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부가 뜻을 세움에 있어서 먼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일이 이루어지는 근간을 살펴 대체를 꽉 붙잡고 살고 죽는 두 길이 이 대체에 매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증산도신앙의 대체는 태사부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앙의 연원을 바로 세우는것이다. 사람이 자존심을 가져서는 안되지만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의 세속적인 자존심이고, 천지공도와 대의에 입각한 자존심은 크게 높일수록 좋은 것이다. 이 공도에 입각한 자존심은 나로 하여금 만인의 자존을 드높이고, 세상의 기강을 바로 잡는 요체이기 때문이다. 고요한 가운데 굳센 의지가 미동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대장부의 자존심이다.
대장부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해 이리저리 조변석개처럼 산만하게 되면 저녁 어스름 스치는 바람결에 나뭇잎이 흔들리듯 꼴뚜기망둥이진인의 말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허머시기같은 희대의 잡사기꾼의 말에도 일탈의 마음이 생기는것이다.
나를 스스로 멈추고 움직이게 하는것은 내 자신이지, 결코 외부의 그 어떤것이 내 마음과 행동을 제어할수 없는 것이다. 대장부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대체를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것은 그 어떤 외부의 환경, 산을 무너뜨리는 태풍과도 같은 고난이 나를 압박하거나, 혹은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미풍이 내 귀에 다가와 속삭이며 유혹해도 내 스스로 세운 대장부의 원원한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기원전 로마의 카이사르가 어느날 알렉산더의 전기를 읽다가 대성통곡을 했다. 알렉산더대왕은 약관 33세에 서방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무엇하나 이룬 업적이 없다며 한탄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이로서 카이사르가 품은 뜻이 얼마나 큰지 알렉산더대왕을 능가하고 싶은 그 마음을 우리는 알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로마 역사상 불세출의 지도자인 카이사르가 품은 뜻이 원대하다 해도, 오늘날 상제님천하사일꾼들이 가슴속에 품은 원원한 천지서약에 비할수 있으랴.
일찌기 마케도니아 촌구석의 알렉산더가 서방문명과 동방문명을 융합시키는 문명교류를 통해 헬레니즘문명을 촉발시키는 웅대한 업적을 남겼고, 진시황이 중원천하를 통일하고,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정복하고 로마제국의 기틀을 다진 카이사르도 대장부로서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풍운을 떨쳤지만, 어찌 오늘날 상제님천하사의 원원한 천지서약과 더불어 후천선경건설에 역사하고자 하는 그 웅대한 의지에 비할까!
그것은 선천문명, 선천이라는 환경속에서 타고난대로 영웅의 기질을 펼친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와 오늘날 상제님천하사일꾼들이 목표하는 시대적배경의 판국이 다르다는 것이다. 후천개벽기에는 다분히 영웅적기질과 지략만 가지고서는 대장부의 뜻을 실현할수가 없다. 먼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대체를 바로 잡는 근간의 바탕, 즉, 천하사신앙의 연원을 바로 세우고 확립된 상태에서 각자의 타고난 기질과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속속들이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는 위치에서 연원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연원은 인간 개개인의 정체성이 발현되고 사회와 문명이 체계를 이루고 유지되는 근원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약육강식, 어불성설의 원리를 주장하며 내가 황제이다. 내가 진인이요, 너도 나도 짜깁기 무슨 도수를 받았네 하는것은 선천의 약육강식 무법천지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지금은 모든것이 연원을 바탕에 두고, 어떠한 댓가의 바램도 없이 선천의 불의를 맑혀 광제창생하겠다는 일념의 의지에 입각해야만 대장부의 큰 뜻을 펼칠수 있는 미증유의 대격변기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대체를 확립하면 기다리고 인내할줄 아는 마음이 생기건만, 긁어 부스럼 나듯 조급한 마음이 팽배하게 되면 내 생각, 내 마음의 만사가 헝클어지고 산만해지는것은 어찌할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조급해도 안되고 너무 늘어져도 안된다. 적당한 긴장을 늘 유지하는 현명함을 발휘해야 한다.
믿음의 정도(正道)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때만 기다리지 말아라.” 하시고
“믿기를 활 다리듯 하라. 활 다리는 법이 너무 성급하면 꺾어지나니 진득이 다려야 하느니라. 나의 일은 운수(運數) 돌아 닿는 대로 될지니 욕심부리지 말라. 욕심이 앞서면 정성이 사무치지 못하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믿으려면 크게 믿어라. 믿음이 없으면 신명들이 흔드느니라. 여기가 맞나 저기가 맞나 기웃거리는 자와 방안에 발 하나 들여놓고 들어갈까 말까 하는 자는 가랑이가 찢어지느니라. 물샐틈없이 짜 놓은 도수이니 죽자 사자 따라가라.
나를 잘 믿으려면 죽기보다 어려우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8:112)
상제님말씀은 은유라는게 없다. 말씀속에 은유를 제시하시지만 결론은 눈에 불덩이를 들이대듯 언제나 직설로 매듭을 지으신다.
“때만 기다리지 말아라.”
“믿으려면 크게 믿어라. 믿음이 없으면 신명들이 흔드느니라.
여기가 맞나 저기가 맞나 기웃거리는 자와 방안에 발 하나 들여놓고 들어갈까 말까 하는 자는 가랑이가 찢어지느니라.
물샐틈없이 짜 놓은 도수이니 죽자 사자 따라가라. 나를 잘 믿으려면 죽기보다 어려우리라.”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제님신앙인 각각 개개인인 한 인간의 신앙전반에 걸친 족적속에 축적되어진 자기내면에 대한 성찰과 세상을 살며 얻어진 통찰력이 필요하다. 더불어 올바른 개벽관을 정립하고 조급하지도 늘어지지도 않는 활 다리듯 진득하게 인생을 사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더 바랄것이 있으랴.
"나를 잘 믿으려면 죽기보다 어려우리라" 이 말씀을 어찌 가볍게 생각할수 있으리오. 우리는 태사부님 제세시 수많은 교육을 통해 은연중에 이미 배웠다. 말씀과 가르침은 제시만 할뿐, 마음과 행동으로 그리고 일관된 인생으로 살아 내는 일은 신앙인이, 일꾼이 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