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덕을 '효제'라고 가장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덕의 실천에서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지극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다산은 그런 의미에서 인륜의 기초가 되는 효제를 곧 덕이라고 이름하였다. 그가 파악하기에 당시의 성리학자들은 덕을 형이상학적 실체로 가두어 둠으로써 그 실천력을 급격히 상실하고, 종국적으로는 사회적인 통합력도 잃어버린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산은 개인적인 차원의 선이나 극기의 윤리에서 한정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람사이의 관계를 맺어 주는 공동체의 윤리질서로 발전될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덕에 관한 다산의 이러한 실천적이고 실사적인 태도는 구체적인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성리학자들과 많은 편차를 드러낸다. 그 한 예를 우리는 <숙흥야매잠>을 둘러싼 다산과 퇴계와의 차이에서 엿볼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다산의 퇴계에 대한 존숭은 각별하다. 다산의 <도산사숙록>에는 퇴계의 학문과 인격에 대한 그의 존숭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퇴계의 글을 읽은 소회를, '그 깊은 뜻과 넓은 폭을 후생말류로서는 감히 엿보거나 헤아릴 수 없는데, 이상스럽게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각이 가라앉아 혈육과 근맥이 모두 안정되어 안도감이 들면서 예전의 조급하고 거칠고 발월(發越)하던 기운이 점점 사라지니, 이 한 부의 책이 저의 병증에 맞는 약이 아닌가 싶습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게 33장으로 구성된 <도산사숙록>은 다산의 퇴계에 극진한 존경과 흠모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사숙록의 행간에는 간혹 동일한 주제에 대해 다산특유의 실학적 해석이 깃들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퇴계는 <숙흥야매잠>을 철저히 성리학적 공부론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다산이 경우에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다산은 숙흥야매잠을 진백이 작성한 이유를 우리들이 날마다 하는 일에 정한(程限)을 정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찾고 있다. 다산이 숙흥야매잠을 이렇게 단순한 하루의 일정표나 시간표로 이해하는 것은, 퇴계가 이것을 그의 경론(敬論)의 가장 중심적인 해설서로 잡았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숙흥야매잠도>는 퇴계의 성학십도의 제 10도로서 그의 공부론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또한 이 숙흥야매잠의 해석을 둘러싸고 퇴계와 노소재는 치열한 이단 논쟁을 전개한 바 있다. 우선 퇴계가 왜 숙흥야매잠도를 만들었는지를 들어 보도록 하자.
이 잠에는 여러 가지 공부하는 시간적 상황이 (時分) 있으므로 그 시분(時分)에 따라 배열하여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대저 도가 일용(日用) 사이에 유행(流行)하여 간데 마다 있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이(理)가 없는 곳이란 한 군데도 없는 것이니 어느 곳에선들 공부를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잠깐 사이에도 정지할 수 없으므로 순식간도 이(理)가 없는 때가 없으니 어느 땐들 공부를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숙흥야매잠도>에 나타난 퇴계의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는 이 평범한 일상의 삶을 어떻게 하면 도의 세계와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이치를 배우는 하학의 세계가 필경 상달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의 구실을 한다는 믿음을 그는 <숙흥야매잠도>에 실어 두고 있다. 경이 그 고리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퇴계에 따르면 도는 일상생활에서 양양하게 흘러 넘치고 있다. 그 도와 이치는 동지어묵(動止語黙) 어떠한 순간에서 쉼 없이 흘러 넘치는 것이다. 일상 생활의 마디마디에서 그 도는 쉼 없이 유행하여, 일상이 파편화되고 분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퇴계는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유학적 공부론에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그는 성학십도에서 이 과정을 '처음에는 각각 한 가지 일마다 노력하였지만 언젠가는 '하나의 근원에서 만나게 될 것'(始者各專其一 今乃克恊于一)' 이라고 풀어서 설명하였다. 이 말은 일견 사소하고 미미하게 보이는 일상에 대한 공부가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에는 융회관통(融會貫通)하여 도의 세계에 다다르게 됨을 표현하고 있다. 퇴계가 숙흥야매잠을 주목한 것은, 일상에 깃들어 있는 개체적 원리(分殊之理)와, 그 개별적 원리의 근원적 모태인 통합적 원리(理一)를 여하히 일치시킬 수 있을 가를 모색하고자 함에 있었다.
또한 퇴계가 지닌 고민은 이 일상의 세계 전체가 결코 모두 도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가장 커다란 고민의 하나는 배움의 주무대인 일상의 세계가 곧 바로 지선(至善)의 세계, 진리의 세계가 될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퇴계가 임금에게 올린 차자를 보면 그는 일상의 세계와 도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어려움이 있는 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퇴계의 표현에 따르면, 처음 하학의 공부에서는 하고자 하는 노력과 일이 서로 분리되어, 타인의 간섭에 좌지우지되는 이른바 '철주'(掣肘)의 고통과 나와 세계가 분리되는 '모순'(矛盾)의 과정을 경험하고, 때때로 극도의 신고(辛苦)와 괴로움의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퇴계 공부론의 요체는 이(理)와 기(氣)의 차별성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에 있다. 퇴계가 바라보는 우리의 일상은 천지의 질서와 선험적 가치를 존중하고자 하는 순선(純善)의 이(理)적 요구와, 개인의 이해와 욕망 속에서 번뇌하는 기(氣)적 욕구사이에서 갈등하는 세계다. 오히려 일상의 세계는 기의 요소가 더욱 힘을 발휘하여 이의 밝은 빛이 잘 드러나지 않는 세계이다. 이러한 이(理)의 독존(獨尊)을 드러내는 공부가 곧 경(敬)이다. 현상의 세계에 결코 매몰되지 않는,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는 존재의 밝은 빛이 곧 이(理)이다. 퇴계에 따르면 이 이기 양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이(理)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첫 출발점이 된다. 그가 율곡에 대하여 학(學)과 도(道)의 세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은 이와 기를 혼동하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운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양자의 관계를 밝게 구별하는 것은, 형기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른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현실적 욕망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극도의 절제가 요구된다. 숙흥야매잠은 이러한 형기의 욕망을 절제하는 가장 좋은 수양서로서의 의미를 지니다.
이러한 성리학적 공부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다산이 숙흥야매잠을 날마다 하는 일에 정한(程限)을 정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다산이 숙흥야매잠을 이렇게 하루의 일정표나 시간표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퇴계가 <숙흥야매잠도>을 그의 경학(敬學)의 구도로 환치시켜 놓은 것을 완전히 해체하는 작업과 같다. 또한 다산은 진백이 이 잠을 통해 일상을 심성론적 차원으로 환원시킨 것을 '행사(行事)'의 무대로서의 일상으로 돌려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산이 이기론의 해체를 통하여 성리학의 본체론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면, 그는 '하학'과 '일용행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성리학적 공부론을 근본적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기론적 체계를 걷어 버린 다산의 이러한 '행사(行事)' 개념은 성리학자들로서는 매우 불안정하고, 자칫 주체로서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위험성을 발견하게 된다. 문산이 다산에 대하여 경계한 것도 바로 다산 사상이 지닌 이러한 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행사' 개념은 물(物)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칫 사물을 부리는 것(役物)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물의 부림을 받는(役於物) 관계로 진전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정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사려가 많고 편안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마음의 주체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음의 주체를 안정시켜야 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스스로 그쳐야 할 바에 그치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일에 구애되어 각각의 물에 있는 그 물의 고유한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물마다 물에는 고유한 법칙이 있어(物各付物) 그대로 따른다면 오히려 물을 부리는 일이 되지만, 그러나 물에 구애되면 물에 사역 당하게 되는 것이다. (맹자가 말했듯이) 물이 있다고 한다면 물에는 반드시 고유한 법칙이 있게 마련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들은 반드시 사물의 법칙에 따라 사리의 당연한 극(極)에 멈추어야 한다.
물론 위의 글에서 물각부물(物各付物)을 강조하는 것은 바깥의 외물을 부정하고, 마음이 안으로만 침잠하는 불교적 정적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즉 바깥 외물에도 그 나름의 고유한 존재법, 즉 분수지리(分殊之理)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것이 내 마음의 이(理)와 조응하도록 하는 것이 궁리를 통한 공부인 것이다. 물각부물(物各付物)은 '물이 와서 응하나(物來而應) 물의 고유한 법칙을 벗어나지 않고, 물이 감에 화(化)하나(物往而和) 결코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성리 공부론을 통해 보건대, 다산이 각각의 물 속에 있는 분수지리를 부정하고, 모든 물의 세계를 그 스스로의 실천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행사 철학은 종국적으로 물에 구애되어 물에 사역 당하는 또 다른 한 좌단이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