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돈까스' 김형욱과' 제갈조조' 이후락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 최고 실력자들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중앙정보부 부장을 역임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을까요? 그 당시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가 중앙정보부 부장이었음은 실세권력 자리로는 당연한 것이였는지도 모릅니다.
중앙정보부 부장 출신 중에 김형욱과 이후락 이라는 이름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간략하게나마 이 두 전직부장의 권력에 관한 내용을 전해볼까 합니다.
1. '남산 돈까스' 김형욱
1960년대 공포의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남산 돈까스'로 불긴 김형욱은 중앙정보부가 그 당시 정치공작사령부로 자리잡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인물입니다. 깅형욱은 김종필과 같은 육사 8기로 5.16 핵심인물 가운데 한명이었습니다. 원래는 JP계였지만 중정부장이 되면서 JP와 거리를 두게 됩니다. 3선 개헌 시기에는 노골적으로 김종필을 핍박하기도 합니다.
김형욱이 부장으로 재직하던 6년여 동안에는 대한민국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인혁당사건, 동백림사건, 통혁당사건, 민비련과 불꽃회/학사주점사건 같은 굵직한 공안사건들이 김형욱의 손에서 처리되었습니다. 김형욱은 6.3사태와 3선개헌 같은 정치적 사건에서도 돌격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는 야당/여당 국회의원을 상관하지 않고 중정 지하실에 잡아다가 족쳤습니다. 그는 덩치에 걸맞는 뚝심으로 3공화국의 정권안보 기반을 다졌습니다.
김형욱은 온갖 궃은 일을 다하고 충성을 바쳤으나 결국은 '팽'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갓끈 떨어진 신세가 된 김형욱은 그 배신감과 후임부장 이후락에게 위기감을 느끼고 73년 4월 미국으로 도망을 갑니다. 미국으로 도망친 김형욱은 79년 10월 파리에서 실종되는 그날까지 박정희 유신체제를 물어뜯고 쥐어 뜯었습니다. 이러한 결과에 의해 박정희 유신체제는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김형욱은 후에 박 정권 시대의 비사 <김형욱 회고록>을 남겼는데, 회고록은 그가 자연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을 수도 있습니다.
2. '제갈 조조' 이후락
박정희 시대 숱한 친위세력 가운데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제사가 있었다면 바로 이후락 입니다. 그는 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쳐 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제갈조조란 이름의 이후락으로 불렸습니다.
김형욱이 망명길을 떠나 타향에서 떠돌다가 제명에 죽지 못한 반면, 이후락은 숱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국내에서 장기간 살면서 생을 마감한 인물입니다. 이후락은 정보부장에서 해임된 뒤 그 시절의 영향력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교묘한 처세술로 자신의 재산도 지키고, 인맥과 혼맥도 튼튼히 맺어놓았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여론이 비등하자 1973년 12월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후락은 재빨리 중요 정보문서들을 챙겨 해외로 도망을 갑니다. 이후락은 해외에서 박정희와 사후보장문제를 두고 담판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안전을 보장받았는지 1974년 2월에 귀국을 합니다. 그리고 그 후 국내에서 2009년 죽을 때 까지 계속 살게 됩니다.
이후락은 1924년 울산에서 태어나서 1943년 울산농고를 마치고 만주에서 일본 육군 하사관 교육을 받았습니다. 해방 1년 뒤 46년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군인의 길로 들어선 이후락은 50년 6월 육참총장 정보보좌관이 되었고, 51년에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육본정보국 차장이 됩니다. JP를 부하로 거느린 것도 그때였습니다. 53년 만 29세의 나이로 준장을 달았고, 55년 워싱턴의 주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미국 사람들과의 안면도 넓혀 갑니다.
5.16 후 이후락은 체포, 구금 되었지만 두 달 후에 대한공론사 이사장에 기용됩니다. 이어 61년 12월 최고회의 공보실장, 63년 12월 대통령 비서실장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아 대통령 비서실장을 6년동안이나 하게 됩니다. 비서실장으로 있는 동안 김형욱. 박종규와 함께 권력 3인방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이후락이 대단했던 것은 거의 불사조처럼 살아남았다고 보면 됩니다. 이승만/장면/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한 번도 낙마하지 않고 권력의 핵심을 타고 앉았던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는 <남산의 부장들>이란 책에서 그를 "이승만, 장면, 박정희 3대 정권을 능공허도의 축지법으로 훨훨 넘나드는 타고난 '정보맨' HR"이라고 평가했겠습니까.
이후락은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70년 12월 주일대사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를 하게 됩니다. 선거를 앞둔 박정희에게는 아무래도 이후락의 지모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락의 중앙정보부는 최선을 다했고, 박정희는 3선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72년 5월 2일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후 충격적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됩니다. 이 시기가 이후락에게는 권력의 절정이었습니다. 이런 이후락에게도 위기가 찾아 옵니다. 73년 3월 이른 바 '윤필용 장군사건'이 터지면서 신임을 잃기 시작했고, 그해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는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경우, 이후락이 지시를 받아서 마지 못해서 했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했는지, 또는 암묵적 동의 아래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했는지는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거쳤지만 명확한 답을 알고 있는 이후락은 이천의 도평요에 숨어서 죽을 때 까지 끝까지 입을 다물었습니다. 중정부장 3년 동안 그가 누린 권력과 영화는 한편의 드라마 자체였습니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 밀알가입은 hmwiwon@gmail.com (개인신상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 군자금계좌 : 국민은행 474901-04-153920 성사재인(김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