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3편「중국」 28- 미국 vs 마오쩌둥 vs 장제스의 3자 두뇌싸움의 결과
왕징웨이의 무덤을 폭파한 장제스
▲ 1926년 불벌당시 왕징웨이(좌측)와 장제스(우측)
1946년 5월 5일에 중국국민당 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하게 된다. 난징으로 환도한 중국국민당 정부가 맨 처음 한 일은 왕징웨이 묘를 폭파한 것이다. 왕징웨이의 묘를 폭파한 것은 그의 과거 전력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도전하고 대적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행동은 거기서 머물지 않았고 일제가 중국을 침략할 때 중국인의 희생을 막겠다는 취지에서 중일평화협상을 추진했었다.
▲1943년 일본군 부대를 시찰하는 왕징웨이, 그는 군복 입기를 즐겨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1940년 3월 난징에서 일제의 괴뢰정권을 세우고 그 정권의 수반이 됐다. 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을사5적이 국권을 찬탈하고 실체적인 권력을 움켜쥔 실무적 수반이 된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는 매국노라는 지탄을 받으면서 동시에 골수암에 걸려 일본으로 건너가 나고야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1944년 11월에 그 병원에서 61세로 죽게 된다. 일본 정부는 그의 유해를 항공편으로 난징에 옮겼고 그곳에 묘를 마련했다. 더불어 중국인들에 의해 묘가 훼손당하지 않도록 묘를 콘크리트로 둘러쌌다. 그러나 중국국민당 정부가 난징으로 귀환하면서 왕징웨이의 묘에 폭탄을 설치해 폭파한 후 그의 유해를 끄집어내서 강물에 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역사적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오가 장제스에게 일본침략에 공동대응해서 일본을 대륙에서 쫓아내자고 몇 번 제의를 했어도, 장제스는 일본 침략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직 마오쩌둥을 궤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오의 세력이 장제스가 훼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고, 더불어 미국의 중재로 국공휴전까지 성립된 마당에 장제스는 그 분풀이를 난징 환도후에 왕징웨이의 묘를 파내고 폭파시켜 시신을 강물에 던지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제스는 어떠한 목적으로 무덤을 훼손 했을까
장제스 스스로가 일본제국주의에 협조한 왕징웨이 같은 친일적 행위를 한 무뢰한을 무덤까지 폭파시키고 그 시신을 훼손 했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미지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마오쩌둥이 일본 침략을 공동대처해서 중국 땅에서 몰아내자고 제안을 했지만 그의 생각 속에는 늘 마오를 처단하는 궁리만을 일삼아 왔던 것이다.
국공휴전 성립 후 국민당 정부가 난징으로 환도하면서 왕징웨이 무덤을 폭파한 것은 마오가 가진 일본침략에 대한 생각을 엄격한 의미로 이용한 것이다. 중국인민들은 처음 일본의 잔인성에 공포감만을 가지고 움츠려 들기에 바빴지만 결국 일본의 잔혹함은 전 중국 인민들에게 활화산 같은 분노를 표출해냈고 전 대륙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을 제공한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결국, 장제스의 속마음은 오직 마오쩌둥의 타도와 궤멸이 변하지 않는 일순위의 목표였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의 인민들의 정신이 일본침략에 관한 분노로 노도와 같이 들끓자 마오쩌둥을 의식하면서 ‘상황반전’을 시키기 위한 연출로 왕징웨이 묘를 폭파한 것이다.
정권을 잡으려는 자들의 속성은 민중들에게 관심이 멀어지면 불안감과 초조감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민중을 위한 진정한 혁명과 혁명을 빙자하면서 정권만을 노략질 하려는 자는 생각부터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상과 철학의 차이는 결국 장제스가 마오쩌둥에게 패배당하고 조그만 섬으로 쫓겨난 하나의 단초가 된 것이다. 조직화되고 잘 훈련된 군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의 군대와, 그에 비하면 괭이와 낫을 든 농민군 정도의 구식무기로 싸움을 한 마오쩌둥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사상과 철학의 차이에서 오는 정신의 문제였다.
국공휴전이 깨진 이후 장제스를 돕는 미국
1946년 1월 10일 성립된 국공휴전은 약 6개월 뒤인 1946년 7월에 장제스가 본색을 드러내면서 휴전이 깨지고 재차 교전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장제스가 국공휴전을 깨트린 속마음은 이미 해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이 마오- 장제스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를 권고했고, 그 결과 국공휴전을 성립시킨 것은 양 세력이 일단 연합을 해서 일본제국주의를 처단해 준다면 미국으로서는 자국 군인의 희생을 막을 수 있고, 최소한의 전쟁물자만 제공하면 된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의 의도대로 마오- 장제스 진영은 협상을 통해서 국공휴전을 성사시켰다.
▲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군은 이미 1937년부터 미국제 톰슨 기관총으로 사격연습을 시작했다.
미국은 미국의 계산대로 얻을 것을 얻었고, 마오쩌둥의 계산은 세력이 불리한데 미국의 권고로 이루어진 휴전기간 동안은 장제스 군대가 준동을 못할 계산을 하였고, 장제스는 미국은 어차피 휴전이 깨져도 자신들을 돕는 우군이라는 각자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계산은 미국- 마오쩌둥- 장제스가 가진 생각이 조화와 균형을 이룬 완벽한 트리폴 게임에 딱 맞아 떨어지는 법칙이었다. 미국과 마오는 이 계산이 시기적으로 오래 가기를 원했다.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최대한 빠른 시간에 얻을 것만 챙기면 휴전은 빠른 시간 내에 깨트리는 편이 보다 많은 무기와 자금을 얻을 수 있었기에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휴전을 깨지고 미국은 더 이상의 국공협상책을 버리고 중국국민당 정부가 중국을 통일 할 수 있도록 돕는 쪽으로 정책 가닥을 잡았다. 이제 미국은 막대한 군비물자와 어느 정도 대륙의 민심을 위해서 자국 군대를 파견하는 것도 고려했다.
▲ 1930년대 마오쩌둥의 홍군은 여벌의 신발조차 없었기에 맨발의 상태로 경례를 하는 모습
여기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장제스가 아니라 사상과 철학을 전파한 마오쩌둥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 장제스는 권력을 탐했고, 마오쩌둥은 중국대륙의 민중을 위한 완전한 혁명을 원했기 때문이다. 1911년 청왕조가 무너지고 신해혁명이 일어났지만 엄격한 의미로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혁명’이었다. 이 신해혁명의 화룡점정을 찍는 혁명이 마오쩌둥이 생각한 민중국가를 세우는 철학이었다. 물론 마오가 비록 그 논리를 러시아에서 차용했지만 러시아적 공산혁명이 아니라 중국인민들에게 맞는 혁명으로 흡수해서 오직 중국대륙을 민중중심의 혁명으로 하겠다는 철학을 계속 전파시켜 나갔다.
그 결과는 국공휴전이 깨지자마자 바로 나타났다. 이제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 성큼 다가서게 되는 시발점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