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는 주자학에서 천(天)을 이(理)로 인식하여 형이상학적 원리로 파악하는 의리적(義理的) 천관(天觀)을 거부하고 천(天)을 신(神)으로 인식하여 두려워하고 섬겨야할 대상으로 파악하는 신앙적(信仰的) 천관(天觀)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기(氣)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自有之物)이라 하고, 이(理)는 기대어 붙어있는 것(依附之品)이라 정의한다. 마테오 릿치도 사물의 범주(物之宗品)를 실체(自立者)와 속성(依賴者)의 두 가지로 구분하면서, 이(理) 역시 속성의 부류이니 스스로 자립할 수가 없다.(理亦依賴之類, 自不能立)고 하여 이(理)를 속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다산과 마테오 릿치에서 이(理)를 자립적 존재에 붙어있는 속성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이(理)를 근원적 본체로서 인정하는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근본전제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용>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는 구절에 대해 주자는 <중용혹문>(中庸或問)에서 자신이 못 보고 못 듣는 곳이라 하기도 하고 남이 못 보고 못 듣는 곳이라 하여 두 가지 해석을 하는데, 다산은 그 어느 쪽의 경우도 계신(戒愼)․공구(恐懼)하는 두려움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 거부한다. 여기서 다산은 <논어>(季氏)에서 소인(小人)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小人不知天命而不畏也)는 말을 근거로 삼아,부도(不睹)․불문(不聞)(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은 천명(天命)을 말하는 것이라 확인한다.
또한 그는 천지(天地)의 귀신이 환하게 늘어서 있으나 귀신이란 것은 형상도 소리도 없는 것이다.라 하고, 부도(不睹)․불문(不聞)이란 귀신(鬼神)이 내려와 살피는 것이다.라 해석한다. 곧 그는 부도(不睹)․불문(不聞)을 천(天)이 명령하는 자리로 보는 동시에 귀신이 내려와 살피는 자리라 하여, 인간이 천(天)-귀신 앞에 마주서서 두려워하는 신앙적 상황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중용(中庸)의 덕(德)은 신독(愼獨)이 아니면 이룰 수 없고, 신독(愼獨)의 공(功)은 귀신이 아니면 두려워함이 없으니, 귀신의 덕(德)은 우리 유교가 근본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중용>의 성립근거가 계신(戒愼)․공구(恐懼)를 통한 신독(愼獨)에 있으며, 신독(愼獨)은 귀신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음을 들어서, 귀신의 역할이 바로 유교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 강조한다. 그만큼 다산은 귀신을 두려워하는 신앙자세를 바로 유교가 성립할 수 있는 기반으로 확립하고 있는 것이다.
<중용>은 귀신 개념에 대해서도 당시 주자학에서는, 천(天)을 이(理)라 하고, 귀신을 공용(功用)이라거나 조화(造化)의 자취라거나 이기(二氣)의 양능(良能)이라 하여,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득하여 하나같이 지각이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어두운 방에서 마음을 속이기를 멋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으니, 평생토록 도(道)를 배우고도 요순(堯舜)의 경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모두 귀신에 대한 설명에 밝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라 하여, 천(天)․귀신관(鬼神觀)의 오류에 따라 도(道)를 배워도 성인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라 지적한다.
이에 대해 그는 옛 사람의 태도를 실심(實心)으로 하늘을 섬기고, 실심으로 신을 섬겨,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함에서나 한 생각이 싹터 나옴에서, 참되거나 거짓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날이 감시함이 여기에 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계신(戒愼)․공구(恐懼)하여 신독(愼獨)의 절실함이 진절(眞切)하고 독실(篤實)하여 천덕(天德)에 도달한다.라고 하여, 신앙적 자세를 실심(實心)의 사천학(事天學)으로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귀신의 덕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재계하여 정결하게 하고 성대하게 제복을 갖추고서 제사를 드리게 한다.(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는 제사를 다산은 상제(上帝)에게 드려지는 교제(郊祭)라 확인하고, 상제(上帝)의 체(體)가 형(形)이나 질(質)이 없어서 귀신과 덕(德)이 같으므로 귀신(鬼神)이라 하며, 감응하여 내려와 비쳐준다는 점에서 귀신이라 한다. 하여,상제와 귀신을 일치시키고 있다. 또한 명신(明神)에 제사하는 것도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라는 언급도 사천(事天)하는 방법으로서 명신(靈明한 神)에 제사하는 것을 제시한다.
다산은 <주역>이 지어진 이유를, 성인(聖人)이 하늘의 명을 청하여 그 뜻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언급하여, 역(易)을 하늘을 경외(敬畏)하고 천명(天命)을 받드는 신앙적 실천방법으로 해명하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주역>의 접근방법에서 복서(卜筮)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면서도, 복서를 통해 천명을 받는 방법은 철저히 하늘을 섬기는 경건한 신앙심을 전제로 한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 신앙적 경건성을 상실한 복서란 사특한 술법이라 본다.
그는 복서를 지금 세상에 다시 행하게 할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며, 자신이 임금의 뜻을 얻는다면 복서를 금지하게 할 것임을 밝히면서, 무릇 하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감히 복서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나는 지금 하늘을 섬긴다 하더라도 감히 복서(卜筮)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다.고 하여, 복서가 더 이상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밝혔다. 이처럼 다산은 <주역>이 본래 복서를 통해 천명을 받았지만, 그 자신의 시대에서 천명을 받는 방법은 복서가 아니라 도심(道心)을 통해 부여되는 것임을 중시한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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