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물음이 종종 제기되었다. '다산의 사유는 근대적인가?' 이 물음이 계속 되풀이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다산 사유의 과도기적 성격을 드러낸다. 다산의 사유가 전형적인 전통 사유도 분명한 근대 사유도 아니라고 생각될 때 이 물음은 제기된다. 때문에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물음이 줄곧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물음보다는 되물어짐에, 즉 물음 자체를 끝나지 않게 만드는 되물어짐의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되물어짐의 구조란 곧 <다산 사유의 근대성 여부>에 대한 판결이 그 안에서 끊임없이 연기되고 때로는 유보되기까지 하는 불투명성이다.
그 불투명성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물음, 즉 그에 대한 대답 안에서만 비로소 다산 사유의 근대성이 일정한 해를 얻게 되는 물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본래의 물음에 대해 메타적 층위에 놓이는 이 물음은 곧 이것이다. '근대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수립된 지평 위에서만 본래의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메타적 물음은 종종 생략되었다. 이러한 생략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이 메타적 물음이 이미 해결된 물음, 즉 그에 대한 오해들이 대부분의 논의에서 이미 전제되고 있는 물음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오해들로 흔히 과학기술 문명, 주관화된 문화,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및 대중 사회 등이 열거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오해들을 가능하게 한 선험적 조건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우리는 지난 몇 백년간의 담론사가 그를 둘러싸고 소용돌이쳤던 존재 즉 '주체'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것은 주체 개념에 대한 존재론적 수준의 이해를 통해서만 근대적인 것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근대의 진정한 가능 조건은 주체가 아니라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즉, 주체가 근대 문명을 가능하게 했지만 주체 자체는 일정한 조건들 위에서 형성되었다. 이 조건들은 주체도 주체의 성과물도 아닌 보다 비가시적인 차원의 논리적 구조들이다. 주체는 이 추상적인 논리적 구조들과 구체적인 근대적 성과물들 사이의 매듭에 존재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우선 추적할 것은 이 논리적 구조들이다.
한국사에 있어 서구화 이전에 독자적 근대화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산 사유의 근대성을 논한다면, 그것은 그에게서 근대화의 잠재적 조건 즉 근대적 주체 개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죽음과 혼돈 속에서 시원을 찾는다. 인간은 무 앞에서 시간적 시원을 찾고 혼돈 앞에서 공간적 시원을 찾는다.
근대화/서구화의 끝에서 우리는 허무를 느끼고 이제 다시 그 과정의 시발점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가 다산을 읽는 것은 무/혼돈에 직면해 시원으로 돌아가 보려는 행위이다. 오랫동안 역사의 추동력이었던 서구적 주체와는 다른 모습의 주체가 어렴풋이 탄생했던 지점으로. 그러나 다산에게서의 근대적 주체 개념은 아직 보다 많은 명료화를 요청하는 개념이다. 이제 이러한 명료화는 바로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 논리적 구조를 검토하는데 있을 것이다.
다산의 사유는 근대적인가?라는 물음이 근대적인 것에 대한 해명을 전제한다는 것은 근대성이 다산 사유의 해명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조건으로서 선재(先在)함을 함축한다. 이 선재하는 조건이 서구적 근대성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우리의 물음은 서구적 근대성을 잣대로 해서 다산 사유의 근대성을 판단함을 뜻하는가? 즉, 서구적 근대성은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것인가 필연적인 것인가? 매우 난해한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우주 전체의 진화와 세계사 전체의 흐름을 외삽(外揷)해 보는 한에서 필연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주의 진화가 등질성에서 다질성/이질성(개체들의 내적 복수성의 증대 및 개체의 종류들의 증대)으로, 물질에서 생명, 의식, 자기의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 세계사가 끝없이 새로운 물질적 조건을 찾아가는 도정이었으며 그 조건 위에서 갖가지 의미와 가치가 펼쳐졌다는 것에 동의하는 한에서 그렇다. 이렇게 보는 한에서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우리는 다산 사유를 서구 사유의 잣대에 맞춰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와 역사의 진화가 일정한 경향을 내보인다고 해서 그 구체적 양태들이 일정한 것은 아니다. 멀리 볼 때의 도시와 가까이 들여다볼 때의 도시가 다르듯이, 세계사에서의 근대성과 서구의 근대성을 단적으로 일치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사는 (파라오, 브라만 계층 등) 거대 권력의 탄생과 신화로 대변되는 상고시대, 철기의 도입으로 인한 물적 토대의 변화와 정치적-사상적 격변으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고 수많은 사상들 중 하나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통일 국가들이 들어선 중세로 진행되었으며, 근대성이란 이 중세적 삶의 양태로부터 탈주를 시도한 다양한 경향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근대성을 우발적인 것으로 볼 수도 없으며(이 경우 어떤 일반화도 곤란할 것이다), 서구적 근대성만을 유일한 근대성으로 볼 수도 없을 것이다(이 경우 근대성의 규정은 너무 좁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난 3, 4백년간 흘러온 세계사의 '전반적인' 방향성을 집어냄으로써만 근대성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반적인 방향성을 균형 있게 잡아낸다는 것은 지난 몇 백년 간의 세계사 및 담론사에서 잔가지들을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가 굵은 가지들만을 잡아내는 노력을 요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근대와 현대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대는 근대의 경향이 극으로 치닫는 초근대의 흐름과 그에 저항하는 다양한 형태의 탈근대의 흐름이 얽히는 시대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읽어내야 할 '모더니티'는 탈근대의 흐름까지는 포괄하지 않는다. 근대에로의 진입 여부를 묻는 맥락에서 탈근대까지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문제삼는 근대성은 중세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해 19세기에 그 전형이 마련된 근대성이다. 우리는 이렇게 보다 순수한 형태의 근대성을 형성하는 전반적인 경향성으로부터 몇 가지의 논리적 구조들(哲學素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 그것은 곧 본질/초월에서 현상/내재로, 연속/하나에서 불연속/여럿으로, 이성/합리성에서 욕망/의지로의 이행이라는 철학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