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격동의 시기
한국의 격동의 시기 중에 4.19혁명이 있습니다. 4.19 이후 장면 정부 시기는 자유가 넘쳐난 시기였습니다. 가장 자유를 만끽한 것은 학원과 더불어 언론이었습니다. "만개한 언론의 자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말처럼 "4월혁명은 대학, 언론의 연합으로 가능했다"고 할 만큼 4.19에 끼친 언론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960년 7월 1일부터 정기간행물의 '등록제'가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언론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으로 "신문 및 정기간행물을 허가없이 발행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규정했던 46년5월 29일 미군정 법령 제8호가 비로소 폐기되었습니다. 4.19이후 일간신문의 경우 3배, 일간통신은 무려 20배에 가까운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언론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언론의 영향력도 대단히 커졌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제2공화국을 '언론공화국'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언론의 영향력이 확대됨으로써 자유의 분출은 절정에 달했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습니다. 지나친 언론자유가 사회의 질서유지를 방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4.19는 어찌 되었든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문학은 시대상황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며, 그 정신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만들었습니다. 4.19는 수 많은 격시와 조사, 그리고 상황시를 낳았습니다. 상황시에 <아! 신화같은 다비데군들>에서는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총알 총알 총알 총알 앞에
돌 돌 돌
주먹 맨주먹
피 비린 정오의 가도에 포복하며
아 신화같이 육박하는 다비데군들
또한....
김수영은 <푸른 하늘을>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은 "노고지리의 암유를 통해서 자유가 수동적으로 안이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된 자유는 압제에 저항하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혁명"을 통해서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김수영의 문학정신은 신동엽에 의해 더욱 깊이 있게 계승되었습니다.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중략)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껍데기는 가라.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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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금계좌 : 국민은행 474901-04-153920 성사재인(김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