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정약용의 궁방전宮房田의 세금을 걷는 수세收稅 개혁
궁방전宮房田 이란 일명 궁장토宮庄土, 사궁장토司宮庄土 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 왕실의 일부인 궁실과 왕실에서 분가한 왕자, 왕녀들에게 나누어주던 직전 職田이었는데 선조대에 이르러 유명무실하게 됐다. 다산은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통해 왕실재정, 특히 궁방전 운영과정 상의 다양한 문제점을 집어내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선안을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 먼저 살펴 볼 것 은 다산이 궁방전의 세금을 거두는 수세收稅 과정과 몇 차례 나누어서 지급하는 분급分給 방식을 어떻게 바라보았냐는 문제이다. 그는 궁방전을 有土免稅地・無土免稅地・營作宮屯田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세 가지 분류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經世遺表 卷8, 地官修制, 田制 11, “臣竊觀宮房免稅之田, 總有三樣. 或以原帳之田, 賜以幾結【卽有土免 稅】, 或以原田之稅, 賜以幾結【卽無土免稅】, 或開荒築堰, 永作宮田【卽所謂宮屯】.”(삼가 살피건대 궁방 면세 전지는 총 3가지가 있다. 혹 원장에 기록된 전지를 몇 결 하사한 것이 있고【즉 유토면세지】, 혹 원 전의 세를 몇 결 하사한 것이 있으며【즉 무토면세지】, 혹 황무지를 개간하고 둑을 쌓아서 영구히 궁전으 로 만든 것이 있다【이른바 궁둔】.) ; 연구자들마다 궁방전의 개념규정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용섭의 경우 민전절수지를 무토로 이해하였고, 박준성은 궁방이 17세기 절수제 폐 지 논의와 함께 절수지・매득지・민전면세지로 구성되었던 것이, 18세기에 들어와 유토와 무토로 구분된다 고 하였다. 이 중에 절수지와 매득지가 궁방이 소유권을 갖는 영작궁둔으로 유토이고, 민전면세지가 무토 가 된다고 보았다. 최근에는 조영준이 궁방전을 출세결과 면세결로 구분하 여, 면세결에서 다시 유토면세와 무토면세로 나뉜다고 하였다.
이 때 면세결은 수조권이 궁방에 귀속된 것 이며, 출세결은 궁방의 소유이지만 일반 민전과 다름없이 국가의 수세 대상이었다고 보았다. 이성임은 조영준의 의견에 찬성하며 궁방전이 유토와 무토로 구분되며, 유토 중 에 면세결과 출세결이 있다고 하였다.
이제 각각의 문제점과 자신이 생각 하는 조세 방식을 제시한 것에 관하여 알아보자.
㉮무릇 궁방의 전지 중에 절수한 것은 여러 읍의 조속으로 해마다 이획하고, ㉯스스로 설치한 것 은 정조에 묶어서 그 9분의 1을 수취하게 한다.
먼저 ㉮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는 다산의 면세전 구분에서 유토와 무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궁방전의 초기 수취방식이 절수였다는 점과 절수가 민전침탈의 도구로 이용되면서 비판의 대상이었음을 살펴보았다. 다산 역시 이전의 논의와 마찬가지로 절수가 폐지의 대상이었음을 공감하였는데, 이를 위해 각 궁방이 보유하고 있던 유토・무토 면세 전답에 대한 절수 권한을 폐지하고, 해마다 고을을 변경해가며 조속을 획급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산은 국가의 모든 전지를 정 전화하여 九一稅를 거두어 중앙으로 이동시켜서 분급하고자 하였는데 궁방전도 예외는 아니 었다. 특히 궁방의 절수를 폐지하고 절수로 인한 궁방의 수입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획급하 도록 하는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해마다 고을을 변경해가며 조속을 수취하도록 한 점이었 다. 이는 기존의 일정한 토지에 고정되어 민결의 면세를 허용하였던 유토면세지를 폐지하고, 그 대신 무토면세지의 수취 방식을 유토면세에도 적용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여 그 토지에서 고정적으로 면세의 조치를 받는 유토면세 방식에서 토지를 직 접 지급하지 않고, 해당 실결액을 지정하여 이를 호조에서 거두어 내수사 또는 해당 궁방에 획급하는 형태인 무토면세 방식으로 전환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한 문제는 다음 기사에 자세하게 나타난다.
궁방에서 절수하고 여러 관서에서 획급하는 것을 반드시 여러 현에 돌리고자 하는데, 나는 우리나라에 오늘날 이미 분봉하는 법이 없으니, 한 현의 전지를 반드시 하나의 궁에 영구히 속하게 할 것 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궁이 이러한데 하물며 관서이겠는가? 궁차가 나누어 나갈 때면 벗기고 빼앗으며, 횡포를 부리니 백성들이 받는 해를 입었다. 근년에는 모두 그 현에서 거두어 궁에 바치게 하니 그러한 걱정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와 같은 것은 반드시 돌려가며 획급할 것이 아니다. 혹 뿌리 가 깊이 박히고, 꼭지가 굳어져서 아직도 본궁에서 사람을 보내어 수렴하는 것과 관서에서 관리를 보내어 수렴하는 것은 급히 뿌리를 뽑음이 마땅하다. 돌려가며 획급해서 그곳의 농부에게 궁방 땅이 나 관청 땅으로 알지 않도록 하며, 궁인과 관청 사람에게 제 물건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면, 많고 적 은 폐막도 이에 씻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한 현의 땅을 오래도록 한 곳에 속하게 하여 함께 굳어지게 한다면 폐단이 여기에서 생겨날 것이니, 이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다산은 유토면세지가 일정 지역에 영구히 존속하였을 경우, 파견되는 궁차가 있다면 폐해가 심화될 것이며 이로 인해 각종 비리가 고착화될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토면세지를 당시 시행되고 있던 무토면세지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토면세지가 어떠한 이점이 있기에 전환을 주장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 답은 무토면세지의 특징을 통해 알 수 있다. 무토면세지는 호조에서 획급 받은 실결을 지칭하였다. 무토면세지의 특징은 궁방에 소유권 이 없으며 3년 혹은 10년마다 輪回・輪定 되고, 수세를 호조에서 직접 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특징 중에서 다산이 특별히 주목한 점은 면세지가 고정적이지 않고 윤회・윤정 된다는 점이었다. 무토면세지가 행정상 다수 번거로운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마다 고을을 옮겨 다니며 적용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무토 면세지가 고정되어 있다면 정액 외 과다한 징수와 같은 궁방의 자의적인 수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민결면세지는 실결 로 충당되므로 면세지가 일정 군・읍에 집중되어 있으면 해당 지방의 재정에 곤란을 초래하 게 된다. 또한 궁방의 입장에서도 농민층이 저항이나, 민결면세지로 설치 된 지역이 재해를 입을 시에 실결대로 면세액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무토면세지가 일정한 수입을 보장 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무토면세지의 이전은 민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궁방의 수탈 을 방지하고, 지방정부와 궁방은 재정의 안정화를 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때문에 다 산은 기존의 유토면세지의 수세 방법을 징세・납세 주체자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무토면세 지의 수세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시하였다.
다음은 ㉯부분에 대한 내용이다. 다산은 궁방전을 세 가지로 분류하며, 궁방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둑을 쌓아 개간한 토지를 영작궁둔전으로 보았는데 이는 궁방의 소유지로 생각된 다. 그리고 영작궁둔전은 앞서 다른 토지들과 마찬가지로 정전제를 적용하여 구일세를 걷는 토지로 삼도록 하였는데, 다산이 지향하였던 전국의 농지를 정전화 시키는 일에 궁방의 토지 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정전에서 수취하는 구일세는 궁방전이 면세지였으므로 면 세 대신에 궁방에서 수취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여기에 토지의 소유자가 궁방이었으므로 궁방은 작인에게 소작을 주고 地代도 수취하였을 것이다. 지대에 대한 부분 역시도 다산이 규정해 놓았다.
혹 황무지를 개간하고 둑을 쌓아서 영구히 궁토로 만드는 것도 한 하늘 아래에 있으니 유독 다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묶어서 정전을 한 후에 9분의 1을 수취하고, 사사도조는 10분의 5 로 한다. 전감【다음 편에 보임】에게 궁감을 겸하게 하여 공평하게 수렴하여 본궁의 조운을 기다리 게 하면 그 단속하는 데에 법이 있어서 간사한 폐단이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사람의 떳떳한 마음은 백성이 함께 얻은 바이다. 정조도 묶어서 공전을 높이고 8집을 예속시켜 의리로 책임지게 한 연후에 백성들이 명에 순종할 수 있고, 아전이 손을 거두게 할 수 있다.
위 기사를 보면 영작궁둔전 역시 같은 농지이므로 정전의 적용을 받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정전 후 생산량의 1/9에 해당되는 세액을 해당 궁방에서 걷는데 이는 민결 면세지의 방식을 적용한 것으로 국가에서 수취해야할 생산량의 1/9에 해당되는 양을 궁방에 면세의 특혜로 移屬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영작궁둔전의 경우 궁방 소유의 사유지였으므로 이에 해당되는 지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생산량의 5/10에 해당되는 양을 사사도조, 즉 궁방이 소작농에게 받는 지대를 규정해 놓은 것이다. 세액 규정뿐만 아니라 실 질적인 납세자에 해당하는 田監으로 하여금 宮監을 겸하게 하여 조세를 거두는데 있어서 다 른 권한이 개입하여 폐해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였다. 해당 경작자를 조세 수취의 담당자로 임명하는 전감제도는 다산이 문제 삼았던 궁방의 도장 파견에 따른 폐단을 사전에 방지하고 자 했던 것으로 여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