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참작參酌의 한계와 적중適中의 어려움
다산은 “[국전]을 보니 부모를 호위하다 상대를 살해한 경우 처벌이 매
우 가벼웠는데 이는 자제子弟가 부형父兄을 돌보려다 상대를 죽인 경우
이를 도리상 금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정상
이 매우 진실한 경우라면 당연히 국전을 따라야 하고 정황상 진정성이
결여된 경우 [명률]을 인용해야한다”라고 했다.
다산은 법이 엄해도 정리상 가볍게 처리할 만 하다면 국전을 적용하
고 법이 가볍더라도 정황상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면 [대명률]에 따라
엄벌하는 것이 정리를 고려한 공정한 법 적용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박
봉손처럼 의붓아들인 동생이 친아버지를 구타하자 분격하여 동생을
살해한 경우는 아버지를 보호하려는 ‘진정한 효심’에서 발로된 것이므
로 조선의 국전을 적용할 뿐더러 ‘적경하복 적중상복’의 취지를 발휘하
여 도형 대신 석방해야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법 판결 과정에서 참작의 적중을 얻는 일은 매우 어렵다.
정리를 강조하다 가 지나치게 가볍게 양형量刑 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중형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대명률]에 비해 [속대전]에
서 참작 감형한 바 있는 사안을 정리상 더욱 감형한다면 참작의 한계를
무너뜨리기 쉽기 때문이다.
다산은 박봉손을 ‘석방’한 정조의 결정을 정리와 법 사이의 참작의 한
계를 잘 고려한 적중의 판결이었다고 칭송 하였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
는 달랐다. 1785년 경기도 부평에서 벌어진 일이다. 김창준이 술에 취하
여 신복금의 아버지에게 시비를 걸고 덤벼들자 이에 분노한 신복금이
김창준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이틀 만에 김창준이 사망하였다.
형조에서 는 제 아버지가 구타를 당하니 아들로서 의당 막아야겠지
만 급소에 상처가 있고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용서하자는 논
의는 사증을 무시한 말이라며 엄형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속
대전]의 감사정배를 인용하면서 형조의 주장이 중도를 잃었다고 비판
하였다. 결국 신복금은 장형杖刑 후 ‘석방’되었다. 정조는 “장형은 사람
을 구타한 죄를 징계한 것이고, 석방은 아버지를 보위한 정성을 장려하
여 외읍外邑의 민서民庶들로 하여금 조정의 뜻이 법을 굽혀서라도 풍
속을 순화하는 데 있음을 알리려는 데 있다”라고 밝혔다.
신복금 사건을 부자간의 정리를 가르치는 돈속敦俗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문제는 석방이 과연 ‘상형하복’하는 참작의 한계 안에 있는가
아니면, 법을 굽힌 것인가[屈法[하는 점이었다. 사실 ‘석방’은 정조가 인정
하였듯이 풍속을 교화 하려고 ‘법을 굽힌[屈法[’ 혐의가 짙다. 다산은 정
조의 판결에 대해 “김창준은 본래 굶어서 곧 죽을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술을 잔뜩 먹고 더위를 먹었으니 비록 중상을 입지 않았어도 죽을 수
있었다. 신복금이 아버지를 보위한 사실만을 참작한 것은 아니다”라
고 해석했다.
박봉손의 석방을 상형하복의 좋은 사례로 칭송한 것과 달리 신복금
의 석방에 대해 다산은 ‘곧 죽을 자라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단지 아버
지를 보호한 사실만으로 용서하지 않았다고 변론하였다. 이러한 다산
의 주장은 만일 신복금이 건강한 김창준을 구타 살해 하였다면 석방 대
신 ‘도배’에 처했을 게 분명하리라는 추론을 함축한 것으로 그 이면에
는 정조의 석방 판결이 참작의 한계를 넘어 섰다는 비판과 함께 정조의
뜻이 법을 굽히고 도덕 교화만을 중시하는 것으로 오독誤讀될지 모른
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