의 증언에 의하면 흐루쇼프와 등소평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60년 10월부터 11월 사이 1개월 동안 모스크바에서 세계 81개국 공산당 • 노동당대회가 열렸을 때 일이다. 11월 7일에 각국 대표단이 레닌국립묘지를 향해 걷고 있었는데, 등소평이 지팡이를 짚은 채 다리를 절며 뒤쳐졌다. 앞에 가던 흐루쇼프가 등소평을 보면서 먼저 가라고 권하자 그는 “제가 어떻게 당신 앞에서 걸을 수 있겠는가”며 거절했다. 흐루쇼프는 “괜찮으니 앞서 가시오. 나는 당신을 뒤에 두고서는 안심이 안 되어 도저히 가지 못하겠소. 회의에서 나를 몰아붙였는데 오늘은 뒤에 오다가 그 지팡이로 후려칠 것 같아서요.” 같이 가던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고 황장엽은 증언했다. 150센티의 키, 쓰러질 때마다 일어서는 부도옹 오뚜기, 확실히 그는 단구왜소短軀矮小의 인물이었다. 어찌되었든 등소평은 그를 높이 추켜주던 마오쩌둥의 예언처럼 죽지 못해 고생한 이후로 밝은 미래가 펼쳐지긴 했다.
어둠이 가장 깊은 찰나의 순간이 동이 트는 새벽녘이라고 했던가! 밝은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던 등소평에게는 엄청나게 큰 시련이 잇따라 닥치게 되었다. 추켜세워족 이끌어줬던 마오가 등소평의 권력이 커지자 그를 견제하기 위해서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실권파로 분류되었던 유소기와 등소평을 제거하고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벌린 것이 ‘문화대혁명운동’이다. 등소평은 이 당시 국무원 총리 주은래가 외유에 나서자 총리대리로 일하면서 실권파 2인자로 앉아 있을 때이다.
▲문화대혁명당시 주력군으로 활동한 홍위병
마침내 마오에게 기회는 왔다. 그는 홍위병을 동원해 유소기와 등소평을 실각시키려는 군중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등소평은 1966년 12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제2호’로 비판을 받고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것이 등소평의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이후 첫 번째 실각이었다. 이 보다 앞선 등소평의 좌절은 사실 과거로부터 있어왔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이전에는 소위 기회주의자이며 모험주의자라는 구실을 붙여 감옥에 가두었다. 등소평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의 두 번째 처 김유영金維映으로부터 이혼장까지 받게 되었다. 그녀는 등소평의 프랑스 유학동기생인 이유한李維漢과 결혼했지만 소련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이 둘 사이에서 난 아들 이철영李鐵映을 등소평은 끝까지 보살피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등소평이 말하는 세 번 올라갔다가 세 번 내려갔다는 삼상삼하三上三下는 결국 중국 사회주의만이 가지고 있는 특색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만큼 공산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정치권력의 역학구도 관계의 복잡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등소평의 정치적 역정과 사상, 그의 의지와 관계없는 사회주의의 불완전한 특수한 구조 속에서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상징적인 중국의 체계 및 문화의 특수성에 비롯된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선택일 수밖에 없다.
▲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게 수모를 당하는 펑전
다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로 돌아가서 1966년 실각한 등소평은 62세의 나이로 독서와 사색으로 일관된 생활을 했다. 이 시점은 마오가 권력을 완벽하게 움켜잡기 위해서 과거의 혁명동지들을 홍위병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 나갈 시점이다. 등소평이 소련에서 이념논쟁이 한창일 때 ‘이념논쟁’ 제 1인자 자리를 잡을 때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이 펑전彭眞이었다. 그는 중국공산당 베이징 시당 제1서기인 동시에 베이징 시장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 조차도 ‘반혁명수정주의분자’라는 팻말을 걸친 채 어린 홍위병들에게 시내를 개 끌려 다니듯 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 보도되면서 서방세계에는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펑전은 차후에 등소평과 함께 복권되어서 1997년 95세로 사망할 때 까지 우리식으로 국회의장으로 봉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