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적 공간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는 ‘노인 문제’를 인문·철학·예술·역사 등 다채로운 관점으로 접근해 독특한 견해로 풀어낸 책. 이 책의 제목인 ‘퇴적 공간’은 도시의 인위성에 밀리고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이 강 하구의 삼각주에 쌓여 가는 모래섬처럼 몰려드는 모습을 지칭하여 저자가 만든 조어다. 다시 말해 가정이라는 집단에서의 1차적 추방과 사회적 변화에 따른 2차적 추방이 교차하면서 형성된 공간을 일컫는다. 서울의 탑골공원, 종로3가 역, 인천의 자유공원 등이 바로 우리 주변의 ‘퇴적 공간’이다.
이 공간에 모여 있는 노인들은 지나간 세월을 퇴적층처럼 간직하고 있는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난 저자가 퇴적 공간을 누비면서 노년이 지닌 고독의 무게와 소외의 실상을 차분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퇴적 공간』은 늙음을 통해 젊음을, 군집에 숨은 개별적 고독을, 존경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차별을 이야기한다. 또한 늙은 나, 늙어갈 나의 모습은 물론 내가 머물 사회·물리적 장소를 응시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현재와 미래 모습을 담은 보고서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노화’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로 유기체 기능의 퇴행과 감퇴만을 말하지 않는다. 건강한 신체와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노동 시장에서 퇴출되면 사회적인 쓸모를 인정받기 어렵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상품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노화는 한 개인이 노동시장으로부터 밀려나는 거리에 비례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노인이 되어 노인을 마주하다
얼마 전 뉴욕 퀸즈에 위치한 패스트푸드점이 좌석을 장시간 점유하는 한인 노인들의 매장 이용 시간을 제한하는 방침을 내려 국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노인들이 주로 머무는 서울 종로 일대의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에는 최근 적은 비용으로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담소를 나누거나 끼니를 해결하는 노인들이 늘어났다는 언론 보도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는 노인이 머물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UN이 규정하는 고령화 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퍼센트를 넘는 사회)에 진입한 지 오래인 한국에서 노인 문제는 더 이상 감추기 어려운 사회 문제 중 하나다. 이처럼 점점 늘어나는 평균 수명이 과연 우리에게 축복인가 재앙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저자의 고민은 시작됐다.
대학 교수로 20년간 근무한 오근재 교수는 교수라는 직함에서 물러나면서 사회적 기준의 ‘노인’이 되었다. 저자는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인천자유공원, 종로3가, 낙원동 뒷골목 등 노인들이 운집한 공간을 누비며 노인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 이러한 ‘퇴적 공간’에서 만난 노인들에게 저자는 동질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며, 가족과 어울리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않은 노인들이 주를 이루는 이 공간이 노인들 또는 제3자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파악하고자 애쓴다. 이렇듯 고단하면서도 절박한 작업의 결과로 탄생한 『퇴적 공간』은 노인들이 지닌 소외와 고독의 감정을 가감 없이 묘사하면서 그 원인을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가 이 문제를 모른 척할 경우 늙음과 죽음, 나아가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라는 본원적인 사유를 받아들이는 감각 자체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 경고한다. 삶이 지닌 기본적인 가치에 대한 저자의 염려는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될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 퇴임을 한 후 나는 한동안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일대를 탐사했다. ‘탐사’라고 하는 까닭은 나의 발걸음이 내 안에 고인 어떤 질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라는 직함을 반납하는 동시에 나는 ‘노인’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인된 직업으로 일정 수준의 소득을 벌어들이지 않는 이상, 나이든 자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잣대로 ‘노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갑자기 고독이 밀려왔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이 뒤따랐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섰다
분리된 존재,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퇴적 공간
노인 문제에 대한 기존의 접근이 사회 고발 차원에서만 이루어졌다면 이 책은 현상을 넘어 좀 더 본질적인 고찰을 시도한다. 철학과 사회학, 역사와 미술작품을 넘나드는 인문학적인 해석은 노인 문제가 정책적으로 해결할 시사적 이슈 이전에 체온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고독과 연민의 문제임을 독자에게 환기시킨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어요. 대통령이나 국무위원들을 믿을 수 있습니까? 국회청문회 보셨죠? 다운 계약서 작성, 위장전입, 논문표절, 세금포탈, 병역면제 등은 국무위원들의 5대 필수 스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국회위원들은 믿으세요? 지자체장들은요? 그렇다고 검찰이나 사법부는 살아 있다고 보십니까?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죠.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이제 이 사회에 아무런 기대도 없어요. 사회 지도자들이 정직합니까, 또 신뢰할 만합니까?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거라는 어떤 기대도 없으니 우리 세대 사람들이 악만 남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마음 붙일 어떤 기관도, 단체도, 개인도 없어요.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한테 물질적인 온당한 예우를 해 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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