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무기」 임진왜란 조총 vs 승자총통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우리나라의 전투는 '조총'대 '승자총통''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포르르투갈의 선원을 통해 조총을 구입한 일본은 그 후 기하학적인 숫자로 조총의 보급율이 증가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에서도 조총을 접했었지만 그 불편함과 번거로움, 그리고 그 영향력을 간과하며 일본처럼 양산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가온 임진왜란!
우리나라의 군사들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연패하며 조총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조총 생산을 시도했지만 신통치 않았습니다. 물론 조선에도 '승자총통 '이라는 휴대용 화기가 있었지만 휴대성과 명중률이 높은 조총에 비해 성능이 다소 떨어졌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에서도 조총을 조선군의 주무기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자총통이 조총에 비해 모든 면이 뒤쳐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승자총통의 위력은 조총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조총과 승차총통에 대해 사진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조총
먼저 조총입니다.
조선 시대 당시 '최고의 무기'로 칭송을 받았던 조총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부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조총은 이름 그대로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15세기말 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져 16세기 경 아시아로 전해진 조총은 제일 처음 일본으로 전래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은 조총으로 무장했고, 이에 연패하던 조선군에
서는 조총을 수입하여 제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총은 조선후기까지 조선군의 대표 개인용 화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조총을 기반으로 조선 숙종 때는 '천보총'이 제작되었습니다. 이 천보총은 조총보다 조금 길고 무거웠지만 사거리가 길었기 때문 에 주로 관문을 방어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2) 승자총통
승자총이라고도 불리는 승자총통은 총구에서 화약과 실탄을 장전하고 손으로 직접 약선에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하는 유통식 화기입 니다.
1583년 발생한 니탕개의 난(여진족의 추장인 이탕개를 중심으로 발생한 여진족의 반란) 때 큰 효과를 보기도 했지만, 위의 조총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습니다.
길이는 49.5cm~59cm, 무게 3.25kg~4.56kg 정도였고, 사정거리는 약 720m 였다고 합니다.
현재 승자총통의 현존유물은 많은 편인데요, 그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승자총통이
보물 제648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승자총통의 종류로는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별승자총통이 있는데요.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차승자총통은 기존의 승자총통보다는 규모가 다소 작았습니다. 길이가 56.8cm, 총구 지름이 1.6cm로 한번에 철환 5개를 발사 했습니다. 총신이 약간 구부러진 것이 보이십니까? 발사과정에서 탄환이 힘을 받아 장거리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아래에 있는 별승자총통은 승자총통 종류 중 가장 큰 길이 76cm 입니다. 기존의 승자총통보다 부리를 길게 만들어서 사정거리를 늘이고 이에 구경이 작아서 명중률을 높인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승자총통 입니다.
소승자총통은 우리나라 최초로 현대식 모양을 갖춘 총입니다. 길이가 50~59cm, 무게는 2.5~2.72kg 정도였습니다, 앞의 승자총통 종류보다 훨씬 가벼운 무게입다.
소승자총통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승자총통보다는 숙련된 주조 기술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참고
조총(鳥銃)
조총은 원래 서구에서 개발된 화기로 직접 손으로 화약심지에 불씨를 점화하여 사격하는 기존의 우리의 총통(銃筒)과는 달리 격발장치가 있어 방아쇠를 당기면 용두(龍頭)에 끼워져 있는 화승(火繩)이 화약에 불을 붙여 줌으로써 탄환이 발사되는 방식의 화승식소총(火繩式小銃)이다. 따라서 조총은 기존 화기에 비해 조준사격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명중률이 뛰어났던 총이다.
이 총이 16세기 동아시아로 전래된 후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조총이라 이름을 붙인 것은 ‘날아다니는 새도 능히 맞출 수 있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물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인 1589년(선조 22) 7월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가 우리나라에 몇 개의 조총을 진상해 왔으나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군기시(軍器寺)에서 사장되고 말았다.
그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군은 초기에 일본군의 화기와 전술에 연패를 당하였다. 초기 전투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화기의 도입이 필수적임을 깨닫고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 화기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전리품(戰利品)을 활용하였으며, 항복한 일본군 중에서 조총 제조기술을 지닌 자를 등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였다. 특히 이순신, 김시민, 김성일 등은 일찍이 조총을 승자총통을 능가하는 화기로 인식하고 조총을 모방 제작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들이 쌓여져 이듬해 3월에 마침내 조총 제조기술을 익히기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12월초에는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의 감영과 병영에서도 조총을 제조하게 되었다. 물론 초기 조총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기술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점차 정교한 총을 제조하기에 이르렀다.
임란 이후에도 우리나라의 조총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어 그 제조기술도 발전하게 되는데, 1657년(효종 8) 3월에는 청나라가 많은 수의 조총을 무역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우리나라 조총의 우수성은 대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현재 조총은 다수가 각 박물관에 전해오고 있는데, 모두 조선후기에 사용되었던 화기이다.
승자총통
경기도박물관(관장 이원복)이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을 기념하며 선정하는 <이달의 유물>, 9월의 주인공은 ‘승자총통’이다.
승자총통(勝字銃筒)은 1570년 김지(金遲)가 개발한 소형의 휴대용 개인 화기이다. 강한 화력과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조선 중기 이후 대표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승자총통이 다른 총통과 차별화되는 것은 몸통 부분과 총구를 길게 제작하여 명중률을 높였다는 점이다. 또한 기존의 총통이 발사구로 화살을 장착했던 것에 비해, 승자총통에는 탄환이 장착되어 높은 파괴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번에 전시되는 승자총통은 2000년 3월 14일 양평군 양근리의 남양홍씨 예사공파 묘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승자총통 그 자체뿐 아니라 내부의 장전물까지도 모두 함께 갖춰진 채로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총 3점이 발견되었는데 2점에서 당시 사용 흔적을 알려주는 화약, 탄환 등의 장전물이 발견되었다. 일곱 개로 된 대나무마디 모양의 부리와 약실, 자루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조선시대 승자총통으로, 손잡이에는 음각으로 제작연대와 명칭, 무게, 제작한 장인의 이름 등을 새겼다.
승자총통은 제작기술, 장전방법, 탄환종류 등의 모든 면에서 조선시대 중기의 최신(最新), 최고(最高) 기술이 집합된 무기로, 여진족 정벌 등의 주요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순신(李舜臣) 역시 시전마을 토벌 작전에 참여할 당시 승자총통을 주무기로 사용한 바 있다. 임진왜란 전에는 활발하게 사용되었지만, 임진왜란 때에는 빠르게 발사 가능한 무기인 조총의 등장으로 그 활약상이 저조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예전의 승자총통 사용 경험을 바탕으로 승자계열의 총통을 변형한 무기를 임진왜란에서 사용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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