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 증산도 혁명 >혁명게시판


 
작성일 : 15-06-25 01:42
제 3부 즉(卽)과 이(離)의 논쟁- 집착과 허무에 관하여
 글쓴이 : 혁명역사위원회
 
3부 즉()과 이()의 논쟁- 집착과 허무에 관하여
 
1장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충족과 가치
 
한 세상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과정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놀이와 같은 것이다. 한 없이 영롱하고 오묘한 빛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불꽃놀이는 인간 삶의 열정인 동시에 주검을 남기고 사라지는 끝매듭의 여정이다. 하여, 인간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자손 앞에서 웃으면서 죽는 자가 가장 행복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 삶은 욕구충족의 만족에 있다. 간단히 오욕팔정(五慾八情)에 모든 뜻이 함축되어 있지만, 배고픈 자는 먹어야 한다. 섹스에 굶주린 자는 그 성욕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 사랑받고 싶은 자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최근에 이슈가 된 키 작은 남자를 지칭하는 루저(Loser; 실패자, 패배자)는 키가 크고픈 신체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조직 속에서 무시를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픈 자존의 욕구가 있다. 이러한 것을 갖추려는 행위 자체가 결핍욕구(deficiency needs)에서 비롯된다.
 
이 결핍욕구가 해결되고 나면 자신의 존재적 가치에 무게중심을 둔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종교는 무엇인가.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가치 있는 삶의 해답은 무엇이고, 그 방식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던지는 이러한 모든 질문이 정도(正道)를 찾아가고자 하는 존재 욕구(being needs)이다. 인간은 이 존재욕구의 해결에서부터 정신적 분열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긍정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조직을 성장시킨다. 그러나 폐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부정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조직을 패배시킨다.
 
존재욕구는 성장욕구(growth needs)이기도 하다. 조직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는 능력을 개발해서 조직에 이바지한다. 이것이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인 것이다. 배고픈 자는 먹으면 해결된다. 키 작은 자는 포기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성장의 욕구는 인간을 가장 추접스럽게 변모시키는 마력을 지닌 것이다. 이 마력이 하부조직을 향하여, 열정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성공의 열쇠를 쥐는 것이고, 허황되고 거짓을 꾸며내는 자는 조직을 후퇴시키거나 망하게 하는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성장욕구는 각 인간들이 추구하는 하나의 목표이고 지향점이다. 그러나 각자 추구하는 길은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정오의 태양빛은 밝음을 대지에 선사한다. 이 하나의 빛도 프리즘을 통과하면 일곱 가지 무지개 빛으로 변환된다. 삼원색의 혼합물의 결과만 놓고 보아도 결과가 어떠한가. 보이지 않는 이면에 잠재된 빛 하나도 이럴지언정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빛깔은 어떠하겠는가. 성장 속에 잠재된 인간 욕구의 결과물은 이렇듯 헤아릴 수 없이 무궁무진하다.
이 단체의 인적구성원의 특징을 살펴보려면 존재의 욕구에서 찾아보면 해답이 나온다.
단체에 속한 조직구성원은 세운의 흐름과 경제적 지식으로 무장된 자가 아니면 결코 성공 시키지 못한다. 막연한 희망만을 가지고 비전을 제시하는 간부는 한 마디로 사기꾼인 것이다. 이 사기꾼들의 말 한마디에 전국의 신자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고 가정이 해체되는 결과를 양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슬그머니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자신들이 속았노라고 하면서 조직을 뒤에서 열심히 비판한다.
 
사실 이러한 말을 일반 신자가 말한다면 동정의 여지라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앞장서서 획책했던 자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간 입맛이 쓴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자들에게 피해를 당한 최대 피해자이기도 하다. 20대의 청춘과 열정을 불살랐던 사업체가 교묘한 점조직 형태로 인적자원을 해체시키는 바람에 전부 공중분해가 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는 보여 지는 이들의 꾀와 보여 지는 간악한 행위에 관하여서는 일체 관여하지도 본 척도 안했다. 어차피 미쳐 날뛰는 자들의 의식이란 것은 일정한 공식이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스스로의 역사를 한번 만들어 보고자 했다. 그 역사를 만들기 위하여 망한 단체의 경제를 일으킨 조합의 모든 것을 짓 밝고 없애는 것이 예정된 이들의 공식 아닌가.
 
내가 피 눈물을 흘리면서 만든 사업체를 없애려면 무엇인가 구실이 있어야 했다. 그 구실을 만들어 나간 첫 번째 방법이 인력 빼내기이다. 인력을 빼 내는 방법은 다양하게 구사되었다. 곧 세상이 망하니 그 곳에 있으면 죽는다. 내가 문제가 많은 사람이니 빨리 나와라. 잘못된 공사이다. 여타, 갖은 음모론 조장
 
이후, 이들의 말에 속아서 나간 사업체의 덜 떨어진 최은우라는 애는 사업체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찾아와서 세상 망하니 빨리 나와라.” 등 온갖 소리를 조장하면서 그들의 편에 서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들은 온갖 구실을 붙여가면서 각개전투 식으로 사람들을 빼 내어 나갔다. 유치원 수준이나 써 먹을 계략을 핀 자나, 넘어간 자나 나는 동정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들의 결과는 어떠할까. 내 사업체를 분해한 놈들은 지금 거의 조직을 떠났다. 그 계략에 말려든 자들도 내가 아는 한 거의 남아 있는 자들이 없다. 인간사란 이런 것이다. 정의를 파괴하는 자들은 결국 획책한 자나, 그 계략에 당한 자나 똑같이 함몰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사업체에 근무했던 사람 은 다음의 3가지로 나뉘어 있다.
첫째, 현재도 변치 않고 나의 진심을 알고 온갖 미움과 견제를 받으면서 일하는 자.
둘째, 나의 진심은 알지만 결혼을 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자. 이들은 각 지역에서 눈치를 주기에 스스로 밥맛이 떨어져서 발길을 끊은 자들이다.
셋째, 계략에 말려, 사업체 식구를 빼 내갔거나, 나간 것을 변명코자 배신의 행위를 한 후, 한자리를 얻은 자들. 이 중 가장 속 보이는 행위를 한 자들이 세 번째의 유형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알고 있기에 나는 다 이해하고 넘어간다. 어찌되었든 이들이 다 고생한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정신이 뭉쳐서 망한 단체를 살린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다. 모든 공은 이들에게 있다. 나는 단지 술만 마셨다.
 
결론적으로, 거짓을 하게 획책하고, 그 거짓을 넙죽 받아먹어서 동반 거짓의 행위를 하는 자는 결국 자신의 발등을 찍은 것을 알기에 태반이 조직을 떠나는 것이다. 이들의 신앙관을 나는 3분 라면이라 칭한다. 인스탄트적 사고방식을 갖은 자들은 어차피 오래 있지 못한다. 이들은 어느 조직 속에 들어가도 성장 시킬 수 있는 제목이 결코 되지 못한다. 거짓 계획을 획책한 자나, 그것을 받아먹은 자들이나 결과는 다 한심한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2장 수행과 3변의 전개과정
 
1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주랴
 
호박에 두꺼비 성냥갑에서 꺼낸 성냥으로 말뚝을 박으면서 놀던 10살 남짓인 내가 이 애비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주랴.” 한 마디에 속아서 수행을 시작하였다. 나는 사실 이때 시키는 대로 하면 맛난 음식이 저절로 생겨나는 줄 알았다. 지금 자라나는 어린애들과 나를 비교해 보면 정신적 순결성이 순진무구 자체였을 것이다. 문명과 물질의 혜택을 얻지 못했던 만큼 영악함도 없었고, 자연을 벗 삼아 온 산을 놀이터로 삼아 하루 종일 뛰어놀던 시절이었다. 4계절에 맞추어서 산에서 나는 산딸기, 산 밤. 산머루, 산 버찌, 칡뿌리를 캐어 먹으면서 자랐다. 요즘의 개념으로 보자면, 몸에 좋은 특별음식 이련만,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은 산에서 나는 모든 것이 호구지책을 위한 구황작물인 시절이었다.
 
철없는 어린 자식에게 수행을 시키기 위하여 아버지가 나에게 던진 첫 화두가 애비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생긴다.” 이다. 그렇게 시작한 수행의 화두는 수행을 하다보면, 불빛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푸른빛이 보일수도 있고, 붉은 빛이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생각들이 들 것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그런 생각들이 차츰 줄어든다.” 이렇게 아버지의 교육은 진화해 나갔다. “산 같은데서 수행을 잘못하면 오히려 못된 신명이 붙어서 잘못되는 수가 많이 있다.” “부처님도 수행을 할 때 많은 신명들이 와서 유혹을 하였다. 수행의 과정은 그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교육을 단 하나의 의구심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수행을 참 지극정성으로 하였다. 그러나 먹을 것이 생기기는 개뿔, 순진한 어린놈이 다리 꼬고 앉아서 새벽1-2시까지 해도 먹을 것은 지렁이 발톱이나 개미 눈물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수행 중 간혹 실눈을 뜨고 방바닥을 쳐다보았지만 식은 죽 한 사발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내 수행이 부족하다 생각해서 무조건 믿고 따랐다. 하루는 아버지가 수행 중이던 나에게 먹을 것을 불쑥 내민다. 나는 이때 순진하게 교육받은 어린 마음 인지라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고 내 수행의 마귀가 실험하는 줄 알고 과자를 주는 아버지의 손을 내 손으로 툭 쳐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두 번을 정확히 쳐내고 거절하였다. 나중에 아버지인줄 알고 아! 받아먹을 것을 어린 마음에 억울해했다. 그러나 이후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수행하는 나에게 먹을 것을 권하지 않았다. 어린 자식 약 올리는 거지 뭐.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어린 내가 순진하게 미친 것이다. 학교를 다녀오면 가방을 집어 던지고 글자 그대로 면벽수행을 하였다. 그리고 수행을 하면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수행을 하다가 뒤로 쓰러져 잠이 들면 뒷머리가 부딪혀 쿵 소리가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의 절벽 속으로 아스라이 빠져들었다. 그렇게 6년을 면벽수행 하였다. 빠르면 새벽 1-2, 늦으면 새벽 4-5시까지는 우습게 수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하던 수행 이였지만 내 아버지가 교육시킨 수행체험은 철저히 하였고, 그 이상도 해보았다. 어렸기에 표현이 서툴렀지만 내 정신은 다 기억하고 있다. 내 의식의 진화과정은 처음에는 먹을 것이 생기는 것으로 알고 수행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내가 도술을 부려서 먹을 것을 만들어 내는 줄 알고 수행을 더욱 열심히 하였다. 물론 나중에는 이것도 어린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깨달았다.
 
이 수행과정의 결론은 무엇인가. 나는 아버지에게 낚였던 것이다. 내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정확히 낚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이라고 애비 말을 다 듣는가. 그 많은 자식 중에 하필이면 왜 나를 선택해서 잠도 못 자는 고행을 하게 만들었는지. 물론 행복하다는 표현에 대한 역설적 설명하는 것이다. 내 막내 형을 꼬드길 때는 이 책 한번 읽으면 만원 주마.” 내 막내 형이 싫어한다. 재차 아버지가 묻는다. “그럼 이 만원 주마.” 이런 식으로 결국 꼬드겨서 신앙 문에 들어서게 만든 분이다. 내가 옆에서 막내 형을 꼬드기는 장면을 지켜봤기에 잘 안다. 살살 웃으면서 말씀 하시는 내 아버지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이 바로 이런데 있는 것이다.
 
수행을 하던 중 가장 슬펐던 것이 내 동생의 죽음이 떠올라서 소 새끼처럼 숨죽여 흐느끼기도 하였다. 일란성 쌍둥이였는데 기침을 참 많이 하였다. 한번 기침이 터지면 그 어린놈(3-4)이 죽을 듯이 멈추지 않는 기침을 한 것이다. 요즘이야 의학이 발달해서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동생이었을 것이다. 기침하는 동생이 입었던 노란색 옷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느 날, 개울가 윗집 여자가 추천한 시내 병원에서 주사 한대를 맞고 와서 그 다음날 바로 죽어버린 것이다.

혁명역사위원회 15-06-25 01:43
 
수행을 하던 중 가장 슬펐던 것이 내 동생의 죽음이 떠올라서 소 새끼처럼 숨죽여 흐느끼기도 하였다. 일란성 쌍둥이였는데 기침을 참 많이 하였다. 한번 기침이 터지면 그 어린놈(3-4세)이 죽을 듯이 멈추지 않는 기침을 한 것이다. 요즘이야 의학이 발달해서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동생이었을 것이다. 기침하는 동생이 입었던 노란색 옷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느 날, 개울가 윗집 여자가 추천한 시내 병원에서 주사 한대를 맞고 와서 그 다음날 바로 죽어버린 것이다. 죽은 동생을 보니 입에 침이 고여 있다. 그 침을 찍어 먹은 기억이 떠오른다. 

 죽은 동생은 아버지의 낡은 겨울 외투에 쌓여졌고, 셋째형이 동행하여 보문산에 가서 묻었다. 자식 잃은 엄마는 옷을 냇가에 태우면서 서럽게 울었고, 아버지와 함께 동생을 묻고 온 셋째형은 밤새 서럽게 울었다. 내 셋째형도 중학생이니 참 어릴 때이다. 물론 내 나이는  더욱 어릴 때이나 수행을 하면서 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후 나는 죽은 동생의 무덤을 아버지와 함께 찾아갔다. 그 당시 나왔던 <마미과자>를 아버지가 묻어 주었다. 보문산 음악당을 지나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동생을 묻었던 장소가 나온다. 이 동생이 살아 있으면 지금 45살, 말띠이다.

제 2절 새모양 양재학원(크리스찬 아카데미)- MBC문화방송,
 
 제 3변이 기두하는 과정의 장소를 기억에 의존해서 적어본다. 새모양 양재학원은 지금은 없어진 홍명상가와 대전역 중간에 위치한 곳에 있던 건물이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쇠 의자가 십 여 개 정도 붙어 있는 아주 협소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나의 아버지가 3변의 기운을 모양새 나마 갖추어서 사람들 교육을 시키면서 기두하신 곳이다. 이후 문화방송 옆의 건물에서 셋째형이 궤도를 걸고 본격적인 모양새를 갖추었다.

 2변 때 흩여졌던 신도가 모였는데 완전 노인들이 되어서 집단 교육을 받았다. 이 당시 엄마가 큰 찜통 2개를 날마다 대사동 집에서 날랐는데 한 곳에는 밥이 또 한 곳에는 국과 반찬을 만들어서 그 먼 길을 걸어 다녔다. 매끼 수십 명 분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랐으니 얼마나 힘에 부쳤겠는가. 나는 이 당시 중학교 다닐 때 인지라 토요일 학교가 일찍 끝나면 엄마를 도와 하얗게 눈 나린 도로를 찜통 한쪽을 맡아서 서걱서걱 발자국을 찍으면서 밥과 국을 날랐던 기억이 가슴 아프게 지금 남아있다. 그래도 내 엄마와 함께 걸었으니 아련한 마음이 사모 치게 든다. 이 곳에서 내 중학교 동창 김민수를 내 형에게 소개해서 영어 아르바이트를 받게 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 외 몇 명 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꾸려오던 시절이다.

 이 시절 내형은 대전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동급생을 3학년이라 속이고 영어‧수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내 아버지에게 유리병 속에 들은 우유를 배달케 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매양 우유을 바라보고 드시면서, 왜 이런 것을 배달시키느냐 따져 물으셨다. 그리고 우유를 헛기침과 함께 드셨다. 어린 고등학교 자식의 고생이 못내 속상하여 말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병 속에 들은 우유를 나도 조금 마셔보았지만 참 고소한 기억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다.

제 3절 괴정동-  엉덩이에 똥물을 묻혀 보지 않은 자가 20년을 감히 논한다.

 지금의 본부가 있는 괴정동은 블록을 쌓아 올리고 슬레이트모양을 한 형태를 갖춘 것이 초기 모습이다. 말이 본부이지 창고와 같은 형태였다. 비가 오거나, 비가 온 다음날은 화장실을 가는 것 자체가 난감한 시절이었다.

 남성들이야 큰일을 보지 않는 한 별반 문제가 없지만 여성들은 소변을 볼 때마다 참 엄청난 고행을 하였다.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리는 똥과 오줌이 섞인 물결.  닦으려 해도 펌프가 있을 때이니 위생에 관한한 말해서 무엇 하리. 오죽하면 그네타고 피하면서 큰 것과 작은 것을 봐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물론 나도 엉덩이에 물을 몇 번 묻히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신문지를 철렁이는 물위에 던져놓고 초스피드로 요령을 피우면서 볼일을 해결하곤 했다. 스피드가 없는 자는 신문지를 물위에 던져도 엉덩이에 결국 똥물을 맞던 시절이었다. 이 당시의 상황을 축약해 보자면, 펌프 물을 퍼서 살림을 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수도를 놓게 되었다. 그만큼 모든 것이 열악하던 시절이다.

 성소 바닥은 톱밥을 깔았던 시절이다. 보일러는 꿈도 못 꾸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추운 겨울에 다들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그래도 지금처럼 음모론을 양산하는 간악하고 영악한 신자들은 결코 단 한명도 없을 때이다. 그 당시의 신자들은 순수자체였기에 국수가 섞인 불어터진 라면 하나와 고춧가루를 뿌린 단무지 하나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울 때이다. 바닥이 차가워서 한쪽 엉덩이를 이리저리 기우면서도 내 형의 강의에 감동 받으면서 그렇게 울고 웃을 때이다. 


제 4절 괴정동 시절의 신자 구성

 이 당시의 신자 구성은 상당히 가족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초창기에는 한 가족이 괴정동에 상주하면서 대소사를 전부 관장하였다. 그 딸의 이름이 지영이 인지라 지영이 엄마라 불렀다. 후덕하고 상당히 마음이 착했던 부부로 기억된다. 이후 괴정동을 떠나서 남편이 지하도 상가에서 10년 정도 수위로 근무하는 것을 보고 그 곳을 거닐 때면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김순환이란 일반 여성분도 계셨다. 내 첫째 누이가 포교한 대사동 빌라에 살았던 딸 쌍둥이 부부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포교한 30명 가까운 고등학교 학생이 있었다. 이 당시 소위 말하는 날라리 고등학생도 있었고, 학생의 품위를 갖춘 고등부 신자도 절반 정도 비율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관리미흡으로 이들을 끝까지 이끌지 못하였다. 내 역량의 부족임을 자인하는 바이다.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이 주경야독을 하는 여학생 이었다. 충남방적에 근무하면서 그 회사에서 만든 여고를 다니는 학생이었다. 밤새 철야근무를 하고 괴정동에 오면 눈이 발개져 있었다. 이 학생들이 가난한 살림살이니 국수와 라면이 섞인 불어터진 라면을 먹으면서 붉은 빛 나는 “경면”을 흰 색 사기그릇에 놓고 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어렵게 받은 월급의 절반 이상을 헌성하기도 했다. 이 여학생 이름이 유영미란 학생이다. 간혹 시집은 가서 잘 사는지 문득 생각도 난다. 그만큼 고생하였고, 순수했기에 어디에서 살든 잘되기를 기도한다. 이 여학생이 다녔던 학교에서 6명이 신앙을 하였다. 

 퇴역한 군인 부부와 자녀 3명 (충남대를 다니던 이은주란 여 학생, 서대전고를 다닌 남동생, 중학교를 다닌 남동생)총 5명의 가족 신자가 있었다. 이효신이 들어왔을 즈음에 대학가에서 서서히 바람이 불었다. 하여, 괴정동은 대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져 활력을 불어넣은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괴정동 시절 완벽한 틀을 갖춘 것은 <개벽>책이 나오고 많은 신자들이 형성되었고, 전국의 틀이 본격적으로 갖추어 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 5절 등사판에 진리를 새기고 검은 잉크를 묻혀 찍었던 시절.

 내 셋째형은 허리를 구부리고 쇠침을 사용해서 등사판에 진리를 판본하고, 검댕이 로울러로 한 장씩 밀어가면서 그렇게 진리를 전달하던 시절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대사동 안방 5평이 채 못 되는 공간에서 하던 시절이다. 어느 때 엄청난 비가 왔는데 하꼬방의 앞면이 무너져 내려서 안방까지 훤히 보이던 시절도 있었다. 잠을 자다가 홍수가 들이닥쳐 윗집 반찬가게로 피난을 갔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런 하꼬방에서 9남매가 죽지못해 살아갔던 시절이었다.

 
 그런 세월을 보내면서, 조잡한 포스터를 인쇄해서 진리를 알리던 시절이었다. 이 단체 최초의 공개 진리강연회가 가톨릭문화회관에서 열렸다. 포스터를 인쇄하였는데 붙이는 신자가 단 한명도 없을 때이다. 하여, 까까머리 학생이었던 내가 박충근이라는 동네 친구 1명을 꼬셔서  대전을 샅샅이 누벼가면서 풀 깡통을 들고 대전 전 지역을 뛰어 다니면서 통행금지 전까지 홍보 포스터를 붙이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인동의 굴다리를 지날 때면, 아~ 저 곳에 내가 그 어린 시절 포스터를 붙였던 곳이라는 추억이 가슴에서 샘솟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진리강연회가 열리면 앞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늘 대순의 아줌마 부대였다. 그 아줌마들이 조롱과 야유, 비난을 지껄이는 통에 내 셋째형의 속이 타 오를 때였다. 물론 그것을 지켜보는 내 속 또한 어떠했겠는가. -<이러한 대순 아줌마들의 조롱‧경멸‧야유는 그 후로도 거의 10년 이상 계속 되었다. 80년대 말까지 계속 되었다가 90년대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 만큼 단체가 자리를 잡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시기와 맞물려 셋째형이 드디어 진리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는 시점이다.  대전고등학교 옆에 붙은 “대흥동 독서실”에서 20대의 내 형이 모든 수모와 멸시를 영혼에 담고, 글 한자 한자를 원고지에 쓰면서 영혼을 불 사를 때이다. 피를 담고 영혼을 담은 원고지를 누가 훔쳐가서 내 형의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 갈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원고지를 찾았다( 이 부분은 내 셋째형의 말을 기억해서 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흥동 독서실에서 그 엄청난 원고지를 바퀴가 달린 가방에 싣고 대사동 집으로 운반하였다.

 이후, 내가 진리 책 소책자를 번역하는 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조각내서 배낭 속에 감추고 중국을 들어갔을 때 검색대에서 30분 이상을 붙잡혀 취조를 당했을 때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이 당시 나는 간단한 영어만 사용할 때인지라 말이 통하지 않으니 조선말을 쓰는 통역관 까지 대동하여서 나를 취조하였다.

 나는 그 당시 물증이 잡혔으면 총살형을 당했을 것이다. 좋게 생각해도 최소한 10년 이상의 형을 살았을 것이고, 내 육신이 절단나면 나는 송장이 되어서야 감옥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만큼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지금처럼 개방이 되지 않을 때이다. 이런 나라에 종교 책을 들고 들어간다는 것이 발각되면 나는 그 당시 분위기로는 사형감이다. 기독교인들도 사형을 당할 때이니 두말해서 무엇 하리. 이 단체가 힘도 없는 단체였으니 결과는 뻔했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은 마약범에게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총살을 집행하는 나라이다. 그가 미국인이라도 그들은 자국의 법률로 집행을 한다. 이러한 중국의 피를 받는 사람이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수상이다. 중국은 인구가 많아서 소소한 범죄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지만 국가의 존재를 흔들리게 하는 살인, 마약, 종교문제에 관해서는 총살을 집행하는 나라이다. 싱가포르는 수 백 만 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이기에 리콴유는 소소한 범죄에 관해서도 결코 예외를 두지 않고 국가를 강력 통제를 한다. 그 결과가 범죄 없는 싱가포르이다.

 중국은 지금도 본보기의 일환인 국가의 기강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간간히 종교인들을 소탕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살육과 탄압이다.
 물론 중국은 이 문제에 관하여 자국의 내정간섭이라 칭한다. 또한 절대로 종교탄압을 한 적이 없다고 공산당 당원을 내세워 교육 시킨다. 그러나 그걸 속는 중국인은 거의 없다.
 
 내가 천안문 광장을 거닐 당시, 천안문 사태 때 국가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파룬궁으로 인하여 국가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이다. 나는 이 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중국을 드나들었으니 그 살벌함이 어떠했겠는가. 무장한 군인과 탱크,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 길을 걸어 다니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이 어떠했겠는가. 내 배낭 속에 조각내어진 진리의 증거물, 그리고 천연덕스러운 내 모습, 그러나 내 심정은 담대하였고, 붙잡혀 총살을 당하지 않았고, 지금 살아있다. 그리고 그 진리책 소책자를 잘 전달해 주었고, 번역하는 사람에게 내 사비로 몇 번에 걸쳐 1,500불 이상을 주었다. 물론 고급양주와 담배도 주었다. 이 당시 중국의 화폐가치로 약 3 년 치 이상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번역료로 지급한 것이다.   

제 6절 도맥이란 무엇인가.

여타의 종교단체도 맥을 이어온 흐름이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의 혈맥이 각 종교단체의 역사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부정할 수 없고 꾸며 내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불교계보를 살펴보면, 화엄(華嚴)‧천태(天台)삼론(三論)인 교종(敎宗)이 득세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7-10세기 중반까지 선종(禪宗)이 득세하여, 약 300년의 융성기를 가졌다.
중국 선종의 물결을 일으킨 장본인이 달마(澾磨)대선사이다.

 그의 태생에 관하여서는 동인도 뱅골만 이라는 설도 존재하지만, 정확히 중국인이 아닌 것 에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가 중국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 선종의 효시(the beginning; the first person)가 되었다. 여기서 공자와 달마가 갖은 인간적 고뇌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이 품은 이상주의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기 위하여 상거지가 되어 각 나라를 유랑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그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인간세계에서 완벽하게 제공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오히려 정치가가 아닌 사상사로서 역설적으로 더 빛을 발한 것이다. 공자가 만일 그의 이상주의를 현실세계에 꽃 피우고 사라져 갔다면 오늘날 사상가인 공자가 존재했겠는가. 그는 한 세대의 정치가로서 역사책 귀퉁이에 한 줄 정도로 끝맺음을 하였을 것이다.

 달마가 중국으로 온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러 왔을 때 중국의 불교는 온갖 논리에 휩싸여서 국가에 오히려 해악적 존재가 되어 있을 때이다. 오죽하면 “불교가 과연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는가.”하는 논쟁이 이 당시 중국이 안고 있던 가장 큰 고민인 현실적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출가를 하는 승들의 속성상 가정과 국가에 대한 효도와 충성의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달마가 중국에 몸은 왔으나 그의 이상을 설파하는 한계성을 갖는 것이 바로 불교라는 딜레마였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스스로 벽이 되었다. 그의 벽은 현실의 벽이었다. 하여 그는 침묵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낙양(洛陽) 소림사(小林寺)로 발길을 돌려 9년간 벽을 바라보면서 면벽수행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사실 세상 속에서 들려오는 모든 썩어빠진 말들을 귀를 통하여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혁명사상에 대한 자유의지를 침묵으로 대항하였던 것이다. 벽을 향한 그의 무언의 침묵시위는 결국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벽이 되었고, 그 벽이 마침내 모든 것을 초탈하는 선종을 창시하는 동력이 되었고, 글자와 논리에 사로잡힌 교종에 일대혁명을 가한 것이다.  달마 이후 선종의 맥은 혜가(彗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 혜능(慧能)을 거쳐 수 십대의 도맥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달마가 중국으로 온 이유를 크게 정리하면 2가지로 요약된다. 이는 선도적 관점인 진리의 문제와 세속적 관점이다. 선도적 관점은 달마가 관세음보살의 화현이라는 주장이다. 하여, 그는 무제의 질문을 단칼에 잘라내는 행위를 보인 것이다. 세속적 관점은 중국에 진리를 전파하러 왔으나 이미 중국 곳곳에 불교의 진리가 자리 잡아서 세월을 낚았다는 주장이다.
 
어찌 되었든, 이렇듯 각 종파는 도맥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맥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말을 만들어 혼란을 만든 자가 누구인가.
혁명밀알 15-06-25 07:53
 
한 세상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과정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놀이와 같은 것이다. 한 없이 영롱하고 오묘한 빛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불꽃놀이는 인간 삶의 열정인 동시에 주검을 남기고 사라지는 끝매듭의 여정이다. 하여,
 인간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자손 앞에서 웃으면서 죽는 자가 가장 행복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현포 15-08-01 22:08
 
단체에 속한 조직구성원은 세운의 흐름과 경제적 지식으로 무장된 자가 아니면 결코 성공 시키지 못한다. 막연한 희망만을 가지고 비전을 제시하는 간부는 한 마디로 사기꾼인 것이다. 이 사기꾼들의 말 한마디에 전국의 신자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고 가정이 해체되는 결과를 양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슬그머니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자신들이 속았노라고 하면서 조직을 뒤에서 열심히 비판한다.  사실 이러한 말을 일반 신자가 말한다면 동정의 여지라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앞장서서 획책했던 자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간 입맛이 쓴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자들에게 피해를 당한 최대 피해자이기도 하다. 내 20대의 청춘과 열정을 불살랐던 사업체가 교묘한 점조직 형태로 인적자원을 해체시키는 바람에 전부 공중분해가 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 세운의 흐름과 경제적 지식에 대한 적응과 실천이 있어야 안에서나 바깥에 나가서나 사람노릇하는 세상이 지금 세상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Total 259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259 제 3장 위선의 탈을 벗어라 (3) 혁명역사위원회 06-25
258 제 3부 즉(卽)과 이(離)의 논쟁- 집착과 허무에 관하여 (3) 혁명역사위원회 06-25
257 제 2부 - .. (3) 혁명역사위원회 06-25
256 제 6장 결론 (1) 혁명역사위원회 06-10
255 제 5장 조직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 (2) 혁명역사위원회 06-10
254 제 4장 조직과 권력의 관계 -3 (2) 혁명역사위원회 04-30
253 제 4장 조직과 권력의 관계-2 (3) 혁명역사위원회 04-29
252 제 4장 조직과 권력의 관계-1 (3) 혁명역사위원회 04-28
251 제 3장 거꾸로 읽는 나의 인생 체험기 (7) 혁명역사위원회 04-25
250 제 2장 인간의 가치추구 (5) 혁명역사위원회 04-25
249 1장 서론 (6) 혁명역사위원회 04-25
248 혁명역사위원회 (26) 혁명역사위원회 04-21
247 혁명1 -조직 그리고 혁명- 이 어둠의 끝에도 희망은 있다. (14) 혁명역사위원회 04-24
246 노상균이가 나에게 한 질문에 대한 답변1 (8) 대마도 10-16
245 노상균 400만원 돌려주기 바란다. (13) 대마도 10-16
244 황극천자님의 독일 베를린 방문을 감축드립니다 (8) 이태백 09-12
243 니가 혁명을 아느냐? (4) 대마도 08-25
242 [담론에서]혁명동화, 피리부는 사나이와 딴전이(백의) (3) 가나다라 04-28
241 [담론에서]서나동 천자몽의 견전이 심보보소!!(백의) (2) 가나다라 04-28
240 밀알리스트는 어떻게 본부로 유출되었을까? (2) 제다이 04-22
239 종교의 절대적 속성과 현실의 상대적 속성 (2) 참외 04-03
238 절대성과 상대성의 조화, 자유민주주의의 위대성. 이에 도덕성을 상실한 ㅇㅇㅇ (1) 참외 04-03
237 08년 어느 날, 제이교의 책이 고물상으로 간 까닭 (가나다라) (2) 갑오혁명 03-18
236 추리극장, 아는 사람은 알지만 누가 가르쳐 주랴! 딴전이의 도수 연기 (가나다라) 갑오혁명 03-18
235 개벽마약중독 정신분열증에 대해서 (가나다라) 갑오혁명 03-18
234 이력서- 종교활동, 그 초라함에 대하여 (가나다라) 갑오혁명 03-14
233 기독교와 신불교의 순환논리 (묵향) 갑오혁명 03-14
232 현대과학으로 풀수없는 5가지 미스터리 - 사이언스지 선정 (예비밀알) 갑오혁명 03-16
231 지나간 역사- 2013년 교육관 인민재판식 장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대한늬스) 갑오혁명 03-16
230 경전무극상제 어천후 나온 10적판 도전(桃戰)-증산은 거짓상제이다 (대한늬스) (1) 갑오혁명 03-16
229 아이구 분해여~~~~~~~~~~~~ 아이구 분해여~~~~~~~~~ (저승사자) 갑오혁명 03-16
228 같은 도장 신도의 집에 해결사를 보내다 (무지개) 갑오혁명 03-16
227 교조 입천에 교주 명천이요 - 경전 입극천자 도통이요 (소향나무) 갑오혁명 03-16
 1  2  3  4  5  6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