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인간의 가치추구
제 1절 인간의 신념
지구중심이 아닌 태양중심의 지동설(地動說)을 증명하는데도 몇 세기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코페루니쿠스, 갈릴레오로 이어지는 시간대까지 로마교황청의 법 감정은 과학적 증명까지도 신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초기 교황청의 법이란 가장 극렬한 형벌을 가하는 마녀 사냥이었다. 교황청은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조차도 박탈하였다. 즉, 광장에 군중들을 모아놓고 침 뱉기, 돌 던지기,욕설을 퍼 붓게 한 후 ‘신권에 대한 도전’이란 죄명으로 옭아 메어 죄인을 참수하거나 화형에 처하였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에 일대 혁명을 가하는 것을 “코페루니쿠스적 전환” 혹은 “코페루니쿠스적 발상”이라고 칸트가 후일 학술적 용어로 명명하였다.
제 2절 코페루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추구한 신념
코페루니쿠스 그가 추구했던 사상은 무엇인가.
그가 살았던 시대, 국민의 존재의식과 사유가치를 지배한 것은 가톨릭의 종교적 사상이다. 가톨릭의 종교적 관념은 ‘지구중심’으로 온 우주의 천체가 돈다는 세계관이다.
그는 지구중심의 천동설(天動說)에 강한 의문점을 제기하면서 사유와 과학적 탐구를 동시에 병행하게 된다. 그가 얻어낸 탐구의 결과는 ‘태양 중심’으로 지구가 회전한다는 그 당시로서는 경악할만한 지동설(地動說)의 단초가 되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소론(小論)의 발표이다. 이 사건은 자리보존에 대한 편안함, 권력의 맛에 빠져 꿈을 꾸는 가톨릭의 성직자들에게는 죽음의 메시지였다. 동시에 그가 주장한 지구중심의 우주론은 신권을 가진 교황청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
그는 사실 죽어야했다.
그러나 그의 질 곡진 삶 속에서도 그를 이해하고 그의 이론에 동조하는 사람이 교황청 내부에 있었다. 물론 그 당시의 로마법이 연성화 된 원인도 작용을 한다.
그의 신념이 소리 없는 동조자를 만들어 냈고 결국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제 3절 교황청의 마녀사냥
초기의 가톨릭은 마녀사냥을 통한 사형, 탄압의 과정이 상당히 혹독하였다.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진 선택된 강요만 있을 뿐이다.
교황청의 눈 밖에 벗어나 표적이 된 사람은 심문을 당한 후 신앙고백의 형석을 빌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의 자백을 강요당해야만 하였다. 이단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도 다른 이단자의 이름을 허위 자백하는 치욕의 수순을 밟아야 했다. 교황청의 일방적 행위를 통한 재판의 결과 유죄가 입증되어 사형이 집행되면 사형세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수 세기를 거치면서 일방적 마녀사냥의 처단방식이 보다 세분화 되었고 보다 무르게 연성화(물러짐) 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사형수의 집으로 찾아가서 약 20위안의 총알 값을 징수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사형을 당한 시신의 소유와 권리는 국가가 갖게 된다. 즉, 사형수의 유가족은 총알 값을 지불하고 육체는 장기를 적출 당해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새 생명을 열어주는 아이러니한 역할을 한다.
제 4절 갈릴레오의 절규-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미네르바의 수도원에서 갈릴레오의 2번째 재판이 열렸다. 그는 이미 코페루니쿠스가 단초를 제공한 지동설에 대한 증명을 완료한 시점이었다.
재판의 심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가 주장한 지동설의 증명을 스스로 부정시키는 고백을 강요하였다.
둘째 자신의 학설을 저주하는 자아 비판적 형식의 심문을 진행하였다.
셋째 성경책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심문을 진행하였다.
넷째 지동설의 학설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였고, 글로 쓰지도 못하였다.
즉, 자신이 증명한 지동설이 악마적 학설이기에 저주할 것을 교황청으로부터 강요받았 다.
이것은 자신을 태어나게 해 준 부모님을 악마라고 강요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진실의 왜곡, 그리고 평생을 바친 한 인간의 절규가 교황청의 무소불위 권력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교황청의 비리는 신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것이 포장 되고 굴절되었다. 사실 교황청의 속셈은 그들의 치밀한 권력적 음모에 있었다. 모든 성서는 그들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일반대중의 절대적 명령서였다. 또한 그들이 조작하고 왜곡하는 현실적 방향으로 조작된 역사는 사실화가 되어갔다.
개인 갈릴레오는 거대한 교황청의 협박에 결국 굴복 당하였다. 그리곤 나지막이 외쳤다.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 갈릴레이가 이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는 이견(異見)도 존재한다.-
로마 교황청은 현재에 이르러 베네닉트 16세가 과거의 오류에 대한 사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생물처럼 진화되어지는 역사의식이다. 그 이전에 가톨릭의 성직자는 결코 오류를 행할 수 없는 존재로 신자들에게 교육시켜 졌다. 이 자체를 부정하면 마녀사냥의 심판을 당하였다. 종교전쟁과 마녀사냥, 신대륙 정벌을 통한 원주민의 대량 학살 이 모든 것을 그들은 정당화 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다인종 . 다문화 ‧ 다종교의 인식론에 백기를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