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5 <말丑>
털보전하는 항상 자기가 상제님의 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말 머리가 말 등에 타고 계신 상제님보다 앞서 있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상제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사는 보셨지만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얘기를 에둘러 말 한 것이지 우스갯소리는 아니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의 성사재인의 공덕이란 상제님의 모사재천의 공덕에 견주어 조금도 차이가 없이 같은 것임을 강조하기 일쑤였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하들은 이것을 친구도수라 포장해서 말했다.
내가 신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도장에서 우변강의가 열렸다. 참 많은 사람들이 그 강의를 듣기위해 모여들었다. 타도장 사람들도 많았다. 캠코더로 그 강의를 녹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문난 명강사였다. 인사의 비밀을 드러낸다기에 잔뜩 기대했었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오행의 질량변화를 얘기하고, 태극도를 그려놓고 팔괘를 그 형상에 맞게 그려낸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또렷해지고 보니 그것은 우변에 나오는 고태극도를 그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초심자에게 시각적인 재미를 더하기엔 아주아주 충분했던 강의 재료였다.
이제 원을 그려놓고 열두 칸으로 나누어 매 칸마다 십이지지를 써 넣는다. 그리고 다시 계속된 강의는 진술축미를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진과 술을 잇고 축과 미를 이어 십자를 그리더니 이것이 천지의 큰 줄거리라고 했다. 미는 상제님이 신미생으로, 진은 태모님이 경진생으로, 술은 태사부님이 임술생으로 오셨다는 것. 그런데 이제 축에 이르러 머뭇거린다. 털보전하는 소띠가 아니라 말띠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뭇거림이란 나만의 느낌이었다. 그 강사는 아주 쉽고 간단하게 이렇게 얘기해버렸다. ‘축 자리는 겨울이다. 만물이 폐장 한 곳이라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곳이다.’ 그러면서 ‘이 자리가 세상에 드러나는 곳은 오’라며 축에서 긴 줄을 그어 오에 이어 붙였다. 말도 길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의를 끝냈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강사 분은 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신앙을 그만두었다. 신앙을 접으며 ‘내가 털보전하에게 우변을 잘못 배웠다’며 한탄을 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글쎄 무엇을 잘못 배웠다는 얘긴가?
초판 도전을 내놓고 몸져누웠던 털보전하가 병자정축의 북소리를 듣고 물약자효하여 일어나 전설의 세종도장에서 우변 강의를 했다. 행림출판사로부터 우변 판권을 인수하여 어려운 한자를 한글로 바꾸어 출간했다. 그리고 각도장에서 우변을 강의할 수 있는 강사들의 우변 강의를 장려했다. 우변이 좀 어렵다는 신도들 얘기를 듣고 우변요약본도 출간했다. 본 글도 어려운데 요약본은 쉬울까? 주해를 덧붙인 것도 아닌, 더 어렵게 만들어 요약본을 낸 저의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우변을 통해 털보전하는 무엇을 노렸던 것일까?
도장에서 치성준비를 하면 음악소리 대신 태을주 주송 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래된 도장 문화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털보전하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털보전하의 목소리로 태을주 주송 소리를 녹음했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독점권을 가졌다 생각했는지 초판도전 출간 이후 다시 녹음한 주송소리는 장송곡 같아 성전에 틀어 놓기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남이 들을까 무섭다.
태사부님 선화하시기 전에 대치성에 참여해 초헌관의 자리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알것이다. 상제님 앞에는 태사부님이 초헌관으로 앉고, 태을천상원군님 앞에는 털보전하가 초헌관으로 앉아 헌작을 한다. 털보전하가 태모님 앞에 초헌관으로 앉지 않고 태을천상원군님 앞에 초헌관으로 앉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용봉으로 상제님 태모님을 대행한다고 하면서도 태을천상원군님 앞에 초헌관으로 자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남성이 여성 앞에서 헌관이라도 하면 큰일 나는 일인가? 태사부님은, 털보전하가 태을주 주송소리를 녹음하고, 매 대치성 때 상원군님 앞에 초헌관으로 앉는 것에 대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만 말씀하셨다. 자식 이기는 부모란 없는 것이다.
언젠가 털보전하가 도훈 중 태을천상원군님께 꾸중을 들었다는 얘기를 했다. 자세한 내용은 자신의 사후에 공개될 것이라며 더 이상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또 수염이 허연 신선들이 상원군님께 조인트를 까이며 혼나고 있었다고 했다. 그것도 다 자기 잘못이라는 것이다. 자기 몸에 선매숭자 기운이 잘 내리지 않는 것을 상원군님이 그 실무자들을 그렇게 꾸짖었다는 것이다. 그 신선들은 기분이 어땠을까?
그 때 털보전하는 우변강의를 하며 우주원리를 깊게 들어가면 태을천상원군님이 도출되어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냥 책만 읽어서는 어디에도 상원군님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퍼즐 조각을 잘 맞추어보면 아마 털보전하는 축丑에 대한 물음표를 이렇게 오午라고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털보전하는 아마 이런 내용을 신앙초기부터 일급간부들을 중심으로 심화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그 때 그 강사분이 잘못 배웠다는 우변이란 이것이었는지 모른다. 저쪽의 소띠들 김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이 앞서야지 말이 앞서면 못 쓴다.”하시었다. 그런데 털보전하는 자기의 말머리가 상제님 보다 앞서서 그런지 항상 일보다 말만 앞세운다. 그 중 가장 못된 말이 자기가 누구라고 하는 것인데 대순을 비롯한 여타종파들의 주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말 만드는 재료만 약간 수준이 높을 뿐이지 본질은 하등 차이가 없다. 한마디로 돗진개진이요 도토리 키 재기이다.
털보전하의 일하는 꼬라지를 <행군하는 북 도수>라 장 제목을 붙인 비인복종도수를 보면서 현실적으로 느껴보자.
<이어서 응종의 집으로 가시어 응종으로 하여금 태인 신경원의 집에서 새 수저 한 개를 가져오게 하시고/ 일전에 빚으라 하신 식혜 아홉 사발을 가져오라 하시어 단지 한 개에 쏟아 부으니 단지에 꼭 차더라./ 이에 양지와 백지와 장지를 각각 여러 권씩 준비하여 놓고 말씀하시기를/ “비인 복종이 크다 하므로 이에 행군하는 북도수를 보노라./ 북은 채가 있어야 하나니 이 수저가 북채가 되리라./ 행군할 때에 이 수저로 북채를 하여야 녹이 진진하여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초5:145,개5:203
처음 읽은 사람이 보아도 녹에 관련된 말씀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털보전하는 육임군 즉 핵랑군 발동을 역사의 대업으로 생각하고 도기 132년 그러니까 2002년 이런 얘기를 했다. 자기가 말이라고 이렇게 말을 앞세운다.
“군령발동에 잘 참여하면 녹이 붙는다. 육임군 발동 후 신앙 잘 하면 녹이 붙어서 천하사 중심으로 일할 수 있다.”
신앙 잘 하면 그냥 녹이 붙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고가사하라며 직장 잘 다니고 있는 사람 옷 벗기는 재미에 푹 빠진다. 직장 그만두고 상제님 열심히 하면 녹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 천하사 중심으로 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책임 없는 공수표를 남발하면서 뒤에서는 간부들 성금 낸 액수를 살펴보며 ‘이런 보직을 받은 놈이 성금을 이것밖에 안냈어!’하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옷 벗은 놈이 뭐로 돈을 내는가!
충성스런 신하들은 복종도수 실현을 위해 녹창출 도전어야를 실시한다. 야밤에 한적한 장소에 사람들을 모아서 성금서약을 받고 카드깡 요령을 전수하는 것이다. 돈은 구해서 쓸 게 못되고 이렇게 돈은 돌려써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다. 당시 신앙을 잘 했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녹이 붙기는커녕 잘 벌어먹던 녹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육임군이 발동해 녹이 붙은 것은 털보전하 뿐이었던 것이다. 전하는 말로써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하고, 말로써 자신을 살찌우는 묘한 재주를 타고 났다.
이렇게 지도자가 정도를 가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을 거부해야 한다. 신앙을 거부하지 않고 그냥 계속 붙어 있는 것은 신비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옛날 털보전하가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수원 어느 도장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 강의 요점이 어느 날 누가 나타나서 내가 누구라고 하면 그냥 신앙을 접고 그 사람을 좇아간다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 일은 해놓고 봐야 아는 일이다. 내가 누구라고 주장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털보전하의 일하는 꼬라지를 보면 더 이상 이 도정을 맡겨 둘 수 없다.
털보전하의 말은 이미 부도가 난지 오래되었다. 신앙초기 누가 ‘우리 종정님 말씀은 보증수표’라 하였는데 털보전하의 말은 모두가 부도수표다. 바로설려나 올림픽이 지축이 바로 서려는 징조라 해석한 그의 말을 돌이켜보면 알 것이다. 얼마나 책임감 없는 무능한 지도자인가.
그러니 하도니, 낙서니, 문왕괘니, 정역괘니, 우변이니 하는 개벽 이론들로는 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러한 이론은 자칫 말을 앞세우는 우를 범하게 해 ‘내가 누구’라고 주장하기에 알맞은 내용들을 제공한다. 야구나 축구경기는 해설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경기는 그라운드의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하듯 상제님 일도 말을 만드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과 동고동락하며 녹을 창출하는 일꾼들이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더 이상 말의 신비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자.
말머리가 상제님 보다 앞서서 말을 앞세우는 말을 우리는 이제 끌어내야 한다. 도판을 어지럽히는 말과 말 모두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