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이승만 정권 때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이 몇 가지 일어납니다. 2가지 예만 보아도 절대 권력이 미치는 영향을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1. 1953년 4월 27일 백두진 국무총리는 각 부처 장관과 도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를 합니다. "우리 한글은 철자법이 복잡하고 불편하니 우선 정부 공문서는 편리한 구철자법을 사용하도록 하라." 이 무슨 변괴같은 지시입니까? 우리 한글이 복잡하고 불편하다는 겁니다.
이런 발표가 있자 문화/언론계와 국회 등에서 반대여론이 비등했습니다. 문교부편수국장 최현배와 김법린 문교부장관이 반대하며 사임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후임으로 이선근을 앉히고 구철자법 사용을 강행하려 했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3개월 안에 현행 철자법을 버리고 구철자법을 쓸 것이며, 모든 잡지와 신문은 한자를 쓰지 말고 <성경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한글을 쓰라고 엄명했습니다. 이선근은 이승만의 뜻을 받들어 6월 25일 '한글간소화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국무회의를 통과 시킨 다음 7월 3일 발표 합니다.
여기서 이 사건의 발단에 대한 진실은 이렇습니다. 이승만 개인의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데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승만은 오랜 외국생활로 우리말에 서툴렀습니다. 그는 "연설문도 영어로 작성해서 다시 우리말로 번역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말이 불편했고, 구한말시대의 한글 밖에 몰랐습니다. 그래서 철자법을 옛날 것으로 되돌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승만이 정치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국민과 여론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으면 그런 발상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문화나 정치를 왼쪽 주머니의 물건을 오른쪽 주머니로 옮기는 것 정도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괴이한 일이 일어 났는데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2. 1957년 8월 30일 경주경찰서에 이강석이라고 자칭하는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이강석이라면 당시 자유당의 2인자이며, 실질적 운영자였던 이기붕의 아들로 이승만의 양자이기도 했던, 그야말로 '귀하신 몸'이었습니다. 서장은 군수, 시장과 더불어 "영감님께서 여기까지 와주셔서 소인 한평생의 영광입니다"라며 왕조시대의 신료가 쓰는 극존칭을 써가며 온갖 아양과 아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은 경주경찰서장의 극진한 대접과 경호차까지 제공받아 경주를 관광한 다음 영천경찰서에서도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지방의 어느 예비역 사단장은 "대통령 각하의 아드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미쳐 몰라뵈었다"면서 일부러 차를 세우고 경례까지 올렸다고 합니다. 그 청년은 진짜 이강석과 안면이 있었던 이근직 도지사에 의해 3일 만인 9월1일 가짜로 들통이 났습니다. 본명이 강성병이었던 이청년은 '권력의 맛'을 비록 3일천하였지만 제대로 느꼈습니다.
이 두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 일어난 웃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권력에 아부하기가 체질화된 관료들의 형태를 보여주는 희극적인 사건 하나를 보너스로 한 가지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그것은 '만송족'과 '낙지족'이란 유행어의 탄생입니다.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의 주변에 몰려 들던 권력을 향한 해바라기들을 일컬어 '만송족' 혹은 '낙지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기붕의 호가 만송이어서 '만송족', 낙지처럼 권력 주변에 들어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고 해서 '낙지족'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난 원인은 '부패한 권력은 그냥 부패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권력이었기에 부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부패할 수 밖에 없는 권력에 기생하는 '낙지족'은 어느 시대나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패의 사슬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게 충성을 바치는 미끼를 사용하는 '낙지족'과 '만송족' 같은 자들에 의해서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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