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사상 -도덕적 인간론
다산의 새로운 천인관은 주로 인간 심·성의 도덕적 구현이라는 면을 중심으로 하고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서 살핀바,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이 여김’에 있다는 것이요, 그것이야말로 곧 ‘천명’이며 ‘본성’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성性을 논하고 심心을 논하는 것은 장차 무엇에 쓰려는 것인가. 선善을 밝히는 것은 장차 몸을 성실히 하려는[誠身] 것이요, 성을 논하고 심을 논하는 것은 장차 일을 실행하려는[行事] 것이다. 맹자가 측은지심을 논한 것은 이 심을 확충함으로써 인仁이 온 천하에 덮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심은 본래 덕德을 갖춘 것이 아니요, 오직 곧바로 추진하는 속성이 있다. 능히 나의 올곧은 심[直心]을 실행한 경우, 이를 일러 덕이라 한다. 선을 실행한 후에야 덕의 이름이 생긴다. 실행하기 이전에 어찌 명덕明德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인간의 삶이란 것은 결코 ‘천명’을 떠날 수가 없다. 인간의 심·성 자체가 ‘천’으로부터 직접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명한 심을 통해 그 본성을 논하는 것은 곧 타고난 본성의 도덕 지향성을 확인하고 더 확충하고자 함이요, 자신의 타고난 심의 추진력을 논하는 것은 그 본성을 더욱 크게 확충하여 더 큰 덕과 선을 실현함으로써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다 ‘왕정’을 구현하는 정치사업도 결국은 인간 각자가 그 본성과 심력心力을 확충함으로써 도덕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과정을 통해서야 이에 원활한 실현을 볼수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산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심력’을 확충하는 길은, 성리학에서의 경우처럼 홀로 ‘존심양성存心養性’하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도道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인간 관계를 좋게 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에 예법을 만들어 선으로 인도하고 악을 막으며, 일동一動·일정一靜·일언一言·일묵一黙·일사一思·일념一念에도 모두 법식과 금계禁戒를 두어 사람들로 하여금 나아가고 물러서게 한다. 그 글인즉 시. 서,역,춘추,의 천만 가지 말들과 「경례」 300, 「곡례」 3000의 갖가지 항목들의 단락과 조각들로서 너무도 많아 모두를 다 탐구하고 익힐 수조차 없 지만, 요컨대 그 귀추는 인간 관계를 좋게 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공자가 직접 발언하신 ‘우리의 도’에 대한 다산 자신의 해석이다. 공자가 말한 ‘우리의 도’란 결코 한 개인의 특수한 것을 일컬음이 아니요, 온 천하를 관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를 가리켜 말한다. 그래서 그 ‘도’의 내용은 다산의 해석 그대로, 시· 서· 역을 비롯한 여러 경 전과 「경례」 300, 「곡례」 3000이라는 인간 관계의 모든 측면에 이르기 까지를 관통하는 보편성을 띠는 것이다.
그런데 다산은 ‘인간 관계를 좋게’하는 가장 크고도 바른 길이 곧 ‘서恕’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서恕’라는 것은 다산 도덕 실행론의핵심 관건이다. 그는, 공자의 도가 ‘충서忠恕일 뿐’이라고 하는 증자曾子의 깨달음을 그대로 긍정하면서도, 이에 다시 덧붙인다. “서恕 한 가지는 상하를 관철하고 전후를 관철하며 좌우를 관철한다. 단지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 도道는 지극히 간약簡約하다. 그런데 ‘서’ 한 글자를 풀어놓으면 온 우주에 가득찬다” “내 심心으로써 척도를 삼아 온 세상 사람들의 상호 관계를 헤아려 보아 그 가지런하지 못함을 가지런하게 하고 그 균평치 못함을 균평하게 한다면 심신이 모두 바르게 될 것이다.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남도 바 르게 되도록 하니, 이것이 평천하平天下의 요법이다” 곧 내 마음을 척 도삼아 남의 마음을 헤아려 실행하는 길이야말로 인간 관계를 선하게 할 뿐아니라 ‘평천하’라고 하는 거창한 정치사업을 실현할 수도 있는 요법이다.
다산은 다시 단언하다. “천天이 인간의 선악을 살피는 것도 이같이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 관계하는 사이에서 정직한가 혹은 사특한가를 감시한다. 그리고 또한 식·색·안일을 추구하는 욕심을 주어서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다투거나 양보함을 징험해보고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고찰 해본다. 이로 본다면 옛 성인聖이 천을 섬기는 학문[事天之學]은 인륜을 벗어나지 않으니, 곧 서恕 한 글자는 사람도 섬길 수 있고 천天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천을 섬긴다[事天]’는 명제는 다산 심성론에서 극히 중요
한 의미를 지닌다. 성리학에서는 천天을 ‘이법理法’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다산에 의하면 리理라는 것은 결코 실체가 아니요, 가령 옥돌이라든가 나무의 ‘결’과 같은 어떤 실체의 속성을 가리킴일 따름이다. 그 러므로 “리理는 본래 무지하고, 또한 위엄이라든가 권능도 없다” 그래서 다산은 인간에게 심·성을 부여한 근원으로서의 천天이야말로 인간도덕의 궁극적 원천이라고 확신한다. “군자의 학문은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서 시작하고 천天을 섬기는 일로 끝난다” 라고도 확인한다.
무릇 이 세상 인간은 어차피 생래적 욕구를 추구하면서 살기 마련인데, 그러면서도 함부로 법法을 범하지 못하는 것은 위에 법을 집행하는관원이 있고 죽음을 내릴 수도 있는 임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내심의 죄악은 이들 군장君長이 결코 관장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래서 의관을 정제하고 낯빛을 꾸미고서 “종신토록 거짓을 행하면서도 당세의 아름다운 명성을 잃지 않으며, 성깔을 부리고 악을 범하면서 도 능히 후세의 우러럼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 이 세상 도처에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산의 천天 즉 상제上帝는 어떤 존재인가. 인간과 만물을 ‘조화造化’한 궁극적 근원일 뿐아니라 인간의 내면에다 심·성을 부여하고 또한 그 심·성을 간단없이 살펴 일깨워주는 궁극적 실체이다. “천명天命은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시초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성性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다. 원래 형체는 없지만 신묘하게 운용하는 신神(즉 靈明한 心)을 짝 지어 부여했으므로, (性과 神이) 서로 더불어 상감相感한다. 그러므로 천天이 인간에게 경고하는 경우에도 형체가 있는 이목耳目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양 형체는 없지만 신묘하게 운용하는 도심道心을 통해서 타이르고 가르친다. 이것이 이른바 ‘천이 그 마음을 타일러 준다’는 것이니, 그 타이름을 순종한다면 천명을 받드는 자요 그 타 이름을 만만히 보고 어긴다면 천명을 거역하는 자이다” 그래서 다산은 말한다. “천天의 영명함이 인간의 심心에 직통해 있으므로 아무리 은미한 일일지라도 살피고 비추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방안에 와서 조림照臨하며 날마다 여기 있으면서 감림監臨한다. 인간이 진실로 이를 안다면 비록 대담한 자라 할지라도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다산의 상제천은 인간의 인간다운 ‘까닭’을 이루어 주는 도덕심의 궁극적 근원이다. 그리고 인간의 속마음을 타일러 도덕 행위를 하도록 권유하고, 더구나 한 순간도 간단 없이 그 도덕 행위를 ‘현장에 임하여 비추고 현장에 임하여 감독하는’ 궁극적 심판자이다.
다산에 의하면 도덕적 선은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 선을 행함으로써야 실현되는 것인데, 그 가운데 으뜸인 것은 부자父子와 같은 가장 가까운 인륜人倫의 선이다. 그래서 그는 “효제孝悌가 곧 인仁”이요, “인仁은 효제로부터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무릇 인륜을 제외하고는 지선至 善이란 것은 없다”라고도 한다. 그는 다시 덧붙인다. 천天이 인간의 선악을 살피는 바는 항상 인륜에 있다. 인간이 인륜을 선하 게 한다면 천을 섬길 수 있다.
인간이 천天을 섬기는 일은 결코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의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선을 좋아하는 본성을 인간 자신의 영명한 내심이 자발하여 추진하고 실현해내는 주체적 과제이다. 본성과 내심에서 자발하 는 과제이므로,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강제할 수는 없다. 더구나 ‘천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것도 ‘천을 섬기는데’ 내심으로 독실해야 한다는 과제를 스스로 설정한 것일 뿐이요 소위 독실한 ‘신앙’의 경우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런데 다산은 다시 경세론적 과업에서도 천은 결코 외면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고 하는 확고한 이론을 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