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미발 공부와 하학처의 문제
성리학의 미발설에 대한 다산의 공격은 혹독하다. 미발설은 기본적으로 불가의 명경지수설(明鏡止水說)에서 나온 것임을 주장한다. 미발설에 선(禪)의 기미가 있다는 주장이다. 주자의 미발설에 대한 다산의 이러한 공격은 조선조 성리학의 공부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맞닿아 있다. 퇴계의 경(敬)의 공부론도 성리학의 미발설 위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주자가 '성인의 마음이 미발인 때에는 수경(水鏡)의 체(體)이며, 발하여서는 수경(水鏡)의 용(用)이 된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제 살펴보니 명경지수설은 불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심체의 허명적멸이 마치 수경(水鏡)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아무런 사려도 없으며 계신공구의 공부도 하지 않은 채 조금치도 전혀 동요가 없는 후에야 이러한 경지의 형상이 있다는 것이다 …(중략)… 만약 한결같이 허명정적(虛明靜寂)으로 주장하여 한 생각이 겨우 싹트자 마자 선악을 묻지도 아니하고 이발(已發)에 영속시킨다면 이것은 수경의 본체가 아니고 좌선일 뿐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남송대의 공부론은 이 미발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으로부터 발전되었다. 마음의 본체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논변이었고, 이 논쟁의 중심에는 불교와의 차별성이 언제나 문제시되었다. 특히 이들 성리학자들은, 뒤에서 좀 더 자세하게 논의하겠으나, 미발시의 공부를 인정함으로써 선(禪)의 수행법과 그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끝내 성리학에서의 미발시의 공부와 좌선입정의 수행법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미발이란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았음을 의미할 뿐이지 심이 마침내 아무런 사려도 없게 되어 마치 선가(禪家)에서 입정한 것처럼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희로애락은 비록 발하지 않았더라도 계신공구 할 수도 있고 궁리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의를 생각하고 천하의 사변을 생각할 수도 있으니, 미발시에 공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하여 마치 성리학에서 미발시에 공부가 없다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의 이러한 평가는 미발 공부를 둘러싼 성리학의 그 치열한 논쟁을 사실상 사상하고, 일방적으로 불교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자의 중화신설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요구된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마음을 다스려 도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유자들의 열망은 남송대에 주자에 의해 공부론으로 완성된다. 본체론적인 공부론을 중시하던 도남학(道南學)과, 현상론적인 공부론을 강조하던 호상학(湖湘學)의 두 흐름을 주자는 이른바 그의 중화신설(中和新說)을 통하여 종합하였다. 도남학이 유가 도통론의 정립을 통해서 덕성의 배양을 강조하고, 현상세계 속에 숨어 있는 근원적 실체 즉 이일(理一)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흐름이라고 한다면, 호상학은 현실로서의 역사를 중시하고, 궁리(窮理) 공부를 통해 가치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얻고자 하는 흐름이다. 도남학이 심득(心得)을 강조한다면, 호상학은 보다 현실과 역사를 중시한다. 이렇게 심(心) 공부를 강조하는 입장과, 사(事) 공부를 중시하는 서로 상이한 공부론을 지닌 두 학파의 사상을 주자의 성리학은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통해 양시(楊時)로부터 시작된 도남학의 맥을 내려 받았다. 양시는 그의 사상을 특징짓는 이일분수론(理一分殊論)에서,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체용관계로 놓고 이일을 체로 분수를 용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공부론에서 용(用)으로서의 구체적인 현상이나 사실보다는, 체로서의 이일(理一)을 우선시 함을 의미한다. 일상의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분수(分殊)로서의 삶의 이치보다는, 묵좌증심(黙坐澄心)하여 미발시에 드러나는 이일(理一)의 세계를 체인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발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불교의 좌선입정의 세계와 그 수양법에 있어서 과연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주자가 이른바 중화구설과 중화신설을 구상할 시기에 가장 골몰했던 문제는 이 미발의 성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주자의 중화구설은 장남헌(張南軒)을 통해 받아들인 호상학(湖湘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호상학의 주장으로는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이발의 상태에 있고, 미발은 이발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본체로서의 성(性)인 것이다. 따라서 마음속에는 미발의 때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별도의 공부가 필요 없는 것이다. 이에 주자의 중화구설에서는 이 미발은 사실상 공부가 불가능한 암흑의 세계로 이해되었다. 아직 인간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순수 본연의 상태, 즉 성의 상태에서 공부란 가능하지도 않고, 또한 애써 필요하지도 않는 영역인 것이다.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란 언제나 이발의 상태에 있는 것이고, 오직 '이발에 근거해서 미발을 볼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주자는 미발시 공부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그는 '민연(泯然)하여 아무런 지각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는(미발의 상태에서는), 삿된 어두움이 첩첩이 꽉 막혀 있으니 텅비고 밝게 외물에 응하는 본체는 아닌 것입니다. 또한 은미하게 싹 트는 그 기미의 순간에서는 홀연 지각이 나타남으로 문득 이발의 상태가 됨으로 인해 寂然의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자는 묵좌하여 마음을 밝히는 공부보다는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과 독서궁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자의 견해는 중화신설에 이르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미발시에 공부가 필요 없다는 중화구설에서 커다란 결함을 발견한다. 그는 미발의 상태란 결코 캄캄하여 어두워 살필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성(性)을 미발의 상태로 인정하는 심통성정(心統性情)의 심성론에 의거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미발지시(未發之時)와 이발지시(已發之時)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호상학자들이 불교적인 경향에 빠져 미발에 대해 전적으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한다. 그는 '미발지전은 오로지 언제나 이처럼 깨어 있으니 어두워 살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두워 살 필 수 없다면 도리가 어떻게 거기에 존재하겠는가? 또한 어떻게 대본이 될 수 있겠는가? … 지각은 비록 동하지만 그 미동을 해치지 않으니, 희로애락과는 또한 구별되는 것이다.' 라고 하여 미발 상태가 결코 어두움이 아니고 지각(知覺)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임을 말한다. 주자는 '만약 견문이 아직 없는 상태를 미발처로 본다면 이는 다만 정신이 혼미한 사람일 뿐' 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