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정약용의 혁명론( 革命論)
정약용의 혁명론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많은 연구자들이 다양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들이 내리는 결과론적인 것은 해답이 아니라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홍이섭은「탕론」이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이라고 한 바 있지만, 민권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윤 사순은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과 같은 어느 정도의 ‘민주적 민권의식’”이라고 하여 역성혁명을 민권과 연계시켰으며, 최익한도 “역성혁명의 사실을 빌어 민권사상을 입증”한 것 이라 하다. 그러나 역성혁명만으로는 민권 이론이 설 자리가 없다. 역사상 부분의 혁명은 역성혁명이었다. 민권 이론의 근거가 되기 위해서는 민중에 의한 혁명론이어야 한다.
조광은 “(다산이) 단순한 지배자의 변동만이 아닌 사회구조 전반에 걸쳐 새로운 변혁을 기도하는 신화(神話)를 제시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혁명관을 밝히고 민중저항권을 요구했다.” 고 하면서 다산의 민중혁명론을 주장했다. 그는 저항권을 혁명권과 동일시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다산이 민중의 혁명적 사회분위기 언급, 간접적인 혁명의 고취 등 단계를 거쳐 민중저항권을 주장했다고 보았다.
그가 근거로 드는 다산의 저술은 <감사론監司論>, <민보의民堡議>, <비어고備禦考> 외에 <장기농가長鬐農歌>․<이노행貍奴行>등의 시작품(詩作品), 경서의 주석 등 실로 광범하다. 이 근거들의 내용은 거개가 다산이 관(官) 부패와 약탈에의해 분노하고 민중의 고통을 동정하면서 애긍(哀矜)한 마음을 서술한 것들이다. 그는 심지어 <민보의民堡議>․<비어고備禦考> 등이 민중에 중점을 둔 ‘국방강화론’으로서 지배층에 대적할 준비가 있다고 보는 등,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다산의 상황인식을 근거로 저항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산이 관리들의 부패와 학정(虐政)에 분개하고 농민들을 두둔한 것은 인민의 저항을 용인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치체제를 왕조에서 ‘민국民國’으로 바꾸는 혁명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또 그는 다산 의 <맹자요의孟子要義>를 인용하여 “정약용은 왕정에 대해 이와 같이 준엄한 기준을 제시하다. 이러한 기준을 당시의 상황과 결부하여 생각하면 민중을 대하는 최종책임자로 군주를 지적하여 그를 바로 살인자로 모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해석한다.
“나는 생각건데 살인자라는 것은 무기나 형장(刑杖)으로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왕정을 행하지 않아서 풍년에 검약할 줄 모르고 흉년에 곡식을 베풀 줄 모르면 살인을 좋아하는 자이다. 정전법을 시행하지 않고 우러러 부모를 잘 섬기지 않으며 구부려 처자를 잘 기르지 않는다면 살인을 좋아하는 자이다. 50된 자가 비단을 입을 수 없고 70된 자가 고기를 먹지 못하여 얼어 죽고 굶어죽는다면 살인을 좋아하는 자이다. ”
이 인용문은 <맹자孟子>의 “(惠王)曰 天下惡乎定? 吾對曰定于一. 孰能一之? 對曰不嗜殺人者 能一之.”에 한 주석이다.
다산은 맹자의 ‘살인’에 대해 왕도정치를 시행하지 않으면 살인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것을 다른 여러 가지 ‘민중의 고통’ 사례와 연결시켜서 곧바로 다산이 군주를 살인자로 몰았다고 보고 혁명론의 근거로 삼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아닐까.
양이 호랑이를 잡아 죽이지 않고 새싹이 잡초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양이나 새싹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겠는가?
오늘날 급무로는 농부의 수를 많게 하는 것밖에 없다. 농민의 숫자가 많으면 탐욕스럽고 교활한 관리가 농민을 침해하는 것을 농민들이 지혜를 모아 금단할 수 있을 것이다. 조광은 다산의 위 두 말을 근거로 분명히 민중저항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앞의 인용문은 탐관오리의 불법 자행이 극심하므로 양 떼 같고 새싹 같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호랑이 같고 잡초 같은 아전들을 나라에서 처단해야 한 다는 의미이다.
또 뒤의 말은 오래묵혀 거칠어진 밭인 진전(陳田)에서 생산은 없는데 세(稅)를 물리는 제도에 대해, 당장은 농민의 수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농민의 수를 많게 하려면 교활한 관리인 탐관활리(貪官猾吏)를 나라에서 금단해 줘야 하고, 그러려면 정전(井田)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역시 전후의 취지를 생략하고 字句 만으로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다산의 ‘혁명’은 민중을 주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산은 革命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다산은 “은주혁명殷周革命”, “탕무혁명湯武革命”, “주무왕혁명지초周武王革命之初” 등 탕무(湯武)의 방벌을 ‘혁명’이라 일컬었다. 즉 선위(禪位)와 반대로 무력으로 君을 치고 새로 서는[立] 것을 혁명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얼핏 「탕론」의 교체에서 “(長) 과 뜻이 맞지 않으면......의논해서......교체[不協.....議之.....改]”하는 것과 湯武의 무력 방벌과는 모순처럼 보인다.
「탕론」은 신하인 탕무가 군주를 친 일을 변호하는 글이라는 점에 주목 하면 답을 얻을 수 있다. ‘의논[議之]’한다고 한 것은 자연상태의 민이 행했던 교체의 방법으로, 무슨 선거가 아니라 모여서 의논한다는 ‘회의(會議)’의 의미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던 「일주서극은편변逸周書克殷篇辨」의 ‘會議’ 그로이며, 탕무 같은 지도자가 포악한 군주를 칠 때 백성들 이 뜻을 모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湯이) 남쪽을 치면 북방오랭캐인 북적(北狄)이 원망하고 동쪽을 치면 서쪽 변방 이민족인 서이(西夷)가 원망하면서 ‘왜 나를 나중에 하는가?’[南面而征, 北狄怨, 東面而征, 西夷 怨, 曰奚爲後我]” 했다거나, 무왕이 주(紂)를 칠 때 “(殷紂의) 앞줄 병사들이 창을 거꾸로 잡고 뒤를 공격하여 패배시킨[前徒倒戈 攻于後以北]” 경우와 같다. 그래서 앞 단락에서 말한데로, “걸주(桀紂)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니, 백성을 잃었다는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이다. 천하를 얻음에 길이 있으니, 백성을 얻으면 이에 천하를 얻을 것”이라는 맹자의 뜻과도 통한다.
다산은 분명히 탕무의 혁명을 지지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탕무를 민중의 혁명이라고 볼 수 없듯이 민중혁명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한편 탕무처럼 무력으로 군위(君位)를 빼앗는 혁명은 다산이 요순의 선양을 군 교체의 이상으로 삼은 것과도 배치되는 문제가 있다.
다산이 심지어 양위했더라도 ‘혁명(革命)’이란 말을 쓴 경우가 있다.
박씨(朴氏)의 세에 5묘(五廟)를 세웠던가? 그러면 석씨(昔氏)의 세에 와서 이를 어떻게 했을까? 이를 부수어 버렸을까? 그렇다면 박씨는 벌써 혁명(革命)을 당한 셈이다.
신라(新羅) 초의 군권 이양에 한 말이다. 우리는 대개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석탈해(昔脫解)에게 무력을 쓰지 않고 선위(禪位)했기 때문에 “그 일이 百代의 제왕 가운데 월등히 뛰어났다[其事度越百王].”고 칭찬한다. 하지만, 다산은 그들이 ‘오랑캐의 비루함[夷狄之陋]’이라고 폄하한다. 왜인가? 다산은 본래 요순처럼 현자(賢者)로의 양위를 높이 평가하다. 그러나 현자양위는 요(堯)가 순(舜)에게, 舜 이 우(禹)에게 양위한 딱 두 번의 경우뿐이라서 더 이상 논할 것이 없었다.
이제는 한 성(姓)이 이어져서 부자간에 물려주는 것이 ‘천경지의(天經地義)’가 되었다. 즉 堯-舜-禹의 현자양위(賢者讓位) 같은 것은 없어졌고, 부자간의 세습이 “천리의 자연법칙에 따라 인도(人道)의 상이(常彝)를 확립한 것이니 만세의 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朴-昔-金은 현자양위도 않고 부자세습도 않았으므로 ‘이적지루夷狄之陋’라는 것이며, 만일 五廟를 부수었다면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 다산은 요순 같은 선위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후 부자세습이 법도가 되었으며, 군주가 잘못했을 때는 탕무처럼 혁명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어떻게 보더라도 다산이 민중혁명을 인정했다는 근거는 없다. 이 점에서는 김태의 견해가 고려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