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사유에서 중세적 연속성은 무너지고 새로운 계열화가 탄생한다. 다산에게서 리의 초월성은 거부되며 기의 내재성만이 인정된다. 리라는 초월성과의 단절이 발생한 것이다. 다산은 초기에(<중용강의>) 리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기는 독립적인 존재이고 리는 의존적인 존재이다[蓋氣是自有之物 理是衣附之品]. 그는 퇴계의 이발(理發)을 비판하거니와, 중요한 것은 그의 사유가 퇴율(退栗)의 구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산의 독자적인 사유에서 이제 리는 자취를 감추며, 경험 세계는 기질로서 설명된다.
다만 인간은 도의를 지님으로써 여타 초목금수(草木禽獸)와 불연속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선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리는 만물에 보편적으로 부여되며 기의 차이에 따라 사물들의 차이가 형성되지만, 경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기가 만물에 보편적인 것이 되고 인간만이 도의를 지니게 된다. 리의 연속성의 도의의 불연속성으로 바뀐 것이다.
다산에게서 불연속은 무엇보다도 초목금수와 인간 사이에 그어진다. 주희에게서 문제가 되는 분절은 리와 기 사이에 있다. 경험과 선험 사이에 선이 그어진다. 그러나 경험과 선험이 합쳐져 이루는 세계의 누층적 위계는 연속적이다. 다산에게서 성(性)의 의미는 급변한다. 다산에게 성이란 본연의 무엇이 아니라 현실의 무엇이다. 현실 속에서 확인되는 데로의 각 존재의 본성일 뿐이다. 본연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현실적인 성이 본연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기질에 입각해 논의된다. 선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리는 만물에 보편적으로 부여되며 기의 차이에 따라 사물들의 차이가 형성되지만, 경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기가 만물에 보편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과 초목금수도 일차적으로는 연속적이다.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질의 차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도의(道義)를 가짐으로써, 인간은 초목금수와 결정적인 불연속을 형성하게 된다. 인심자 기질지소발야, 도심자 도의지소발야(人心者 氣質之所發也, 道心者 道義之所發也)(<孟子要義>)라는 구절은 이 점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주희의 사유가 리의 보편성과 근원성에 기반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와 기질의 누층적 위계에 입각한 연속의 사유라면, 다산의 사유에서는 기의 보편성과 현실적 성의 차이에 입각한 불연속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의 사유를 불연속의 사유로만 특징지을 필요는 없다. 논의의 층위와 영역에 따라 달리 나타날 뿐, 연속과 불연속은 늘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논의를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다산 사유에서 심(心)의 위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날카로운 이분법적 사유에서, 예컨대 데카르트적 사유에서, 심(心)은 순수한 영혼의 작용(cogitatio)이거나 순수한 물질(corpus)이다. 즉, 순수 영혼이거나 한 장기(臟器)로서의 심장이다.
다산에게서 심(心)은 물질적 계기와 도덕적 계기에 동시에 상관적이다. 달리 말해, 유형의 마음과 무형의 마음이 동시에 인정된다. 유형의 마음은 심장이고 무형의 마음은 허령불매자(虛靈不昧者)이다. 허령불매자란 물론 도의를 가진 마음이다. 마음은 물질성과 도덕성의 매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점에서 다산의 사유에는 심신 일원론적인 측면과 이원론적인 측면이 공존하고 있으며<神形妙合>, 전자가 자연에 대한 실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면 후자가 그의 도덕철학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다산이 리와 성의 연속성을 해체시켰다 해도, 하늘과 사람의 연속성은 또 다른 방식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하늘과 사람을 연속으로 보고, 사람과 초목금수(草木禽獸)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것은 데카르트나 기독교 사상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데카르트에 있어 인간의 몸과 마음은 확연하게 구분되며, 몸은 기계론적 설명의 대상인데 반해 마음(영혼)은 신과 연결된다. 그 끈은 본유 관념에 있다.
인간은 무한한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서 무한한 신의 관념이 유래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결국 그런 관념은 바깥의 무한한 존재가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본유 관념은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신을 이어주는 빛이다.
다산 역시 세계를 기로 설명하고자 했음에도 인간이 하늘과 맺는 관계와 땅과 맺는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다산에게 몸과 마음은 한 실체의 두 측면이며 데카르트적 이원론과 다르다. 그러나 다산에게서도 허령불매자로서 마음은 하늘로 이어진다. 물론 다산이 하늘을 요청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덕적 맥락이다. 그의 하늘은 단순 소박한 고대의 하늘, 즉 上帝일 뿐이다.
결국 다산은 성리학의 주지주의적인 리를 거부한 대신 감성적인 형태의 하늘을 논고 하고있는 것이다.이것은 그의 귀신론으로 이어지며, 군자 처암실지중 전전율율 불감위악 지기유상제임여야(君子 處暗室之中 戰戰慄慄 不敢爲惡 知其有上帝臨女也)(<中庸自箴>)라는 구절은 그가 근대적 세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나를 드러낸다. 다산은 근대성의 몇몇 단초를 마련했지만, 본격적인 근대로 진입했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