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서론
신변잡기(身邊雜記)
제 1절 권력이라는 속성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
르네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650)의 말이다.
최근에 나는 어느 신자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머뭇거리는 전화 통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다급함을 알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그 초라한 모습에 눈물이 휑하니 돌았다. 사연을 물어 보니 신용불량이라 그 흔한 의료보험증 조차 없단다. 가족이 병원에 입원 했는데 좋은 방법을 좀 찾아주고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내 전화번호를 어찌 알았냐고 물으니 그건 대단히 죄송하지만 알려 준 사람이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단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선 급한 대로 개인병원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딱한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 친구도 이런 저런 통화를 거쳐 먼저 그의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징후를 본 후에 다시 연락을 잡자 약속을 했다.
나에게 부탁한 그 신자에게 차비를 손에 쥐어주고 포옹을 해주고 보냈다. 나는 심장이 끓어 올랐다. 그리고 분노를 하였다. 도대체 왜 평탄했던 이 사람들이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택시에서 내려 걸어오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교육관에 사람이 많이 드나드니 교육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난 속이 타서 캔 콜라 한 병을 손에 쥐고 교육관 로비로 갔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고 소리쳤다. 미친 개 자식들.
신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몇몇 개 같은 간부란 종자들이 이런 개 같은 정책을 피면서 눈을 가리니 신자들이 더욱 고통 받는 것 아닌가. 이 개자식들아. 나는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내가 마시다만 캔 콜라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나를 어떤 자가 보았는지 모르지만 나를 난동자라 규정하는 소리를 바람으로 전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생각하는 조직 파괴의 진정한 난동자들은 지금도 권력에 취해 미소 짓고 있다.
썩은 조직은 반드시 망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광활한 대양의 돛을 올려야 한다. 그래야 성공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내 논의의 출발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주의적 속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권력이란 대중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용해야한다.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 조직은 반드시 실패 하는 것이다. 권력은 대중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은 대중의 아픔과 시련을 외면한다. 권력만을 지키기 위한 권위는 독재이다. 이는 결국 큰 파국을 가져오며 결국은 자신도 패망하게 되어 있다.
정치 선거철이 되면 포장마차에서 오고가는 말들이 있다. 대부분의 남성은 각자의 지식과 혜안으로 중무장한다. 요즘은 물론 소(小자녀의 생산(;出産)인지라 여성들도 마찬가지의 시류로 흐르고 있다. 어찌되었든 각자 프로 정치인이 된 듯 게거품을 무는 것이 한국민족뿐 아니라 여타 민족의 권력적 속성이다. 때로는 고성과 주먹질이 오가기도 하는 것이 선거철 포장마차의 모습이기도하다. 이 권력적 속성의 핵심이 사·농·공·상이라는 버려야할 폐습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폐습의 영향이 한국적 관습에서 교육열이라는 아이러니한 희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 2절 부모의 소망은 착각에서 비롯된다.
가난 탈출 하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부모의 소망이었다. 이 소망의 공식에 많은 가족이 울어야 했다. 하나의 자식을 대학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족 구성원이 못 먹고 못 배우고 울어야 했는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한명의 자식을 대학 보내고 나면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가난의 멍에에서 탈출 시킬 줄 알았다. 그러나 부모의 소망은 대부분 위대한 착각으로 끝났다. 과연 부모의 바람으로 된 가정이 몇 집이나 있겠는가.
제 3절 모 교수와의 대화- 배운 놈 VS 못 배운 놈
모 대학에서 강의가 끝나고 모 교수 3인과 나눈 대화를 축약해 본다.
먼저 한 교수가 운을 떼었다.
“교수세계에서 적어도 가정에 효도하는 놈 거의 없습니다. 죽어라 가르쳐 봐야 지 살기 바쁩니다. 나도 교수지만 솔직히 교수 놈들 지 욕심으로 공부한 놈들 아닙니까. 가정에서 효도하는 놈 치고 배운 놈 없고 원래 천박꾸러기로 자란 놈이 효도하는 법입니다. 산을 지키는 나무는 반듯한 나무가 아닌 구불구불한 나무입니다. 이 구불구불한 나무가 선산을 지킵니다. 또한 구불구불한 나무가 보기에 좋고 멋스럽습니다. 그리고 오래갑니다. 반듯한 나무는 바람한번 불면 부러집니다. 결국은 사람의 손을 탈 땔감용입니다.”
인생과 연륜 그리고 삶의 성찰이 묻어나는 멋진 말을 쏟아내었다.
다른 교수 가라사대. “형제들이 내가 가장 많이 배운 교수라고 뭐 쌓아 놓은 돈이 많은 줄 알고 심심하면 손을 벌리는데 나도 죽겠습니다. 형제가 아니라 원수들 입니다. 지들 힘들 때만 손을 벌립니다. 몇 번 돈을 주었는데 돈을 받고 오히려 욕을 하면서 형제끼리 뒤에서 뒷 담화나 하면서 뒤통수를 칩디다. 지 혼자 잘 산다고 욕을 합디다. 지들이 말아 먹은 돈은 생각 안합니다.”
이 두 교수의 말은 상반된 표현이며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나에게 묻기를 O 박사님은 어찌 생각합니까. 사회경험이 풍부하다니 물어 봅니다.
내가 대답하기를 “부모는 자식에 속고 자식은 세상의 환경에 속은 것 아닙니까.”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들 자기 살 형편만 필 뿐 가족 전체를 돌 볼 여력은 없는 것 아닙니까.
공부만 한 사람들 솔직히 세상을 얼마나 압니까. 박사란 세상속의 바보이면서 고집불통입니다. 샌님과 공무원 퇴직금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란 말이 나온 이유가 현직에 있을 때는 가장 똑똑한 척해도 막상 사회에 나오면 가장 멍청이란 뜻 아닙니까. 지혜를 잡아먹는 것이 책의 이론입니다. 이론과 세상의 경험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는 지식습득과 사회경험을 거꾸로 하며 살아왔습니다. 책을 읽을수록 지혜가 내 가슴에서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책으로만 지식을 얻습니다.
책의 지식으로만 경험 없이 세상과 싸우면 거의 패배를 합니다. 책의 세상과 실존하는 세상의 현실적 차이는 엄청납니다. 기업의 CEO가 책을 읽는 것은 경험을 보강하기 위한 보충적 지식의 습득이기에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 4절 교수님 우리도 휴강하고 뒤풀이 좀 해줘요.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 제발 다른 과 교수님들처럼 휴강 좀 해달란다.
이어지는 학생들의 귀여운 사보타지 성격의 애교스러운 꺅꺅거림.
수업은 수업이다. 내 사전에 결강은 없다.
다음주 수업 끝나고 반장(원활한 수업을 위해 예비역을 지정했다)이 학교근처 식당을 예약하고 내 수업 이후 연강(이어지는 강의) 없는 학생만 참석해라. 그렇게 80명 수강 학생 중 30여명이 모였다. 20대의 강철 같은 몸을 가진 학생들인지라 소주를 물처럼 빨아 마신다. 취기를 빌려 한 학생이 질문을 한다.
“교수님은 왜 항상 청바지만 입고 다닙니까. 다른 교수님들은 언제나 정장인데 교수님만 청바지를 입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였다.
아~ 내가 사실 몸이 워낙 이쁘게 생겨서 맞춤옷을 입어야 하는데 옷값이 비싸서 청바지 입는다. 참 가슴 아픈 대답이었다. 그렇게 뒤풀이를 마무리 지었다.
원래 돈이란 만들어 준 사람은 빛 잔치에 시달리지만 빨대를 꼽고 빨아 먹고 사는 자들은 흥청망청 쓰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고 받아먹는 자들의 의식은 피눈물 흘리면서 돈을 만든 사람의 노고와 정신을 결코 모른다. 경제적 성취를 하는 사람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단점도 노출될 수 있다. 그러나 뒷전에 앉아서 흥청망청 쓰는 자들은 경제행위를 한 사람의 험담만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들끼리 의식을 공유하여 인간을 짓밟는다. 그리고 말살하려 한다.
이러한 추잡하고 더러운 의식의 출발점이 바로 그들의 속일 수 없는 속내이다.
그 어떤 달콤한 유혹의 말로 그들 자신을 포장을 하더라도 원초적 거짓은 사라지지 않는다.
제 5절 정(情) 이란 무엇인가
내가 양복을 처음 입은 나이가 28살에 아버지가 맞추어 준 동복이다. 이 양복을 15년여를 입다가 너무 낡아서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이후 여름양복 한 벌과 겨울양복 한 벌을 더 맞추어 입었고 아버지가 사준 약 20년 된 겨울외투가 한 벌 있다. 목 부분은 기우고 기웠고 손등은 삭아서 아주 특별한 날만 조심스럽게 입는다. 그리고 당신이 직접 메시던 넥타이를 나에게 준 2개가 있다.
나는 물건에도 생명과 정을 부여한다.
무엇인가 하나를 버린다는 것은 참 마음이 아프다. 가방은 10여년을 메고 다녔다. 천으로 만든 검은 가방인데 나와 동고동락을 같이한 놈이다. 지퍼가 고장 나서 바늘로 기워서 메고 다녔다. 얼마 전 이 가방을 내 아버지가 달라하여 주었다. 내 가방을 굳이 가져간 속마음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노인네 웬 힘이 그리 세신지 뺏겨 주는 척 하고 드리고 나왔다. 지금은 사회복지재단에서 공짜로 받은 검정 노트북 가방 비슷한 것을 메고 다닌다. 내가 가장 마음이 아플 때는 신발을 버릴 때이다. 신발을 버릴 때도 작별인사를 한다.
잘가! 신발아~ 이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