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읽다보면 단군왕검께서 마소에 비유한 가르침 한 구절을 만난다.
<爾觀牛馬이관우마 猶分厥蒭유분궐추 爾互讓이호양 無胥奪무서탈 共作공작 無相盜무상도 國家以殷국가이은
너희는 소와 말을 보아라. 오히려 먹이를 나누어 먹나니 너희는 서로 양보하며 빼앗지 말며 함께 일하고 도적질 하지 않을 때 나라와 집안이 번영하리라.>
마소가 꼴을 먹는 것은 굉장히 평화스러운 장면이다.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아기염소>를 들어보면 해맑은 동심을 느낄 수 있다.
<파란하늘 파란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아기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해처럼 맑은 얼굴로
빗방울이 뚝뚝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엄마 찾아 음메 아빠 찾아 음메 울상을 짓다가
해가 반짝 곱게 피어나면 너무나 기다렸나봐
폴짝폴짝 쿵쿵쿵 흔들흔들 콩콩콩 신나는 아기염소들>
옛날 털보전하도 마소가 풀을 먹는 모습 속에서 일심을 보았던 모양이다. 이 얘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연결 지어 얘기한 중용장구 한 절이 멋스러웠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이라 이르고, 성을 따름을 도라 이르고, 도를 품절品節에 놓음을 교라 이른다.>
혁명판이 열린 이후 요즘 들어 여기저기서 마소경쟁이 치열하다. 은근이 자기가 소丑라느니 말午이라느니, 태사부님 선화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현혹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소를 키우는 사람들의 꼴 베는 폼이 영 시원찮다.
어렸을 때 난 시골에서 자랐다. 농기계 보급률이 아주 낮은 시절이었다. 요즘 집집마다 차 없는 집이 별로 없듯이 그 때는 어지간하면 집에 소 한 마리씩은 다 키웠다. 소를 방목해서 키운 것이 아니라 외양간에 들여놓고 키운 것이다. 그러니 아직 중학교도 안간 어린 나이였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꼴망태를 둘러메고 풀을 베러 다녔다. 바쁜 농사철, 노동력이 부족해지면 집에서 으레 아이들에게 꼴 베는 일을 시켰다. 그래서 초딩 동네 꼬마들은 논둑에서 혹은 밭가에서 풀을 베며 놀았다. 지금 돌아보면 전원 어쩌고 하지만 그 때는 참 지겨운 일 중 하나였다.
풀을 베는 도구는 낫이었다. 풀을 베러 나서기 전에 항상 낫을 갈았다. 숫돌에 물을 묻혀 낫을 가는데 낫을 잘 가는 사람은 적당히 갈아서 썼지만 그렇지 않고 욕심만 잔뜩 품은 사람은 낫을 지나치게 갈았다. 지나치게 간 이 낫을 들고 의기양양 풀밭을 찾아 길을 나선다. 그는 누구보다도 꼴을 많이 벨 욕심에 앞장을 서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풀을 베기 시작하자 지나치게 갈아온 이 낫은 처음 얼마간은 잘하는 듯싶더니 이내 풀이 잘리지 않는다. 풀 베는 일을 멈추어 서서 낫을 살펴본다. 날을 너무 지나치게 세워서 낫의 이가 듬성듬성 빠져버린 것이다. 그날 그 초보자는 욕심조절장애로 인해 그렇게 풀 베는 일을 망쳤다.
요즘 도판에서 마소를 키우느라 꼴을 베는 사람들의 하는 양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가 욕심조절장애에 걸렸다. 낫을 적당히 갈아서 써야 할 텐데 자기 욕심껏 날을 세울 대로 세워버린다. 날이 바싹 섰으니 뭐든 잘 될 것 같지만 맘대로 잘 되지 않는다. 날의 이가 다 빠지면 연약한 풀인들 잘리겠는가! 쫑섬이의 낫을 다루는 폼이라는 게 낫질을 하는 게 아니라 꼴은커녕 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는 격이다.
태사부님 선화를 통해 벌어진 상속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쫑섬이가 이 단체 재산을 상속으로 개념을 잡는 바람에 안낼 세금을 내버린 게 그 얼마인가! 태사부님의 격을 실추시킨 것 또한 그 얼마인가! 그러면서 털보전하께서 재산증식에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니 기여도를 감안해 반 이상을 받아야 한다며 쫑섬이 자기가 먼저 소송을 시작한 짓거리 아닌가. 혁명가님은 상속소송을 하지 않았는데 쫑섬이 혼자 털보전하를 위한다며 날뛰다가 낫의 이가 다 빠져버린 것이다. 이후 모든 상황이 혁명가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제 거꾸로 이 단체 재산이라고 말을 바꾸려하였지만 법원에서는 이미 이 단체 성장의 진실을 다 알아버린 뒤였다. 법원에서 알아낸 이 진실은 국가기관에서 입증해주는 자료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짬똥들은 한 때 쫑섬의 이 말 바꾸기를 놓고 자기들이 키우는 소의 꼴을 확보하기 위해 열을 올렸던 적이 있었다. 앞뒤 다 잘라 내버리고 자기들이 씹기 좋은 말 한마디만 가지고서 말이다. 이 또한 엇갈린 낫의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이것으로 엉뚱한 소설을 쓰려하다간 그 낫에 펜대 곱작거린 손가락이 잘릴지도 모른다.
풀을 뜯는 마소의 저 평화스런 풍경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저런 평화를 사랑하며 동경한다. 도를 넘어선 짓거리로 사람을 모으려 하지만, 엇갈린 낫으로는 절대 꼴을 베지 못하는 것과 같이 파란 하늘을 닮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곳에 모이지 않는다. 세상은 침묵하고 있는 듯해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혁명가님의 칼이 무디다며 끼리끼리 뭉쳐서 나가 더 날카로운 칼을 갈고자 했지만 욕심조절장애로 인해 엇갈아버린 날은 드디어 반란이 되고 말았다. 혁명가님의 칼은 무딘 것이 아니라 적당히 갈린 중용의 날이었다는 것을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혁명가님은 프로였지만 너희들은 아마였다.
마소의 꼴을 베는 사람들에게 노자님의 한 말씀이 잘 어울리는 듯하다. <오래久>를 알고자 한다면 이 말씀에 귀 기울여 보라.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自見者不明자견자불명, 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自伐者無功자벌자무공, 自矜者不長자긍자부장,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노자 도덕경 24장)
발끝으로 서는 자는 오래 설 수 없고, 가랑이를 벌리고 황새걸음으로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분명히 나타나지 않고, 스스로를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한 일들을 도의 견지에서는 먹다 남은 음식이나 혹과 같이 쓸데없는 것이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아마 모든 생물이 다 싫어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지닌 사람은 그러한 일을 하지 않느다.(번역 황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