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공부론에 있어서의 '덕성'의 문제
우리는 앞에서 다산이 그의 실천적 공부론을 성립하기 위해, 성리학의 공부론을 지나치게 불교의 선과 동일시함으로써 그 발전적 지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다산은 왜 이렇게 이론적으로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지나간 성리학의 공부론을 공격하고 그의 공부론을 전개하였을까? 이제 앞절의 논의를 이어 덕에 관한 그의 논의를 추적해 보자.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의 덕에 대한 재해석은 사단에 대한 성리학적 해석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산은 종래 성리학자들이 '단(端)'을 '단서(端緖)'로 읽던 것을 과감하게 '단초(端初)'로 읽어 내렸다. 이것은 덕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뀌어 놓을 일대 사건이었다. 장동우가 이미 잘 정리해 놓은 바와 같이, '단'을 '단서'로 읽는 것은 사단과 사덕을 본체와 현상으로 관계지으려는 것이다. 사단의 존재는 사단을 가능하게 하는 본체로서의 사덕이 심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해 있음을 증명해 주는 흔적이다. '단'을 '단초'로 읽는 것은 이와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사단은 실천의 근본이요, 시작이고 사덕은 실천의 결과로 형성된 덕목이 된다. 다산은 맹자의 글에 의지해 사단의 단(端)을 불이 처음 붙듯이 샘이 처음 흘러나가듯이 시작한다는 뜻이요, 사단의 마음이 발동함은 바로 사덕을 성취하기 위한 실행의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단시(端始)'로 쓴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다산의 단(端)에 대한 재해석은 물론 덕의 실천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다산은 '인의예지는 행사(行事)로 얻어진 이름이지 심에 있는 이치라고 할 수 없다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주장한다. 다산은 '성을 논하고 심을 논하는 것도 결국은 선을 밝히고 몸을 성실히 하여 장차 실천하려는 것이며, 맹자가 측은지심을 논한 것은 마음을 확충하여 인이 천하에 덮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인의예지 네 가지를 밀어 넣어 버리고는 성이니 심이니 체니 용이니 하고 있으니, 인의예지가 마음속에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본원을 끝까지 궁구한다고 하니,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어지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고 성리학의 관념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인이란 실천을 통해 비로소 획득되는 가치덕목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마음의 이치라고 파악하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이 평소 인을 심(心) 속의 이로 여길지언정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벗에게 돈독히 하고 백성에게 자애롭게 하는 등, 사람과 사람이 서로 상대하는 것을 따로 덕이라 하고, 인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 생각할 때 측은․박애 등이 마음속에 일어나지만, 실제로는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인을 행하는지 모른다고 비판한다.
다산은 또한 천성(天聖)이 서로 전한 도가 인이란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인에 대해 체득하는 것이 이처럼 불분명하므로, 바른 학문이 있을 수 없다 고 하여 인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서(恕)를 제시한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행하지 않으면 덕이 있을 수 없다는 다산의 주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다산은 성리학의 공부로는 성인을 성취할 수 없는 이유를 우선, 천을 이(理)라 하고, 인을 만물을 살리는 이라 하고, 중용의 용(庸)을 평상(平常)이라고 하는 세 가지 점으로 지적한다. 반면 성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신독으로 하여 귀신을 섬기고, 서(恕)에 힘써서 인을 구하며, 항구하여 중단됨이 없을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성리학에 대한 다산의 이러한 혹독한 비판을 통해 두 상이한 철학체계의 화해할 수 없는 맞부딪침을 읽어 볼 수 있다. 다산의 철학이 성리학의 공부론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그 존덕성(尊德性)의 공부가 지나치게 주정적인 색채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고요히 마음속의 천리를 체인하고자 하는 성리학의 공부법은 이제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절한 방법적 원리를 제고해 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공부법은 필연적으로 그의 경세론이나 치세론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성리학의 공부법을 비판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원래부터 덕(德)자에 대해서 분명한 인식이 없었기에 경전을 읽다가 덕이라는 글자에 마주칠 때마다 까마득하여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순후(淳厚)하고 혼박(渾朴)하여 청탁마저 분별하지 못한 사람을 덕이 있다 여기고, 또한 이 기상으로 천하를 다스리면 만물이 감화를 입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일에 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이 어찌 동떨어진 말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나날이 천하는 부패되고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라고 개탄하는 대목은 유심히 음미해야 할 부분이다. 그는 공부법이 잘못됨으로 인해 천하가 부패하게 되고 새로워질 수 없게 된 상황을 염려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가, 인간관계 중에서 '친친(親親)이 가장 크다.'하고 친친(親親)을 중시한 이유를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다산은 덕을 '효제(孝弟)'라고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효제자(孝弟慈)라고 하는 유학의 가장 실천적이며 원초적인 개념을 재해석해 줌으로써 조선사회 전체의 이데올로기적 안정을 구현해 보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덕(德)에 대한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설명을 지양하고, 현실세계를 구체적으로 바꾸고 개혁할 수 있는 실천윤리로 옮겨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전대 성리학적 공부론과의 불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즉 다산의 공부론은 성리학의 공부론이 본체론과의 결합을 통해 추구했던 다양한 철학적 논의들을 상당부분 유보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