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통치법제와 통치이념론2
다산은 현명한 왕자王者의 등극을 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같은 현명한 왕 뿐만 아니라 다시 ‘아래에 있는 신하로서 능히 분발하고 협찬하는 자가 있은 다음이라야’ 이에 새로운 개혁법제를 세울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 ‘분발하고 협찬하는’ 신하는 결코 다수가 나오기는 어렵다.
우공禹貢의 제도를 세우는 일은 곧 천지天地가 생기고 개벽됨을 이어받아 성왕聖王이 경륜을 세우고 기강을 베풂으로써 천지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는 큰 법제를 정립한 것이다. 이 때에는 반드시 순舜·우禹가 동일한 목표를 세우고 또한 직稷·설契·고요皐陶·익益 등이 한 자리에 모여앉아 서로 협찬하고 토의하여 전등田等과 부등賦等과 공액貢額과 공로貢路를 제정하였다. …… 천연天然으로 만들고 철鐵로 주성鑄成한 것처럼 튼튼하게 하여 이 금석金石같은 법전을 정립하게 되었다.
요·순·우는 바로 성왕聖王이요, 직·설·고요·익 등은 또 그 성왕에 버금가는 현신들이다. 곧 성왕과 그들을 보필할 현능한 대신大臣들이 왕정을 실현할 명백한 의도로 정성을 다해 논의하고 협찬함으로써야 만세토록 시행할 튼튼한 통치법제를 제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현실에서 그러한 ‘성왕과 현신’의 출현을 기대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자신이 오랫동안 구축한 경학 공부의 온축을 바탕으로 다산은 스스로, 홀로이 ‘왕정’을 실현할 새로운 개혁법제를 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禹와 직稷이 토지를 다스릴 적에 피부의 털이 닳아 없어지고 손발에 굳 은 살이 박혔다. 썰매를 타고 나막신을 끌며 산을 넘고 구렁을 건너 9년 동 안 밖에 있으면서 집 문앞을 3번 지나쳤으나 들어가보지 못하였다. 그런 후 에야 견畎·회澮를 파서 냇물에 이르게 하고, 냇물을 파서 사해四海에 이르게 함으로써 그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요堯임금 때를 당하여 현인과 성인이 대단히 많았으니 그 여러 신료의 뭇 집사執事와 좌우의 많은 올바른 사람들이 길을 나누어 사방으로 나아가 위와 같이 겨를 없어함을 분담할 자가 어찌 없었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천하를 하나로 관통할 큰 법제는 한 사람의 솜씨에서 나와야 한다. 한 사람의 솜씨에서 나와야만 그것이 이룩하는 일마다 균제均齊 방정方正하여 못[釘]을 끊고 쇠를 절단한 것처럼 어긋 나거나 기울어지는 병통이 없기 마련이다.
그와 같이 ‘천하를 하나로 관통할 큰 법제’를 세우는 역사적 사례를 다산은 따로 옛 경전의 연구를 통해서도 다시 확인해둔 바가 있다.
제명帝命이라 함은 무엇인가. 고인古人이 천天을 섬김에는 모두 정성으로 믿고 정성으로 두려워하였다. 후세의 왕위를 다투는 자들이 빙자하고 가탁하여 천天을 내세움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여기 경건한 마음으로 밝게 섬김으로써 상제上帝의 뜻을 헤아리고 능히 몸소 그 은한 훈계를 받들어 천명天命을 깨달아내는 이가 있으니, 제왕이 되려는 자는 이 사람을 얻지 못하면 감히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며, 조고祖考의 통서統緖를 이어받는자도 이 사람을 얻은 연후에야 능히 통치를 이룩하여 중흥을 도모할 수 있고, 혁명의 때를 만난 자도 이 사람을 얻은 연후에야 능히 천명天命을 받아창업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 탕湯은 이윤伊尹을 얻고서야 하夏나라를 대신하여 통치할 수 있었고, 문왕·무왕은 상보尙父를 얻고서야 상융商戎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지모智謀와 재술才術이 천하무적이어서가 아니요, 그 신명神明스런 충심衷心이 능히 천명을 헤아려 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세워서 스승으로 삼고 그의 말을 들어서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군대를 출동시켜 죄 있는 자를 정벌하되 감히 크게 드러내어 말하기를 '상제의 명으로 죽이는 것이니, 정벌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한다. 상제를 거짓으로 속여 빌미삼아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요, 상제의 밝은 명령을 들었기 때문이다.
진秦나라 이후로는 사악한 말들이 세상에 넘쳐나 바른 길이 막히게 되었다. 오방五方, 후토后土에 사당을 세워 사특한 귀신에게 아첨하고, 하고자하는 일이 있으면 맹렬하게 일어나 움켜잡고는 우러러 천명天命에 물어보지도 않으며, 강자가 약자를 삼키고 힘으로 굴복시키며 위엄으로 제압하니, 천天 또한 그대로 두고서 다스리지도 않는다. 안목이 이같은 데에 익숙 해져 있으니, 어떻게 옛날의 제명帝命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다산은 자신의 ‘신명스런 충심이 능히 천명을 헤아려 낼 수’도있는 경지로까지 깊어졌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일까. 실상 유배기의 다산은 그 오래고 고독한 경학 연구에서, “정한 탐구와 신묘한 깨달음을 통해 옛 성인의 본 뜻을 많이 깨쳐낼 수” 있었음 을 <자찬묘지명>에서 회상하고 있다. 그의 경학 연구는 암묵리에 ‘신명 神明의 도움’이 있었던 듯 한 것으로 자신이 확인한다.
처음에 내가 '역易'을 익히고 '예禮'를 탐구하여 모든 경서經書에까지 미쳐 갔는데, 한 가지를 깨달을 적마다 마치 신명神明의 묵묵한 깨우쳐 주심이 있는 듯하여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형님 약전若銓이 흑산 바다에 있으면서, 한 편이 이루어질 적마다 보시고는 말하기를, “네가이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너 스스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오호라, 도道가 천년 동안 없어져 갖가지로 가려졌는데, 네가 헤쳐내고 끌어내어 그가려진 것들을 환하게 풀어내었으니 어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하였다.
여기 ‘신명의 묵묵한 깨우쳐 줌’이란 내용의 실체는 무엇을 가리키는것일까. 자신의 공부가 넉넉히 깊고도 숙성하여 이미 스스로 깨우칠 경지에 이른 다음이라야 이에 비로소 일어날 수 있는, 직관으로 관통하는깨달음<覺得> 이외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가령 삼대 왕정의 기초였다는 정전제를 두고서 그는, 자신이 새로 고안한 제도야말로 ‘선왕先王의 본법本法’인 것임을 단언한다. '성인의 여러 경서經書를 보건대, 내가 참작해서 변통하고자 하는 것이 원래 선왕 의 본법이었다' 그러므로 '(정전제를) 경계經界하는 정사政事는 천지를 거듭 새로이 이룩하는<重刱> 큰일'이요, “지금 선왕先王의 대도大道를 좇아 만세토록 준행할 큰 경법經法을 세운다”라고 그는 확신하기에 이르 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