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심은 바른마음입니다. 종말론주의자는 정심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난법정신에서는 정심을 할수 없습니다. 나만 산다는 것은 올바른 마음이 아닙니다.
나만 도통한다는 욕심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난법시대에는 정심이 어려운 것이고,
새로운 진법의 시기가 도래해야 정심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상제님께서 설정해놓으신 난법의 시기를 막내리고 우리들의 손으로
진법을 열어 나가야 합니다. 진법은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입만 벌리고 있는다고 하늘에서 밥을 주지 않듯이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증산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심과 수신을 일찍부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살아보려고 주체적으로 일을 합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늦게 시작합니다만 늦은만큼 더 신중하게 획기적으로 변화되어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못한 것을 미리 해보았지만 후회 할필요는 없습니다.
늦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데 새롭게 출발할수 있는 계기가
진법으로 들어가면서 열렸습니다.
인생이 오십부터 다시출발해지는 이치를 50이 되어서야 느끼는 것입니다.
49년의 그름을 깨닫는다는 것이 누구나가 50년을 살아야 새로운 변화를
계획하고 설계할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동안 50년의 정신적 장애자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진법으로 정상인이 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혁명의 주체가 50년의 삶을 산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윤의 도수도 삶의 절대적 시간이 50이 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정심과 수신은 50으로부터 다시 시작이 됩니다. 앞으로 인생을 100세로 놓고 본다면
50세전은 생장의 과정이고 50세후로부터 성장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혁명을 원하는 자는 어떻게 되었건 50을 기준으로해서 하는 하늘의 이치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앞으로의 정심수신과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는 51세부터 치천하 50년 공부라고 생각됩니다.
물리적인 절대적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정심수신의 주체주의가 몸속에 자리잡아야
성공할수 있습니다.
부귀한 사람과 녹이 진진해져야 한다는 내용은 같은 내용인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릅니다.
부귀한 사람은 어려운 사람을 잘모릅니다. 난법시대에는 부귀한 사람들이 들어올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러나 진법시대에는 부귀한 사람도 들어 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귀한 사람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귀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진법시대에 할 수 있는 성사재인의 창조적,외교적이고 영웅적인 처세입니다.
정심과 수신의 시작은 창조적인 자세입니다. 태사부님께서 무에서 유로의 창조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모두는 창조의 전투적인 태세로 세상을 바라다 봐야 할것입니다.
우리세대의 준비와 우리후대에까지 물려줄 가치있는 자산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정신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의 상태에까지 부단하게 노력해서 세상의 어떤 조직보다고
강건하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어떠한 직업을 가졌더라도 30년정도가 지나면 득도의 수준이 된다고 봅니다.
우리 단체도 진법의 시작으로 30년정도만 달리면 치국할수 있는 경계에
다다르리라고 믿습니다.
수신의 종자 시스템만 잘갖추어 진다면 제가와 치국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봅니다. 수신한다는 것은 자신을 닦는다는 것과 내 자신을 다스린다는것과
자신의 능력을 고치는 것, 즉 능력을 높이는 것으로 살펴볼수 있습니다.
첫째,자신을 닦는다는 것은 창조적인 인간을 말씀하는 것이고,
무에서 유로의 혁명을 이야기 합니다.
둘째,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은 태모님 말씀의 오장육부 통제공부입니다.
즉 심법을 말씀하신 것과 건강을 말씀하신 것 두가지로 보여집니다.
셋째, 자신의 능력을 높이는 것은 부단한 노력이 따른다는 말씀입니다.
능력강화에 일신 우일신 해야 합니다.
증산도의 현재 조직은 생산력은 없고 오로지 소비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쥐어짜는 시스템은 누구나가 염증을 느끼게 되고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진법의 시스템은 생산력을 최상으로 하는 시스템으로 변모 해야합니다.
가장 상식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생산력을 터부시하고 무시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르게됩니다. 이때까지 증산도의 조직은 생산력을 무시해 왔습니다.
그래서 항상 힘든 신앙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수 없는 것입니다.
종말론의 극치가 이런 상식을 벗어나서 살게 합니다. 종말론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현재의 증산도 신앙인들은 하루빨리 꿈에서 깨어나야 할것입니다.
사부님은 상식이하의 짓을 아직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으로 신앙인들을 겁박하는 것은 북한의 김정은 못지 않습니다.
사부는 상제님이 아닙니다. 사부와 상제님을 동격화시킨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상제님의 진리가 아닙니다. 이상은 현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상제님 말씀도 대세를 잘살피라는 현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현실의 판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고, 경제적 집단으로 성장하지 않고서는
상제님일을 이룰 수 없기에 지금 도수주의의 객체적 사고방식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부가 얘기한 사오미가 진짜라는 것은, 그저 종말론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봐야 합니다. ‘사오미가 진짜여 한번믿어봐!’ 이런 얘기는
정말 하면 안되는 것중에 하나입니다. 혹세무민의 사기 행각입니다.
이런유치한 말장난에 동조하지도말고 또 믿어서도 안됩니다.
사부의 말에 의존하게 되고, 모든 것을 사부에게 촛점을 맞춰 살게되면
정말 힘든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메아리만 울리는 것입니다. 덕점제도 이것도 사기행각중에 하나입니다.
덕점의 공수표 난발은 이제 멈추어져야 합니다.
신도들을 전부 사기꾼으로 만드는 제도중에 하나입니다.
진정 올바른 사부라면 이런 거짓말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부는 매번 거짓말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하다가
결국 늑대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양치기 소년입니다.
상제님의 대행자는 따로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꾼들이 상제님의 대행자가 되는 것이고, 누구한사람의 특정인이 상제님을
대행한답시고 상제님과 동격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이비 일꾼일뿐입니다.
상제님의 후지공사를 잘 생각해 보면, 결코 상제님과 동격을 얘기하면 안됩니다.
이번 대구순방의 도훈에서 증언 얘길들어보면,
상제님의 제자, 아들손자들의 증언이 절대적 진리가될수 없습니다.
증언은 증언일뿐 그것은 상제님의 공사를 이해하는데에 참조가 될뿐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증언을 진리라고 떠들고 있는 것은 유치원생에 불과합니다.
더 이상 말장난에 속아서는 안되고 해서도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도수주의를 배격하고 현실주의 즉 성사재인의 주체주의로
다시 태어나서 모든 것을 현실의 바탕위에서 생각해보아야 하는것입니다.
수신의 현실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위대한 상제님의 일이 성사 될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수신의 첫 번째로 창조적인 인간, 무에서 유를 생산하는 일꾼으로
태어나야합니다.
현재까지 스스로가 난법의 기운을 거두고 진법으로 나아가는 인간으로 혁명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수신의 첫 번째 일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