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극제도의 난법이 덕점제도와 사수제도인 것이 분명 해졌습니다.
초기신앙때는 이것이 좋은 제도인줄만 알고 따랐습니다.
머리가 커지고 성인이 되니, 이런 제도가 성장때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상극제도의 난법에서 상생제도의 진법으로 가는 회기점 즉,
뉴턴지점에 도달해있습니다. 단체발전의 변환기점에 서서 우리는,
난법은 나쁜것이고 진법만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 진법은 난법을
통해서 변화되어져 나오는 것임을 잘알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과의례라는 것을 사부는 깨달으셔야 합니다.
누구나 어린아이에서 청소년기를 거쳐서 어른이 되듯이,
상제님을 공부하는 도생들의 의식도 이제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과거의 것은 과감이 뜯어 고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언제나 어렸을때의 유치한 해석과 깊지못한 유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으면, 결코 단체는 발전하지 못하고 개개인의
의식도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난법의 제도중에는 세 번째로 도수주의입니다.
도수주의에 심취해 있다보면 어떤현상이 나타나냐면, 그것에 의지하게 됩니다.
맞지도 않은 도수풀이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냥 막연하게 살아 갑니다. 도수주의에는 종말주의와 한세트로
이루어져 있어서 여기에 빠지면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도수는 상제님께서도 성사재인의 주체주의로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모사재천은 내가 하고, 성사재인은 너희들이 하라”
상제님의 말씀을 잘 파악해보면, 상제님도 성사재인의 정신에서
직접 인간으로 와서 모사재천의 일을 하셨습니다.
천상에서 하셔도 될 것을 왜? 인간으로 와서 하셨을까요?
그것은 모사재천도 성사재인을 바탕으로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부가 얘기하는 것은 전부 도수주의에 입각해서 상제님의 모사재천
말씀을 대변하는 것인데, 천지공사를 도통군자도 알지 못하게 해놨다는
말씀을 잊어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모사재천을 알려고 거기에 목숨을 바쳐서 40년동안이나
도수풀이에 목을 메고 있는 형국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알려고
온갖책을 쌓아놓고 도수에 맞출려고 증산도의 진리, 이것이 개벽이다를
내놓았지만, 지금 머리가 커서 보니 혹세무민하는 내용들만 가득차 있는
난법교과서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증산도 신도들은 전부 사부의 정신을 본받으려 애쓴결과
전부 도수주의, 종말주의에 빠져서 우울증 환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난법교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무슨 우주변와원리책에 개벽날짜가
나와있다는등, 도전책을 읽지 않아서 모른다는등, 증산도를 난법교단으로
이끈 주역이 바로 사부입니다. 이것은 증산도가 아니라 증산도를 빙자한
사부의도 라는 것이 지금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을 보십시오. 전부 종말론에 맞추어져서 암울한
미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혹세무민하는 종합예언세트를 볼 수 있습니다.
정감록이니, 격암유록이니,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등 동서양의
모든 종말론 환자들의 책을 짜깁기 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이것이 개벽이다’
라는 책입니다. 지금 이 책은 전부 쓰레기통에 쑤셔 넣어야 할것입니다.
증산도의 진리도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하고 몇가지 참고 사항빼고는
폐기 해야 합니다. 도전책도 일부 수정이 되어야 합니다.
조작질한 흔적이 역력하며, 알지도 못하는 성구풀이들은 ‘개인적생각이다’ 라는
것을 각주에 써놓아야 할것입니다.
즉 잘못된 성구풀이가 바로 “내가 난법자요”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뺀 것이라야 올바른 도전이 될것입니다.
도수주의를 합리화 하려고 잘못된 개인의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겠지만 그것이 현실인 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사부가 모든것을 개벽으로 몰고갈때, 단 한 사람이라도 스스로의
주체성과 양심을 환기하고, 이것이 증산도진리의 전부라면 나는 개벽기
나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차라리 바깥세상으로 뛰어나가 대다수 개벽기에
죽어갈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다 그들과 함께 죽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 되짚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이 사부교육의 한계이며, 지금이라도 의식이 깨고자 하는 사람은
개벽과 마패따위에 집중된 신앙행태를 박차고 나와야 합니다.“ - 현포-
도수주의에 빠지면 항상 공허해집니다. 인생을 바로 살수가 없고,
주체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남탓만 하게 되고 항상 ‘어떻게 되겠지’
하는 운명론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살다보면 왜 사는지 회의감이
느껴지게 되고 우울증에 빠져서 자살의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상제님께서 쇄기를 박은 것이 바로 성사재인의 화두입니다.
이제 도수풀이로 시간을 보낸 도생들은 전부 깨어나서 성사재인의
현실직시를 해야할 시점에 와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한친구는 피카소 그림을 보고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림을 보니 정신병 환자다” 나는 그말을듣는 순간 ‘맞다’는 느낌이 오면서
저친구는 현실직시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걸레스님 중광의 걸레 벽화를 보면서, 아나운서가 “이 걸레로
벽화를 그렸는데 어떤 내용인가요?”하고묻자, 중광스님이 “음~ 예술이야”하니,
옆에 있던 아나운서가 “아! 그렇군요... 예술입니다.” 라고 응대를 하는 것을 보고
“미친 또라이네” 라고 했습니다. 그림이 아니라 먹칠이 흘러내린 것을 보고
예술이라고 하니 보통사람은 ‘저런것도 예술에 속하는구나’ 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이친구는 충분히 그런 대답이 나올법 했습니다.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도수주의적 사고와 또라이라고 보는 현실적 사고는
분명 대비가 됩니다. 나는 이제 사부의 책이 도수주의에 입각해서 쓴 책이라고
분명 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미래를 점쳐서 거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로 보는 성사재인의 주체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증산도는 종말론의 도수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사재인의 주체주의가 필요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도수에 대한 얘기를 한번 들어봅시다.
상제님 천지공사의 도수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개념과 도수의 개념은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상제님 신앙을 하면서 많은 것을 공부하지만, 도수와 시간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도수 돌아닿는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는 상제님 말씀을 보면, 언제라는 시간은 없습니다.
다시 해석해 보면 ‘상황이 될 때 새롭게 변하여 지리라’<span style="background: #ffffff; col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