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통치법제와 통치이념론
김태영 | 경희대 명예교수
다산은 삼대가 지난 이후로 제정된 통치법제란 것은 모두가 ‘폐법弊法’의 누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삼대 때 우禹·탕湯·문文·무武가 나라를 이룩하여 표준을 세우고 예악禮樂을 제정하여 금석金石 같은 법전法典을 드리우니, 현능한 신하와 훌륭한 보필들이 뒷 임금에게 고하기를, “어기지 말고 잊지 말아서 모두 다 옛 법을 따라 하소서” 하였다. 그런데 후세에는 세상이 어지러운 때를 타서 우뚝 일어선 자가, 천명天命은 아직 정돈되지 않고 인심人心도 복속되지 않은상태에서 호강豪强한 자들의 원망을 살까 염려해서 드디어, 쇠란衰亂한 세상을 오래 거치면서 겹겹이 쌓여 벌써 곪아터질 종창腫瘡을 이루고 있는 폐법弊法들을 그대로 따라 법제로 쓰게 되었다.
조선왕국의 경우를 두고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의 법제란 것은 대개가 고려의 옛 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요,
세종때 이르러 다소 손익損益을 가하였으나, 한 번 임진왜란을 겪은 후로는
백가지 법도가 무너져 모든 일이 어지럽게 되었다.
군문軍門을 자꾸 증설하여 국가 재정이 탕진되고, 전제田制가 문란해져 부세賦稅의 징수가
편중되기에 이르렀다. …… 탐학한 풍습이 크게 일어나 생민이 초췌하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건대 터럭 한 끝에 이르기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 에 와서 (법제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다.
현실태를 규정하고 있는 소위 ‘조종의 법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위구감을 다산은 토로한다. 그 위난의조선왕국을 다시 치세治世로 돌이키고 ‘왕정’을 구현하고자 할 때,다산은 이제 어떠한 통치 원리와 법제를 준거삼고자 하였는가. 역시 오랜 경학 공부를 통해 그가 도달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삼가 살피건대, 폐법弊法과 학정虐政이 일어나게 된 것은 모두가 경전經傳의 뜻을 밝혀알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다. 그러므로 치국의 요체는 경전 의 뜻을 밝히는 일보다 먼저해야 할 것이 없다.
(삼대의) 전장典章 법도法度는 주周나라에 이르러 크게 정비되고 진선 진미해져 더하거나 덜어낼 것이 없게 되었다. 왕자王者가 새로 일어나는 경우 반 드시 일체 '주례周禮'를 준수하게 될 것이다.
그는 드디어, 옛 성인聖人들이 남긴 경전의 원리를 밝혀낸 기초 위에'주례'를 준거삼아 '경세유표'를 초안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다산은 '주례'의 법제들을 조선 후기의 현실에다 결코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었다. 역사적 현실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주례'를 준거삼기는 하지만 역사적 현실에 상응하는 새로운 통치법제를 독자적으로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새로운 통치법제는 어떻게 제정해야 하는 것인가.먼저 젊은 사환기에 제시한 「원목」이란 글에서, 백성의 일상의 편익을 위해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통치법제가 제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그가 제시한 바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정里正이 백성의 여망을 따라 법을 제정하여 당정黨正에게 올리고, 당정은 백성의 여망을 따라 법을 제정하여 주장州長에게 올리며, 주장은 국군國君에게 올리고 국군은 황왕皇王에게 올리니, 그러므로 법은 모두 백성에 게 편의한 것이었다.
‘백성의 여망을 따라’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논지는 실로 다산 실학이 함축하고 있는 이념의 한 극極을 표현하는 개념인 것으로 판단된다.실상 다산은 유배 후의 오랜 경학공부를 통해서 결과적으로는 위와는다른 통치법제 제정론을 말하기에 이르렀지만, 무릇 ‘백성의 여망을 따른’ 법제의 제정 이념은 그의 만년에까지도 끝까지 견지하는 한 가닥 소신이었던 것으로 살펴진다. 무엇보다도 “천리天理에 비추어보아도 합당하고 인간의 실정[人情]에다 시행해 보아도 화협和協하는 것을 일러 예 禮라고 한다”면서'주례'를 모범으로 하는 '방례邦禮'를 초안한 것이'경세유표'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거한다.
여기서 ‘천리’는 그가 ‘성인의 경전’에 대한 오랜 공부를 통해서 터득한바 세상천지를 관통한다는 ‘원리’요, ‘인정’이란 곧 현실의 ‘백성의 여망’ 이외의 다른 것이 결코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현실을 규정하는 ‘법제’란 것은 워낙 ‘폐법弊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산의 현실에서 소위‘조종의 법제’는 결코 변통할 수가 없는 것으로 구조화 해 있었다.
혹 하나라도 깨달은 견해가 있어 경장하기를 시험해보고자 하면, 원로대신으로서 침중沈重하여 덕德이 있는 듯한 자가 반드시 한 마디 말로써 천천히 억압하기를, “조종의 법제는 반드시 경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한다. 그러면 호강豪强하여 권세를 업고 사私만 알지 공公은 모르는 자가반드시 따라 되뇌이기를, “노야老爺의 태산泰山 교악喬嶽 같은 덕망이 국가를 진정할 만하다”라고 한다. 그러나 실상 향원鄕愿의 거짓 덕德이요, 선善 을 좋아하는 마음은 한 점도 없는 것이다.
여기 ‘원로 대신’과 그에 동조하는 ‘호강’한 자들이란 대체 어떠한 존재들인가. 주지하듯이 오랜 당쟁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영구 집권의 정치적 지반을 구축한 노론당 중심의 ‘벌열가’ 이외의 다른 자들이 아니라 함이 다산의 지론이다. 가령 “공경 재상의 자제는 반드시 공경 재상 이 된다”1라고 하는 성호星湖의 관찰에서 유추되는 바와 같이, ‘조종의법제’라는 것을 지켜 현실태를 길이 유지하는 행태야말로 그들 ‘벌열가의 사익私益에 직결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개혁적 통치법제의 제정과 그 실현은 결국 현재의 ‘조종의 법제’ 하에서는 결코 착수조차 해볼 수 없는 사안임이 명백히 드러난다.그러니 그것은 ‘법’의 운용을 통해서 아니라 결국 정치적 결단을 통해서야 그나마 착수해볼 수 있는 과제에 속한다. 그리고 그같은 정치적 결단을 기대해볼 수 있는 주체는 결국 왕권王權 이외의 다른 존재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같은 개혁법제의 제정에는 실로 수다한 반발이 일어날 것을 다산인들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는 단언한다. “한 임금의 법제는 만세토록 길이 힘입는 것인데, 한때의 조그마한 시끄러움을 견디지못하여 만세까지 끌어갈 큰 혼란을 청산해버리지 못한다면 성인聖人이세상을 경영하는 넓은 도량이 아니다.
비록 세입歲入이 감소되어 재정을맡은 관원이 근심하더라도 우려할 것이 아니며, 비록 세입이 증대함에 따라 소민小民들이 비방할지라도 돌아볼 일이 아니다. 한 왕의 법은 금 석金石같이 굳건히 획정하고 형척衡尺같이 공평해야 하는 것이다” ‘만세토록’ 운용할 왕정의 법제 제정에 착수하는 왕권은 그만큼 변혁주체로서의 확고한 소신과 결단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같은 사정은 다산 자신이 정전법의 제정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이미 예상해둔 바였다.
바야흐로 (정전제의) 공전公田을 창립할 때에는 온 나라가 소란해질 것이다. 우매한 백성들이란 사공事功의 성취된 결과는 함께 누릴 수 있지만, 당초부터 계획을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온 나라가 소란해질 것이다. 그러나 왕王의 한마음은 만 가지 교화의 근본이다. 진실로 위대한 결단이 확고하여 영조英祖께서 균역법을 세우던 일과 같이한다면 어찌 성공치 못하리라고 걱정할 것인가. 영조의 말씀에 “나라가 비록 망하더라도 균역은 하지않을 수 없다” 하셨다.
아아, 이는 왕자王者의 정대한 말이었다. 순舜이 말하기를 “능히 힘을 분발해서 왕의 일을 밝힐 자가 있거든 총재冢宰 자리에앉혀서 모든 일을 밝히고 온 백성을 사랑하도록 하라” 하였다. …… 아래에 있는 신하로서 능히 분발하고 협찬하는 자가 있은 다음이라야 공전의법을 세울 수가 있다. 그 규모와 절목이 모름지기 치하고 조리가 정연하 게 갖추어진 다음이라야 이에 시행하여도 폐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