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주자는 <대학>의 기본구조를 삼강령(三綱領)(明明德․新民․止於至善)과 팔조목(八條目)(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으로 분석하였지만, 다산은 태학의 조례(條例)는 강(綱)을 명덕(明德)이라 하고, 목(目)을 효(孝)․제(弟)․자(慈)라 할 뿐이다.라 하여, 일강(一綱)(明明德)과 삼목(三目)(孝․弟․慈)의 구조를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주자의 삼강령팔조목설(三綱領八條目說)을 일강삼목설(一綱三目說)로 대치시킴으로써 <대학> 해석의 일대 혁신을 수행한 것이며,
다산은 일강삼목(一綱三目)을 하늘이 이루고 땅이 정해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원래 큰 꿈이다. 라 언명하여, 자신의 <대학> 해석이 지닌 혁신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처럼 그는 주자의 경학체계에서 핵심을 이루는 <대학장구>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주자학에서 완전히 탈피하였던 것이다.
다산은 <논어고금주>에서도 고주(古註)로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와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와 형병(邢昺)의 <논어정의>(論語正義)를 취하고, 신주(新註)로 주자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취하며, 그 밖에도 청대의 고염무(顧炎武), 모기령(毛奇齡)과 일본 고학파(古學派)인 이등인재(伊藤仁齋), 적생조래(荻生徂徠), 태재춘대(太宰春臺)의 주석 등을 광범하게 인용하면서, 보완(補), 반박(駁), 질의(質疑), 인증(引證), 고이(考異) 등의 구성으로써 고증을 기반으로 하여 비판과 반박을 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해석이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맹자요의>(孟子要義)에서도 조기(趙岐), 정현(鄭玄, 손석(孫奭), 주자(朱子), 고염무(顧炎武), 모기령(毛奇齡) 등 여러 주석들을 검토하면서 논평하고 반박하여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다산의 <상서>연구는 금문(今文)․ 고문(古文)의 쟁점에 대한 고증학적 검토에 상당히 많은 힘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사서(史書)를 통해 <상서>의 전승 과정에는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이 나누어져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실을 해명하면서, <상서>를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곧 첫째 복벽금문(伏壁今文) : 진(秦)의 복생(伏生)이 벽(壁)에 숨겨두었다가 전한(前漢) 문제(文帝)때 전해준 <금문상서(今文尙書)> 29편은 진(晉)의 회제(懷帝) 영가(永嘉)(307-312)연간의 난리에 망실되었다.
둘째 공벽고문(孔壁古文) : 전한(前漢) 경제(景帝)때 노공왕(魯共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헐다가 벽 속에 감추어져 있던 고문(古文)경전들을 발견하였는데, 공안국(孔安國)이 이를 정리하여 무제(武帝)때 나라에 바친 <고문상서>(古文尙書) 46권(복생(伏生)의 <금문상서>(今文尙書) 29권과 증가된 16편 및 <위태서>(僞太誓) 1편)은 중도에 무너지고 관학에서도 폐지되었으나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 두림(杜林)이 전하고 가규(賈逵)․마융(馬融)․정현(鄭玄)이 주석을 붙여 세상에서 받들었으나 당(唐)나라 때 와서 없어졌다.
셋째 매색(梅賾)의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 혹은 <상서위공전>(尙書僞孔傳): 동진(東晉)때 매색(梅賾)이 공안국(孔安國)의 <고문상서>라 칭하면서 나라에 바쳤던 58편(孔安國의 <고문상서>와 같은 33편과 증가된 25편)은 동진(東晉) 원제(元帝)때 학관(學官)이 세워졌으며, 이를 원본으로 삼아 당 태종때 공영달(孔穎達)이 <상서정의>(尙<正義)를 저술하고, 남송때 채침(蔡沈)이 <서집전>(書集傳)을 저술하면서, 오늘날 통행하는 <상서>가 되었다. 그 밖에도 전한(前漢) 성제(成帝)때 장패(張覇)가 <상서>편을 위조하여 나라에 바쳤다가 바로 쫓겨난 사실도 들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공영달(孔穎達)과 채침(蔡沈)이 매색(梅賾)의 <고문상서>를 주석하면서도 그 위작(僞作)임을 밝혀내지 못하였음을 지적하고, 송대(宋代)에 오역(吳棫), 주자(朱子)와 원대(元代)의 오징(吳澄)이 매색(梅賾)의 <고문상서>에 의문을 제기하여 그 거짓됨을 분별하였던 사실을 중시하였다.
이와 달리 청대(淸代)의 모기령(毛奇齡)이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를 저술하여 주자(朱子)에 의한 의문제기로 <고문상서>가 억울하게 당하였다 하여 ‘성인의 경전을 지킨다(衛聖經)는 명분으로 주자의 견해를 비판하였는데, 다산은 <매씨서평>(梅氏書平)에서 모기령의 견해를 철저히 비판하였으며, 청대 송감(宋鑒)의 <상서고증>(尙書攷證)에서 제시된 견해가 <매씨서평>에서 밝힌 자신의 견해와 일치함을 확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