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5편「중국」30- 마오쩌둥의 ‘덧’ 에 걸린 중국 소시민과 지식인들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5개년 경제계획을 위해 덩샤오핑(등소평)을 제일 먼저 불러들인 것을 시작으로 가오강(고강), 라오수스(요수석), 덩주후이(등자회), 시중쉰(습중훈)등 다섯 마리 말을 베이징으로 불러 들였다.
마오쩌둥이 서울로 5마리 말(오마진경五馬進京)을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마오쩌둥은 마음속에 이들을 처단할 복선을 깔고 있었다. 이들 5명은 각 권역에서 한 나라를 세우고도 남을만한 넓은 중국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웬만한 국가보다 더 큰 영토를 지니고 군주적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은 마오에게는 이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복선을 실천할 중요한 수단을 제공한 셈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마오가 생각할 때 이들을 그냥 두기에는 위험 부담이 있었고, 마침 이들을 불러들일 구실에는 중국 인민들을 위한 경제계획으로 베이징으로 불러들인다는 핑계거리가 있었다. 어렵지 않게 5명을 입성시킨 마오는 이제 이들을 차례차례 거세시켜 나갈 방법을 궁리하게 된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이 다섯 마리 말 중 제일 먼저 앞서 나갔던(일마당선一馬當先) 47세의 가오강 이었다. 마오가 그를 첫 번째 제물로 삼을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내기는 아주 손쉬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주라고 불리는 요충지에서 가오강이 권력의 수장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이 곳은 소련으로서도 동북지역에 위치해서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인지라 스탈린이 가오강에게 승용차를 선물로 주기도 하면서 그의 위상과 권력을 뒷받침해 준 곳 이기도하다.
마오쩌둥의 불행은 인간파괴로 부터 시작되었다.
마오는 사실 스탈린의 정책을 수행 하는 척 하면서 최소한 중국에 공산주의를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중국적화 된 공산주의’를 건설하려고 소련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정책을 호시탐탐시도하곤 했다. 적어도 이 부분은 마오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본다. 적어도 스탈린 체제에서의 소련은 유토피아적인 공산주의는 환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탈린 체제에서 무수한 인민들이 학살당하고, 굶주림에 죽어 나갔다. 누구보다 마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중국화 된 공산주의를 뿌리 내리기 위해서 잣대를 재고 있던 중이다.
▲ 스탈린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수 많은 인명이 희생된 카틴 숲 대 학살사건
그러나 마오는 ‘오직 인민을 위한 경제정책’ 만을 생각해야 했다. 그의 실패는 스탈린 정책을 배척하면서도 스탈린과 결국은 똑 같은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 실패의 중요한 이유다.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마오쩌둥은 그에게 ‘인민을 위한 충고’를 하는 가신들을 무수한 죄명을 걸어서 처형하고 단죄했다.
다섯 마리 말 중 스탈린의 관심을 받았고, 가장 위상이 앞섰던 가오강을 처단할 때 적어도 가오강은 그 당시 만주의 독립왕국의 ‘왕’이었기에 베이징으로 넙적 찍어서 불러 올린 것이다. 이러한 방법만이 만주라는 근거지에서 그를 떼어 놓을 수 있을 것이고 처단하기에 손쉬울 수 있다는 마오의 계략인 심모원려(深謀遠慮)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마오쩌둥의 이러한 복심은 1954년 가오강과 라오수스가 음모를 꾸며 중앙당 지도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죄명’을 붙여서 중국공산당이 두 사람을 체포해 혹독하게 고문한 후 죽여 없애 버리고 만다. 그리고 마오는 기존의 다섯 마리 말이 활동했던 ‘5개 권역국 체제’를 전부 폐지시키고 모든 중국 지역을 ‘공산당 중앙당’이 직접 운영하는 직할통치 체제로 전환 시킨다.
이 당시 마오쩌둥이 5개 권역을 유지 시키면서 통치술을 부렸다면 적어도 중국이 지금보다는 더욱 인민들이 골고루 균형 있게 잘살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현재의 중국은 빈부의 불평등이 자본주의보다 더 심각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오가 5 마리 말을 순차적으로 죽이고 투옥 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다. 마오의 끊임없는 욕심과 탐욕으로 인하여 중국 경제를 일으킨 덩샤오핑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도 분명히 존재한다. 마오가 적어도 인재를 등용하는데 있어서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덩샤오핑의 역사적 역할은 다른 분야로 전환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반우파운동(反右派運動)
1953년 3월에 소련은 스탈린이 죽으면서 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물론 이 영향은 중국 마오쩌둥까지 고스란히 영향을 받게 된다. 스탈린이 죽은 소련은 ‘1인 지도체제’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변화를 보이게 된다. 중국 공산당도 당연히 이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고, 아직은 힘이 미약한 중국으로서는 소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공산당은 자연스럽게 중국도 ‘1인지도 체제에서 집단지도체제’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들이 제시된다.
여기서 마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제 정신이 아니고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마오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또 다른 공작정치를 하기 위해서 모른 척, 적어도 분위기에 휩쓸리는 척 했다. 이러한 현상은 소련이 집단지도체제가 되면서 소위 ‘解氷“현상을 맞은 것이다. 중국에서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벌써 ’1인 독재‘ 보다 ’집단지도체제‘를 통한 독재의 이완현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양백운동은 결국 종파주의, 주관주의를 처단하는 피비린내 나는 정풍운동으로 탈바꿈한다.
마오는 딴전을 피다가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면서, 1955년에 한술 더 떠서 먼 훗날 자신의 속을 뒤집었던 모든 사람들을 거국적으로 숙청할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이다. 그 방법이 일종의 문학과 예술 및 학문 분야에서 일종의 자유화 정책인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의 양백운동(兩百運動)이었다. 이른바 쌍백운동으로 통하는 이 정책은 ‘온갖 꽃들이 피어나듯 사람들도 각기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운동을 의미한다. 즉, 모든 인민은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모든 분야에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전 인민의 자유화 정책’인 것이다.
마오의 훌륭한 머리는 5 마리 말에서 이제는 소시민과 민족자본가 출신의 옛 부르주아지지식인들에게까지 덧을 놓은 것이다. 마음껏 표현하게 한 후 이들을 넙적 찍어 올리려는 수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물론 이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서 마오는 아주 간단한 한 가지 구심점만 제공했다. ‘현대적 기술을 발동시키기 위해서 전 인민의 관심이 필요하다’라는 먹이를 슬쩍 던져 놓은 것이다. 마오쩌둥의 꿀 발린 떡에 순진한 소시민부터 지식인들은 전국적으로 걸려들게 되었다.
이 운동의 결과는 결국 공산당에 대한 반감부터. 감히 넘볼 수 없는 마오에 대한 반감까지 여과 없이 표출하게 됐다. 마오가 속으로 간절히 원했던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 시기를 넘기지 않고 곧 바로 억압하는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이 억압의 운동이 1957년 시작된 악명 높은 반우파운동(反右派運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