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4편「중국」 29-서울에 입성한 다섯 마리 말(五馬進京)과 앞선 한 마리 말(一馬當先)
국공휴전이 무산되자 장제스는 막대한 전쟁 물자를 제공 받았고, 보다 확실한 근대식 훈련체계를 도입하면서 군인들을 더욱 조직적으로 강하게 단련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오쩌둥의 중국공산군은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 미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하면서 ‘반미노선’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전 중국 인민들 속으로 전파했다. 이때부터 마오는 미국을 ‘종이로 만든 늙은 호랑이’로 조롱하면서 미국과 관계에 선을 그어 버린 것이다.
이 시점에 마오쩌둥은 주더를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중국내 공산당에 가입하는 숫자는 엄청난 속도로 확대됐다. 이 기회를 틈타 마오쩌둥은 7월 7일에 옌안에서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연합정부’가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중국 공산당의 연합정부 수립과 타이완으로 쫓겨 가는 장제스
▲ 베이징에 입성하는 인민해방군
중국 공산당은 ‘연합정부’를 수립한 후 모든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1948년 8월 19일에 이르러 마오쩌둥은 만주에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동북인민정부가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그해 말에 중국공산당은 만주 전체를 장악했는데,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대륙 장악을 예고했다. 중국군의 남하작전이 훨씬 더 쉬워졌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중국국민당정부가 1949년 1월 19일에 무조건 정전을 제의했으나 거부당했다. 실제로 중공군은 1949년 1월 31일에 베이징을 점령했으며 3개월 뒤에 양쯔강을 넘어 1949년 4월 23일에 난징에 입성했다. 난징에 자리를 잡았던 장제스정부는 본토를 버린 채 타이완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와 이중적 통치방식
▲ 1949년 10월 텐안먼(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는 공화국 성립과 더불어 제 1대 주석자격을 얻었는데, 그의 나이 56세 때이다. 마오쩌둥은 통치방식으로 ‘인민민주전정人民民主專政’을 채택했다.
노동자, 농민, 소시민, 민족자본가 등은 ‘인민’에 속하며 이들 인민 사이에는 ‘동지적인 민주주의’가 실시된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주구, 지주, 관료자본가, 중국국민당 반동파 등은 ‘인민 아닌 자’에 속하며 이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독재정치’를 실시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 통치방식을 마오는 ‘인민민주전정’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주체세력은 중국공산당임을 다시 강조했다.
마오쩌둥이 동지와 적이라는 2개의 통치방식으로 분류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공산당은 1950년부터 적으로 규정한 ‘인민 아닌 자’에 대한 대대적인 청산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과거나 현대나 정권을 잡은 집단은 기본적으로 내부와 외부의 부패와의 전쟁을 진행하면서 선명성을 유지하려 힘쓴다. 마오 또한 예외는 아니었고, 그 방법으로 3반운동을 전개했다. 3반운동이란 3해害에 해당하는 관료주의, 직권을 남용하여 맡고 있는 직책을 더럽히는 오직汚職, 낭비 등이다. 5반운동이란, 5가지 독毒으로 뇌물수수, 탈세, 국가재산의 절도, 재료와 수공의 협잡, 국가경제정보의 절도와 유출을 척결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내부 정풍운동을 진행하는 동시에 경제 재건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중공공산당은 인민대중 앞에 나선다.
중소우호동맹과 남북한 6.25전쟁
중화인민공화국 대표 즉, 주석이 된 마오쩌둥에게는 우군이 필요했다. 그 방법은 소련의 스탈린과 외교를 통한 양자 간의 우호증진이었다. 혁명에 성공한 마오쩌둥은 그간 단 한 차례도 중국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49년 12월 하순부터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는 1950년 1월부터 스탈린과 외교협상을 통하여 1950년 2월 15일에 미국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얻어낼 수 있었다.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거둔 첫 번째 외교적 업적이었다.
한편, 1950년 6.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남북한 사이의 전쟁에는 유엔군이 개입해서 대한민국을 지원했다. 북한이 패전위기에 놓이자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하순에 펑더화이(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해 북한을 구원했다. 펑더화이는 이 공로로 1952년 7월에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승진했다.
마오가 북한을 도와 비록 구원에는 성공했으나, 파병은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고,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중국의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마오쩌둥은 한반도 통일을 방해한 원흉인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오는 1950년 10월 하순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티베트에도 중공군을 파견해 점령을 완료했다.
오마진경五馬進京과 일마당선一馬當先
▲ 위 왼쪽 시계방향으로 가오강(좌 측) 과 라오수스(우 측) 하단 덩샤오핑(좌 측)과 린뱌오 부부(우 측)
마오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공산당의 철저한 지도체제 아래 5권역으로 나누었다. 각 권역마다 중앙국中央局을 설치해 그 국을 통해 통치하고 있었다. 중앙동북국, 중앙화동국, 중앙중남국, 중앙서북국, 중앙서남국이 그것들이었다.
각 중앙국의 최고책임자는 중앙동북국의 제 1서기 가오강(고강;高崗), 중앙화동국의 제1서기 라오수스(요수석;饒漱石), 중앙중남국의 제1서기 린뱌오(임표;林彪), 중앙서북국의 제1서기 펑더화이(팽덕회;彭德懷), 중앙서남국의 제1서기 덩샤오핑(등소평;鄧小平)등 이었다. 이들은 각 권역에서 당정군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어서 그 권력의 ‘독재적 군주’나 마찬가지였다. 마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최초의 5개년경제계획을 1953년부터 개시하려고 결정하고 1952년 후반에 중앙인민정부의 직속기구로 국가계획위원회를 신설했다. 쉽게 말해, 이 위원회는 국가경제계획과 정부예산에 관한 최고의 행정기관이었다. 마오는 이 매우 중요하면서도 강력한 기구에 각 국의 수뇌급 인사들을 불러들였다. 중앙서남국의 제1서기 덩샤오핑을 제일 먼저 불러들였고 이어 중앙동북부의 제1서기 가오강, 중앙화동국의 제1서기 라오수스, 중앙중남국의 제2서기 덩즈후이(등자회;鄧子恢), 중앙서북국의 제2서기 시중쉰(습중훈; 習仲勳) 등을 불러들였다. 이 시중쉰이 중국공산당 총 서기인 시진핑의 아버지다
사람들은 이 때 ‘다섯 마리의 말이 서울에 진입했다(오마진경五馬進京)’고 말했다. 또한 그들 가운데 ‘ 한 마리가 앞서고 있다(일마당선一馬當先)라고 덧붙였다. 여기서 그 ’일마‘가 그 당시 47세였던 가오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