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서학(西學): 조선 주자학의 연속과 단절
한형조(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
1. 주자학의 신학적 지평
유학자들은 대체로 서학(西學)을 이질적인 종교문화적 전통으로 바라본다. 이는 일찍이 유교와 서학의 역사적 조우가 박해와 순교의 비극으로 끝난 결과론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 근대 이후 서구화의 전면에서 기세를 얻은 기독교가 유교의 문화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오는 대치와 긴장이 가세했다.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몇몇 연구자들만이 유교와 서학 사이의 대화 가능성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
실제 그 둘을 접목하는 사상적 실험이 있었다. 처음에는 마테오 리치가 시작했고, 또 한편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경학(經學)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도해 본 것이었다. 다산이 서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정도는 정통 유학에서 인정하는 것보다는 크고,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보다는 적다. 그러나 달리 보면, 두 진영에서 다산을 끌어가려는 노력에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는 사실은 거꾸로 유학과 기독교 사이에 깊은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제 우리는 다산의 경학에서 어디까지가 유학이고, 어디까지가 서학인지를 확인하기 어려운 대목들에 자주 맞닥뜨린다. 그런 점에서 다산은 유학과 서학을 창조적으로 접목한 사상가라 해도 좋다. 이 사태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때 서학의 카운터파트로서의 유학은 어디까지나 공자와 맹자가 창도한 <오래된 유학>이었지, 조선 유학의 유구한 전통이었던 <새로운 유학>, 즉 주자학이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리치는 주자학의 형이상학 너머에서 오래된 유학의 신학과 손잡으려 했고, 다산은 자신의 경학에서 주자학의 이론체계를 철저히 밟으며 오래된 유학을 천양했다. 금장태, 김승혜, 마크 세튼 교수는 리치와 다산의 길을 따라 유교와 서학의 접점을 탐색하고 있다. 도날드 베이커 교수는 서학의 카운터파트로서 주자학의 자격을 심사해 보았지만, 결국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내려 놓았다.
그렇지만 나는 좀 달리 접근하고자 한다. 나는 주자의 형이상학이 갖고 있는 신학적 지평을 주목한다. 이 전통의 기반이 없었다면 서학은 18세기 일급의 주자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아울러 다산의 창조적 작업 또한 기약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산이 창도한 수사학(洙泗學), 즉 <오래된 유학>은 조선 유학의 전통에서는 <낯선>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산 이전, 성호(星湖) 문하의 한 계열에서 서학(西學) 친화의 붐이 일어날 때, 그것은 보유(補儒)의 이름이었지만, 그때의 <유(儒)> 또한 오래된 유학을 의미하기보다 당시에 지배적으로 유통되던 새로운 유학에 입각한 것이었다.
라이프니쯔는 선교사들의 보고를 통해 주자학을 <자연 신학>의 일종으로 파악했다. 그 성격을 본격적으로 연구해 보지는 않았다. 다음의 과제이다. 그 대비를 위해서도 주자학에 내재된 신학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
주자학을 합리주의라 규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주자가 말하는 이(理)를 탈신화적, 탈신학적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주자의 형이상학은 신학과 가까이 있다. 아니,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신학의 일종이다. 일찍이 컨포드는 그리이스의 철학이 이전 시대의 신화와 종교와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연속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주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자신 이(理)를 이 세상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타자로 관념하지 않도록 표현에 신경을 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이(理)를 순전히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종속시키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理)는 초월이면서 내재의 양면성을 갖지만, 인간이 있기 이전에 있었고 또 이후에도 영속할 절대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 유학의 영원한 주제는 바로 이 이(理)의 신학적 성격과 위상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인간에 관한 이해와 자기 개발(self-cultivation)에 관한 이론, 즉 인간관과 수양론이 달라졌다. 요컨대 퇴계와 율곡의 사단칠정론에서 남당과 외암의 인물성동이론, 서학을 둘러싼 논란과 다산 신학의 성립, 그리고 한말 간재와 노사 사이의 대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논란의 중심에 바로 이 이(理)의 <주재(主宰)>가 있다. 여기서 주기(主氣)와 주리(主理)가 갈라졌다. 나는 이런 생각까지 든다. 조선 후기 도입된 서학은 유학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주자학의 신학에 포섭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런 점에서 서학을 조선 주자학의 전개에 있어 한 계기, 혹은 발전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서학은 물론, 다산을 조선 유학의 유기적 흐름 안에 정당하게 정초시켜 줄 수 있다.
모든 사고는 역사적 공간의 맥락적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혁신도 이전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되어 형성될 수 없다. 조선 유학의 역사 또한 이에서 예외가 아니다. 나는 서학이 조선 주자학의 전통 밖에 있다고만 생각하지 않고, 이른바 실학 또한 주자학적 전통과 단절된 공간에서만 성립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전이는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 작업이 일단락될 때까지 모든 새로운 사고는 전통과의 <연속과 단절>의 양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이것은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실학을 오직 혁신과 진보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느라 이 연속의 한 축을 간과하거나 무시해 왔다. 나는 학위논문에서 다산을, 주자학의 전면적 비판자로서 그리고 새로운 학문의 제창자로서 읽었다.(한형조,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세계사, 1996) 그렇지만 그것은 사태의 일면일 뿐, 전모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에서 다산이 서학은 물론 주자학에 빚지고 있는 측면을 적극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