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정약용의 ‘民權 이론’의 내용 - 자율적 인간관
다산 사상을 민권으로 파악하는 연구들은 각종의 다산 저술에서 그 근거를 찾아 제시한 다. 그들은 민권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산의 경학에서 찾아낸 자율적 인간관을 거론하고, 또 민의 주권과 관련해서는 민 주체론 또는 국민주권론(주권재민론)을 주장하거나, 평등권과 혁명권, 민저항권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주장에 따라 그 내용을 분류하고 요지와 근거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비판적인 검토도 병행하려 한다.
자율적 인간관
정치란 국가권력과 개인 사이에서 서로를 향해 일어나는 힘의 작용이다. 이론을 떠난 실제 정치도 결국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진다. 어떤 사상가의 사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가 인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접근 방법이다. 다산에게서 민권을 발견한 연구들이 다산의 인간관을 거론하는 까닭이다.
먼저 민권 이론들의 내용을 보자 .
윤사순은 다산이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의한 만유일체설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독립하여 自存하는 존재로 보았고, 선을 실현하려는 의욕으로 선을 행하고 惡을 범하려는 의욕으로 惡한 행위를 하는 ‘자주 권능[自主之權]’을 인정한 것은 인간을 ‘자율적 주체’로 본 것이라고 한다. 그는 “心이 발하여 志가 되는데, 志는 곧 氣를 부리게 되고 氣는 곧 血을 부리게 된다.......志는 氣의 수(帥)요 血의 령領”이라는 다산의 말은 ‘志는 장수이고 氣는 졸도(卒徒)’라고 본 주자와 다르다는 점을 들어, “성리학자들 보다 개인의 ‘의지의 자유’에 한 신념이 강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한식은 보편성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개체성 관념을 주목하여, 다산이 성리학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공격함으로써 개체성 발현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보았다. 이 주장으로 다산이 민 개체를 전체성으로부터 떼어내어 구체적 인간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은 종래의 획일화하고 보편화시킨 인간관에 비하면 새로운 발견이라 할 만하다. 임형택 역시, 자주지권으로 볼 때 “다산의 인간학에서 이성과 자주로 실천하는 인간을 만난다.”고 하다. 그러면 자율적 인간관이라 해서 이것이 정치적 개념인 민권과 어떻게 관련되는 것일까?
다산이 인간관에 있어 개체성을 파악하고 군 개체와 민 개체를 분리하여 보았다는 김한식의 견해는 경학 사상에서의 인간관을 현실 권력관계인 ‘민’으로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그 논리적 타당성은 두고라도 의미 있는 관찰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민권은 당초 보편적 존재로부터 개별적 존재성을 발견하는 단계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형택은, “(이성 에 의거해서 실천하는) 이 이성적․자율적 인간관이 ‘民’을 위한 정치로부터 나아가 ‘민’에 의한 정치를 실천할 주체로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함으로써 민의 정치적 주체성을 인정하는 한 근거로 됨을 인정한다.
또 韓永愚는 다산의 성기호설(性嗜好說) 등과 관련 “다산의 人性 論은 人格에 있어서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라면서, “이러한 인성론을 바탕으로 한 그의 윤리도덕사상은 자연히 민주적 평등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다. 이상익도 ‘心의 自主權에 의한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성리학과는 다른 인간론이라고 설명했는데, 그는 다산의 이러한 인간관이 사회사상에서의 민권사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전통 유학에서는 누구도 쓰지 않은 개념인 ‘자주지권’을 생각해냈다. 그는 주자학에서 ‘理’라고 설명해온 ‘性’이, ‘善을 즐거워하고 惡을 미워하며 德을 좋아하고 더러운 惡을 부끄러워하는 기호嗜好(성향, 취향)’라고 보았다. 그러기에 사람의 마음은 어떤 선택을 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자주지권’이다. 다산은 “善을 행하면 실제로 자신의 功이 되고, 악을 행하면 실제로 자신의 죄가 된다. 이것은 마음의 권능이지 性을 말하는 게 아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주지권은, 마음이 선악을 선택하여 행할 수 있다는 도덕적 자율권이다. 물론 타고날 때부터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향이 있지 만, 선을 행하는 道心과 욕심을 따라가는 人心은 언제나 상반된다. 그러므로 늘 ‘맹성猛省‘해야 만 한다. 이러한 끝없는 성찰이 요구된다면 하늘의 이치에 따르고 인간의 욕심을 버리는‘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이라는 성리학적 구호와 다를 바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더라도 다산이 性을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性向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율적 인간관을 지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氣質之性’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현우賢愚․성범聖凡의 차별이 있다고 보았던 성리학적 인간관에 비하면 더 실제적(비관념적)이다. 다 산이 발견한 자율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면 장차 의지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의지의 자유를 가진 자율적 인간관은 모든 인간을 각 개체로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다산은 인간이 善惡을 선택하여 행동할 수 있는 도덕적 자율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천지 음양의 이치와 신성한 제왕의 큰 법은 어길 수 없다고도 했다. 도덕적 자율권이 언제나 현실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자율권이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설정 하고 있다. 이를 두고 김태 는 “다산은 아직도 인간 중심의 사유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天理’를 근원적으로 전제하는 사유체계”라고 본 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또 인간의 개체성 혹은 자율적 인간관이 반드시 민의 정치적 권력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민권은 정치 요소간의 권력경쟁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 민권 론이 성숙하는 과정에서 공화정을 뒤엎고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 예도 있다. 김태 역시 다산의 자주지권을 들어 “(다산은) 인간이 좀 더 큰 자율의 역을 확보하고 있는 존재인 것으로 인식했다.”면서, 이런 인간은 ‘자기 결단의 주체성을 가진 존재’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와 같은 주체성을 전제로 “체제개혁이 성립하고 王政이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율적 인간관이 곧바로 현실 정치에서 민의 주체성이나 정치적 자유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능동적 인민으로 양성될 수도 있다. 이을호가 다산의 이런 인간관과 사상적 기저基底가 “개혁의욕을 돋구고 변혁의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 견해는 적절하다. 요컨데 자율적 인간관은 민의 권력을 인정하는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