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측은지심 등의 4심이 (인·의·예·지) 4덕의 단초라 하였다. 그러나 4 심은 모두 한 개의 영명한 심체心體[一箇靈明之體]에서 발현하는 것인데, 영명한 심체는 널리 만물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발현하는 것을 헤아려 보면 어찌 반드시 4심 뿐이겠는가. 맹자는 다만 그 중의 4개를 들 었을 따름이다. 혹 용勇이라든가 신信도 모두 그 일이 실행된 후에 그 이름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발현한 근원을 따져 보면 역시 이 심心(즉 영명한 심) 일 따름이다. 즉 ‘측은·수오·사양·시비지심’을 포함하는 도덕심 또한 모두가 명백히 ‘한개의 영명한 심체’에서 발현한다. 그리고 ‘한개의 영명한 심체’란 곧 ‘영지의 전체를 두고 일컫는 심’인 것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영명한 심체’란 것은 또 어떠한 속성을 지니는가.
식食·색色·안일安逸에 대한 욕심은 모두가 형기形氣(즉 육신)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지만, 교만하거나 오만하고 스스로를 존대하다고 여기는 죄악은 허령虛靈한 심체心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령한 심체는 악을 저지를 이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스스로 존대 하다고 여기는 자의 경우, 남이 그를 칭찬해주면 기뻐하고 헐뜯으면 노여워 한다. 그것(기뻐하고 노여워함)이 형기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은 혹 경의經義를 논하고 혹은 도리道理를 분석하면서 기를 세우고 성을 내어 서로 욕을 하고, 혹은 문장을 서로 시기하여 서로 해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몸을 망치고 화를 당하여도 돌아볼 줄을 모르는데, 그 마음이 형기의 무슨 이로움을 바라고 하는 짓은 아니다. 즉 인간은 일상적으로 ‘식·색·안일’과 같은 형이하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영명한 심체’ 자체에서 발하는 정신적 욕구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크나큰 악惡이라든가 거대한 사특邪慝함 또한 자기의 심心에서 일어난다” 인간의 영명한 심心은 세상 이치를 꿰뚫을 수 있 는 한도가 무한정이니만큼, 거기서 생겨난 욕구 또한 무한정한 악을 저지르는 데까지 치달을 수도 있게 마련이다.
살필 수 있듯이 인간의 심心은 결코 선과 악을 추구하는 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심체가 천부적으로 타고난 ‘영명한’(즉 靈知의)기능은 이 세상 만사 만물에 대응하는 무한정한 능력을 가진다. 그리 고 전통적으로는 흔히 심성心性의 발현을 두고서도 측은지심 등의 4심 을 말하지만, 실상은 4심 이외에도 수다한 경우가 있으니, 가령 “즐거움 이나 용기라든가 신의 역시 인간의 심에다 뿌리를 둔 것이다” 또 전통 적으로는 희喜·노怒 등의 7정情을 말하지만, “7정 이외에도 창피하거나 후회하고 원망하거나 한탄하고 강직하거나 해치고자 하고 삼가거나 태 만한 여러 가지 정情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7정 뿐일 것인가” 그리고 가령 희·노·애·락의 발현과는 관계 없이도 인간의 “심의 지각이나 사려思慮는 발현하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할 수도 있고 그 의의意義를 생각해낼 수도 있으며 온 천하 사물의 변화를 헤아리고 논할 수도 있다” 인간의 심心의 기능은 그 활동이 신묘하여 사물의 이치를 궁극적으로 추구할 수가 있다.
즉 일·월·성신星辰의 운행이라든가 천지天地·수화水火의 변화는 물론이요, 멀리는 만리 바깥의 일과 아득히는 천고千古 이전의 일도 이 심心을 통해서 그 궁극적인데 이르기까지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의 심은 급기야 경학 공부를 통해 성인聖 人의 뜻을 깨쳐내고, 그 깨친 원리를 응용하여 ‘왕정’을 실현하기 위한통치볍제를 마련하며, 다시 그 법제를 적용하여 현실을 개혁하고 왕정을 구현하는 일에도 무한정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게 마련이다.
인간 심체의 ‘영명성’에 관한 그와 같이 다양하고도 무한정한 가능성을 깨닫고 개척하였다는 사실이야말로 다산 실학의 독자적 진면목을드러내 주는 중차대한 사례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다산에 의하면, 그같은 심성을 지닌 인간은 물론이려니와 세상 만물 또한 모두 상제上帝 즉 천天의 ‘조화造化’에 따라 각기 생명을 부여받아 생겨난 존재이다. 그리고 천天이 부여한 ‘영명한 심’과 그 ‘자주권’을 부여받은 인간만이 만물을 향용享用하는 주인이다.
무릇 삶과 죽음이 있는 천하의 만물에는 다만 3등급이 있다. 초목은 생명 은 있지만 지각이 없다. 금수는 지각은 있지만 영명靈明이 없다. 인간의 ‘대체大體(즉 영명한 心)’로 말하자면, 생명을 가지고 태어남에 이미 지각이 있고다시 영명의 신묘한 운용이 있다. 그러므로 만물을 포괄하여 빠뜨리지 않고, 모든 이치를 추구하여 모두 깨칠 수 있으며, 덕德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이 여긴다. …… 우러러 하늘을 보면 일월日月 성신星辰이 삼연森然히저기 벌여져 있고 구부려 땅을 살펴보면 초목 금수가 정연히 여기에 있는데, 그 모두는 다 인간을 비추어주고 따뜻하게 해주며 길러주고 섬겨주는 것들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주인 노릇 하는 자는 인간이 아니고 누구인가. 천天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집으로 삼아 선을 행하도록 해두었 으며, 일월 성신 초목 조수는 이 집에 이바지가 되도록 해두었다.
여기 다산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켜 인간만을 이 세상의 주체적 존재인 것으로 인식한다. 무엇보다도 인간만이 이 세상 모든 이치를 추구하여 깨칠 수 있는 능력을 태어나면서 갖추고 있다. 그래서 만사 만물의 이치를 각기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고, 그 이치를 인간 자신에 유용하도록 활용할 수가 있다.그래서 초목, 금수와 같은 자연은 인간이 응당 향용享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된다. 이같은 인식은, 조선 후기 실학의 인간관이 다산에 이르러 획기적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역사와 문명을 포함하는 세계관 전반에 일대전기轉機가 일어나게 되었음을 전해준다. 그리고 그 전기적 변화의 요체는 곧 천天과 직통한다는 인간의 영명한 심心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천天으로부터 품부한 인간의 영명한 심心은 또한 천부적으로 다양한 욕구欲求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의 영명한 심체 안에는 본래 원욕願欲 한 가닥이 있다.이 욕심이 없다면 천하 만사를 다 성취할 수가 없다. 오직 이익에 밝은 자는 욕심이 이록利祿으로 치닫고, 오직 의義에 밝은 자는 욕심이 도의로 치닫는다. 욕구가 극진함에 이르러서는 양 쪽이 모두 살신성인하여도 후회가 없으니, 소위 탐부貪夫는 재물에 목숨을 걸고 열사烈士는 명성에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일종의 색다른 사람을 보았는데, 그 심心이 고요하고 욕구가 없어 능히 선을 할 수도 악을 할 수도 없고 능히 문사文詞도 산업産業도 할 수가 없으니, 곧 천지간에 하나의 버려진 물건이었던 것이다. 인간 이라면 욕구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추구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천天으로 부터 품부한 영명한 심에서 발하는 것이므로 정당하다. 정당한 것이므로 긍정되어야 한다. 이 욕구론은 곧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사萬事 만리萬理를 추구하는 원동력의 근저를 이룬다는 이론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성리학의 도덕 정향적定向的 인간관을 지양하고자 하는 이론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다산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보편적 욕심으로는 귀욕貴欲 과 부욕富欲이 있음을 말한다. 두 가지 욕심은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욕심일 터이지만, 그 이외로도 무한한 영명성을 가진 인간의 심체가 추구할 수 있는 욕구의 분야와 심도는 무한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자기의 편의를 위해 이 세상 만물을 향용하는 능력 또한 두루 갖추고 태어난 존재가 인간일진대, 그 ‘원욕’ 또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무한정으로 다양할 수 있기 마련이다.
가령 주지하듯, 다산은 성호星湖를 따라 물질문명에 관한 진보론적 소신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지려智慮를 미루어 운용하는 것 에도 한계가 있고, 교묘한 생각으로써 사리事理를 꿰뚫어내는 것에도 차례가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천 사람, 만 사람이 함께 의논한 것을 당해낼 수는 없고, 아무리 성인이라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그 아름다운 덕德을 모조리 갖추어낼 수는 없다.그러므로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 모여 살수록 그 기예技藝는 더욱 정해지고, 시대가 내려오면 올수록 그 기예는 더욱 공교해진다. …… 이용후생에 필요한 것과 백공百工 기예의 능력 같은 경우는 뒤에 개발된 것을 가서 배우지 않는다면 몽매하고 고루함을 깨뜨리고 편리한 혜택을 일으킬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 진보적 문명을 이룩해내기 위해서는 다수 인간의 사회적 협동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다산이 말하고 있음 또한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이용후생의 편리한 문명의 혜택을 극단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이 본래적으로 타고난, 사리事理를 추구하고자 하는 ‘원욕’이야말로 그 원동력이 된다. 더구나 다산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것은 모두가 인간이 그 일을 실행함으로써야 실현된다고 하는 확고한 소신을 편다. 곧 인간이 품부한 영명한 심心의 주체적 결단과 실행이야말로 모든 가치와 도덕을창출하는 원천이라고 하는 새로운 ‘행사’주의行事主義를 주창한다. 그것이 하필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만 국한하는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