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理),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의 이름
노장(老莊)은 기(氣)의 자발적 자기 조직을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 분화하고 조직을 만들어 가는 도(道)의 작용을 절대라고 읽었다. 그것이 자연(自然)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주는 인간의 유용성과 권력의 편견으로 재단할 수 없는 절대이고 또한 신비인 것이다. 무의미에 철저함으로써 도가는 해방과 아타락시아를 성취할 수 있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 너머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오만을 버리면, 자연의 모든 과정은 동등한 가치와 위상을 갖는다. 그것이 평등(平等)이다. <학의 다리 긴 대로, 참새 다리 짧은 대로>가 그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등한 자연의 과정이며 미(美)와 추(醜) 또한 자연의 선택과 축복이다. 인간사의 근본 범주인 시(是)와 비(非) 또한 자연의 혼돈(混沌) 앞에서 빛을 잃는다.
주자는 이런 무위(無爲)의 반문명적 반사회적 기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에 <질서>가 있듯이 그와 동시에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기(氣)보다 앞서 이(理)가 있다. (노장이라면 이는 기 안에 있거나 기와 동시에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즉, 현실을 <앞과 뒤에서> 지배하는 초월적 주재(主宰)가 있다. 이것이 같은 유기적 사유를 골간으로 하면서도 노장과 주자학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주자는 말한다.
천지(天地)가 있기 이전에 필경 이(理)가 있었다. 이 이(理)가 있었기에 이 천지가 있게 되었다. 이 이(理)가 없었다면 천지도 없었을 것이고, 사람도 사물도 없었을 것이고, 땅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理)가 있어 기(氣)가 유행했고, 만물을 발육(發育)하게 되었다.(<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가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편찬한 <주자어류>를 펼치면 곧 바로 만나게 되는 말이다. 이 말은 흡사 땅이 있으라 하니 땅이 있었고, 만물이 있으라 하니 만물이 생겼다는 창조의 <의지>를 연상시킨다.태극(太極)이 움직여 양(陽)을 낳았다(太極動而生陽)는 주자의 말을 순전한 은유로 읽어서는 안 된다.이 말은 자연 질서 너머에 그것을 관장(主宰)하는 우주적 <중심>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주자에게 있어 태극(太極)은 기(氣)가 아니라 기(氣)의 <소이(所以)>이다. 그것은 기(氣)와는 다른 초월적 영역의 형이상자(形而上者)임을 스스로 명시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기(氣)의 소이(所以)로서의 태극(太極), 혹은 이(理)는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인격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점은 분명히 해 두어야겠다.
그는 영원의 절대를 비활동성과 비인격성(無情意 無計度, 淨潔空闊的 世界)에서 읽었다. 주자는 늘 이(理)가 구체적 인격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의 <형이상학>은 <논어(論語)>와 <중용(中庸)> 그리고 <맹자(孟子)>에 나오는 신(神), 천(天), 귀신(鬼神) 등의 <인격신적> 관념을 애써 <자연론적>으로 탈색시키려고 노력했다(鬼神二氣之良能). 초월적 신이라고 말해지는 것들(鬼神)은 실제 음양의 변이가 갖고 있는 신비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의미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반쯤의 신학>에 실망한 선교사들은 이기론을 버리고 <오래된 공맹의 유학>과 제휴하려 했다.)
저 하늘, 돌고 돌아 그치지 않는 것. 그런데 지금 그 하늘에 죄와 악을 판정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 (而今說天有箇人在那裏批判罪惡固不可, <주자어류(朱子語類)>
<천지(天地)의 마음>인 태극 혹은 이(理)는 사물을 직접 혹은 손수 <낳지는> 않는다. 도공이 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 듯이 이(理)가 생명의 기(氣)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理)는 실질적 벡터로서 인과적 동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의 경계는 넘나들 수 없다. 그렇다면 이(理)는 어떤 방식으로 기(氣)의 물질 세계를 주재(主宰)하는가.
나는 주희가 말하는 <이(理)의 주재(主宰)>를 이렇게 이해한다. 이(理)는 일종의 <신호>에 가깝다. 그 신호는 임의적으로 발해지지 않고, 늘 전체의 네트워크를 의식한, 유기적 필연성과 조화의 <패턴> 안에서 명령자 없이 발해진다. (*이 <비의지적 의지>를 리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리치의 천주(天主)에 대한 변증이 조선 유학자들을 설득시키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다.) 기(氣)는 그 신호를 받아 행동을 취한다. 그렇지만 그 행동은 대체로 불완전하게 이루어진다. 흡사 뇌가 <명령>한 것을 손발이 따라 주지 않는 것과 같다. 나아가 기(氣)는 그 신호를 무시할 수도 있다. 인욕(人欲)으로 통칭되는 무절제한 충동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므로 이(理)는 기(氣)를 <온전히> 지배하지는 못한다.
이(理)가 비록 기(氣)를 낳지만, 타고난 즉 이(理)가 그것을 제어하지 못한다(氣雖是理之所生, 然其生出, 則理管他不得 <주자어류>
그렇다면 이(理)를 물리과학적 의미의 <원리> 혹은 <법칙>과 등치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여기가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읽을 때 깊이 유의해야 하는 곳이다.
예를 들어보자. 주자는 이(理)가 기(氣)를 <명령한다(天命)>, 혹은 <명령하는 듯하다(猶命令也)>고 말한다. 우리는 명령이란 말에서 완전한 수행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렇지만 실제 명령은 수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심하게 말하자면 불복하고 버틸 수도 있다. 즉, 기(氣)는 이(理)의 명령에 대해 <어느 정도>임의롭다. 기(氣)는 복종과 자유의 이중적 공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를 불리부잡(不離不雜)!이라 한다. 이 양면성, 혹은 <어긋남(過不及)>에서 인간의 악(惡)이 설명되고 후천적이고 인위적인 노력 ―자기 수양(修養)이나 사회적 강제 ― 의 필요가 생긴다. 기(氣)의 어긋남, 그 <복종과 자유>의 불확정적 공간은 언뜻 기이하게 들린다. 우리는 명령에서 곧 즉각적 수행을 떠올리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낯모르는 과객이 물을 떠달라면 모를까, 명색 우주의 절대자로서 종복인 기(氣)를 좌지우지할 권위 혹은 권력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주자는 노비가 상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또 알아듣고도 불복할 수 있듯이 기(氣)는 이(理)의 명령을 불완전하게 수행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비유를 들었다. 군주가 포고를 내렸지만 수령이 무시할 수도 있다. 그것을 일일이 챙기고 감시 감독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는 이런 예도 들었다. 아들을 제 속으로 낳기는 하나 통제하지는 못한다.<주자어류>
그런데 기(氣)는 어째서 이(理)의 명령 혹은 신호를 불완전하게 수행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자의적 <의지>인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의지>는 때로 그 주체를 확인하기 힘들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나 아닌 타자, 이를테면 생리적 욕구나 심리적 변덕의 결과이기 십상이다. 또 현대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처럼,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논제는 불교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주자는 기(氣)가 이(理)에 불복하게 되는 것이 자신의 의지로서보다 유기적 연관의 필연성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기(氣)는 본래 순수했다. 그럴 때 기(氣)는 이(理)의 의지에 완전히 복속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氣)는 자신의 본성상 특정한 질(質)로 특성을 갖추며, 이렇게 <구르고 뒤섞이는> 변전 과정에서 우주의 기(氣)의 풀(pool)은 <이미> 잡다해져 있다. 이렇게 분화되고 잡다해짐으로써 일정한 오염과 일탈이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은 탄생 과정에서 그리고 후천적으로 서로 다른 기들을 부여받고 그에 둘러싸인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서로 다르게 태어난다. 그 차이는 육체적 차이와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성격과 기질, 습성과 기호까지 광범위한 결정력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