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서학(西學): 조선 유학의 영원한 논제, 주재(主宰)2
이(理)는 그렇다면 공허한 사물이지 주재에 값하지 않으니, 이는 진정 이기(理氣)를 협잡(夾雜)한 논의(<창계집(滄溪集)>, 권25, 일록(日錄))라고 했다. 낙학(洛學)의 종장인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은 51세에 지은 <논퇴율양선생사단칠정변(論退栗兩先生四端七情辨)>에서, 주자가 비록 이(理)에 정의(情意)와 조작(造作)이 없다고 했으나 기실 그 필연(必然)과 능연(能然), 당연(當然)과 자연(自然)은<기(氣) 위에> 분명히 존재한다면서 율곡이 이(理)의 속성으로 필연(必然)과 당연(當然)만 귀속시키고,실질적 능연(能然)을 허여하지 않은 것을 대본처의 실수라고 지적했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이후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전개될 무렵, 율곡을 비판하고 주리(主理)를 천명한 사람들의 중심 논제는 이(理)에 유위(有爲)의 실질적 주재(主宰)를 허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졸수재 조성기(拙修齋 趙聖期, 1638-1687)는 율곡의 이무위, 기유위(理無爲 氣有爲)가 <거꾸로 된 논의>라고 비판했다. 만약에 이(理)가 작위(作爲)가 없고 그리하여 심(心)의 선악을 다만 기(氣)의 청탁(淸濁)에만 돌린다면, 이(理)는 선악에 구체적으로 관여할 수가 없게 되는 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쓸모 없는 물건이 되고 만다. 이를 어찌 만물(萬物), 만사(萬事)의 중심이며 주재(主宰)라 할 것인가.(退栗兩先生四端七情理氣說後辨, <졸수재집(拙修齋集)> 권11 잡저(雜著).) 창계 임영(滄溪 林泳, 1649-1696) 또한 졸수재를 따라, 만일 모든 것을 기(氣)의 소위(所爲)로 돌린다면, 이른바 이(理)란 만물(萬物) 소이연(所以然)의 총명(總名)일 뿐이니, 그 가운데서 선악(善惡)은 아무런 정향(定向)이 없게 된다.
노재 임상덕(老村 林象德, 1683-1719)은 소론계의 인물로 낙학에 속하지는 않지만, 주기(主氣)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 또한 만약 기화이이승(氣化而理乘)이라면, 이(理)字의 묘(妙)를 찾을 길 없다 면서 이를 대장간의 풀무에 빗대어 설명했다. 풀무는 쉴 새 없이 요동하지만, 그 기(機)는 결국 사람의 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기(氣)의 능연(能然) 또한 본연(本然)의 묘(妙)가 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묘(妙)가 타지 않았다면 천지(天地)는 무너지고 일월(日月)은 빛을 잃었을 것이다(論氣化理乘, 『老村集』 권4)라고 했다.
지금 살핀 몇몇 인물들에게서도 알 수 있듯, 조선 유학사는 율곡의 주기적(主氣的) 정돈 이후에도 그에 대한 주리(主理)의 반발과 회의를 주변 혹은 저류로 지니고 있었다. 18세기초에 격화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은 율곡학파의 주기적(主氣的) 정돈 내부에서 일어난 <이차적 갈등과 분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남당은 율곡의 형이상학에서 동거하고 있던 자연학과 신학 가운데 자연학 쪽으로 중심을 이동시켰고, 외암은 반대로 신학 쪽으로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남당은 기(氣)의 현실성에 주목했고, 외암은 이(理)의 초월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남당은 기(氣)에 의해 구체화되고 현상화되는 생명의 실질적 개성에 주목했다. 그는 기국(氣局)에서 본 생명의 양상을 이른바 <성(性)의 삼층설(三層說)>로 정돈하면서 이(理)의 위상과 권위를 추상적 보편으로 밀쳐 놓았다. 그의 이런 발상은 율곡의 주기를 자연론적이고 경험적으로 한 발짝 더 밀고 나간 것이다.
이에 대해 외암은 생명의 실질적 개성 너머의 이(理)의 원두(源頭)를 축으로 논의하고 있다. 그는 이(理)가 기(氣)에 의해 피동적으로 제약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흔적도 찾을 길 없지만 거기에 또한 만 가지 이치를 숲처럼 내포하고 있는 오묘한 존재, 그 초월적 이(理)는 사물과 생명의 본질로서 실질적으로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외암에게서 마음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이다. 그것은 천군(天君)으로서 기질(氣質)에 의해 제약되거나 침범되지 않는다. 남당이나 병계의 주장대로 선악이 기(氣)의 작위(作爲)에 오로지 맡겨져 있다면, ―즉 청기(淸氣)이면 선(善)할 수 있고 탁기(濁氣)이면 악(惡)일 수밖에 없다면 ― 진정한 주재, 도덕적 책임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이 세상 너머의 절대적 의지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보는 방식이다.거기서 세상의 거죽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절대적 의지를 이 땅에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이다.
요컨대 외암은 기(氣)의 차이와 제약을 무시하면서 이(理)의 절대적 주체성과 자기동일성을 천명했다.그것은 주리적(主理的) 입장을 퇴계보다 한발짝 더 밀고 나간 것이다. 인물성동이론으로 하여 조선 유학은 율곡과 퇴계가 형성하고 있던 이기(理氣)의 스펙트럼을 좌우로 더 크게 확장시킨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