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정약용- 경학의 실학적 특성
19세기 전반의 다산경학은 주자의 성리학적 경학체계를 전반적으로 탈피하고 독자적 경학체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다산경학의 정립은 여전히 주자의 경학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18세기 전반의 성호(星湖)를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17세기 후반의 백호 윤휴(白湖 尹鑴)의 탈주자적(脫朱子的) 경학의 연장선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다산경학은 백호(白湖)의 고학적(古學的) 경학보다 탈주자학적 경학으로서 더욱 정밀하고 종합적인 체계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특히 다산의 경학에는 성리학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물론이요, 서학․양명학․고증학의 다양한 이론과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다산경학의 독자적 세계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며, 그만큼 다산경학은 실학파 경학의 결정판을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경(經)으로써 경(經)을 증명하는(以經證經) 고증학적 방법을 철저하게 적용하며, 동시에 제자백가와 역사서를 포함하여 선진시대에서 청대까지에 걸친 경학사(經學史)의 축적된 광범한 업적들을 종횡으로 인용하고, 경전의 미세한 술어와 쟁점까지 정밀하게 분석하고 빈틈없이 고증해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실증적 논리로서 기존의 해석들을 예리하게 비판함으로써 한국경학사 속에 다산경학이라는 독립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그는 경전해석을 통해 천(天)‧상제(上帝)와 인간존재와 자연에 대한 일관된 철학적 이론체계를 이끌어냄으로써 실학의 철학적 기초를 새롭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실학사상사에서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결정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산의 경학체계에서는 육경(六經)을 사서(四書)보다 앞세우지만, 때로는 사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사실이다. 곧 그는 사서로써 내 몸을 거처하게 하고, 육경으로써 내 식견을 넓혀간다.고 하여, 사서를 중심으로 삼고 육경을 그 활용으로 삼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경사서'의 다산경학체계에서 육경의 중요성은 사서를 앞서고 있다. 다산 자신이 자부하고 있는 것처럼 <주역>과 <예경(禮經)>의 연구가 그 독창적 성격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특히 다산의 예경(禮經)연구는 오경(五經)으로서 <예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례>․<의례>․<예기>의 삼례(三禮)를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의례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곧 그는 예경(禮經)을 경전별로 주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례(喪禮)나 제례(祭禮)의 의례를 중심으로 의례를 기본 주제별로 재분류하여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예학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다산의 <춘추고징>(春秋考徵)도 <춘추>와 <주례>를 기준으로 삼아 주대(周代)의 의례를 확인하는 고증학적 작업을 수행한 것이요, 그만큼 <춘추>에 대한 주석서가 아니라 주대(周代) 의례(儀禮)의 고증학적 연구서이다.
다산은 당시의 정통이념인 도학-주자학의 세계관을 비판‧극복하면서 자신의 경학적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천(天)을 이(理)로 규정하는 천즉리설(天卽理說)을 거부하고 천(天)을 신(神)으로 확인하며, 경외(敬畏)의 신앙적 대상으로서 천(天)‧상제(上帝)를 인식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백호(白湖)와 같은 맥락의 사천학(事天學)을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성즉리설(性卽理說)에 따른 선험적인 천리(天理)의 인성(人性)을 거부하고 인간의 영체(靈體; 心)가 지닌 속성으로서 선을 기호(嗜好)하는 인성(人性)을 확인하며, 개체적 자율성을 확립하여 도덕적 책임의 근거를 자주지권(自主之權)(자유의지)으로 확인하고, 인간의지가 인간관계를 통해 실천하는 공(功)으로서 도덕성을 강조한다.
셋째, 인물성동(人物性同)이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자연관을 거부하고, 물질적 세계를 인간존재로부터 분리시켜 단층적(斷層的)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자학에서 제시하는 천‧지‧인의 유기적 일체관을 깨뜨리고 천을 섬기는 신앙적 인간, 지(地; 物)를 이용의 대상으로 발견하는 과학기술의 실용적 인간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경학의 중심축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인간, 개체의 자율성을 지닌 인간, 물질적 자연을 이용하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우주적 질서 속의 인간관을 중심으로 확립함으로써 인간관계의 도덕의식과 사회질서를 재구성하는 데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다산경학이 주자학의 치밀한 사유체계와 견고한 정통적 권위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는 과정에는 서학의 세계관이 중요한 빛으로 조명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다산경학은 다양성을 종합‧지양하면서 실증적 정신으로 독자적 경학을 구축하였던 것이요, 결코 서학이나 어떤 기존의 사상체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