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록주 명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때 이미 80세가 넘은 나이로 병마와 싸우고 계셨던 노명창은 제자의 발표 무대에 격려사를 하기 위해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무대 위로 올라섰습니다.
“내가 소리를 한지 한 60년이 되어 가는데, 이제 조금 귀가 뚫리려 하니까 숨도 차고 곧 골로 갑니다.”
하시더니 지팡이를 짚고 앞줄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죽 바라보면서 농담을 했습니다.
“내가 어려서 소리할 때 자주 오셨던 저 분들도, 인제 나와 함께 골로 가게 생겼네요.”
그러자 앞에 앉은 노인 몇 분이 “얼씨구!”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가 숨도 차고 목도 안 나오고 해서 소리를 하러 나온 건 아니지마는, 우리 제자 길을 닦아주기 위해서 잠깐 단가 한 마디 하고 내려갑니다.”
관객의 박수와 함께 노명창의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김유정이 박록주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의 휘문고등학교인 휘문고보 4학년 때였습니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박록주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이후 김유정은 박록주의 공연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사랑을 호소하는 편지를 띄웠으나 번번이 무시되었습니다. 그러자 김유정의 연정은 점점 불타 오르기 시적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집에 찾아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호소하였습니다.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혈서로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패기와 열정에 넘치는 구애이기는 하였으나, 제가 보기에도 정상을 넘어 선 그의 구애 방식은 여성의 사랑을 얻기엔 너무도 일방적이고 서투른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게다가 김유정보다 3살이나 나이도 많고 기생 신분이었던 박록주는 끝끝내 그의 사랑을 거절합니다. 박록주 명창은 늘그막의 인터뷰에서 막무가내로 집에 찾아 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김유정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무슨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편지질이오?
학생이 기생과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오.
(박록주 명창의 회상기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에서)
김유정은 1908년 지금의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리인 실레마을에서 부친 김춘식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내노라 하는 부농이었지만 유정이 7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 2년 뒤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가장이 된 형은 잦은 난봉과 가정 폭력을 서슴지 않아 잡안의 재산은 탕진되고, 유정은 갈 곳도 없어 삼촌에게 얹혀 지내게 되는데,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청춘 시절에 박록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하루도 빼지 않고 보낸 그의 편지는 되돌려지거나 찢어지거나 불태워지고, 사랑을 얻지 못한 그는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집니다. 1929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김유정은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지만 두 달 여만에 제명 당하고 맙니다. 그 무렵에도 그는 박록주에게 계속 연애편지를 보내고, 끈질긴 구애를 계속합니다.
김유정은 혈서와 협박과 애원으로 가득한 거의 스토커에 가까운 열렬한 구애를 3년 동안이나 계속합니다. 그러나 박록주는 끝끝내 김유정을 차갑게 대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당시의 조선극장 지배인 신모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9년 3월, 박록주는 여전히 자신을 갈취하며 괴롭히는 부친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배신한 신씨와의 애정관계를 비관하여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김유정 못지 않게 박록주도 외로움과 격정에 시달리는 성격이었던 모양입니다.
박록주가 자살에서 깨어나니 김유정이 병실에서 머릿맡을 지키고 있었다는군요. 그렇다고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1930년 여름, 마침내 김유정은 박록주의 사랑을 얻는 것을 포기하고 실레마을로 돌아옵니다. 얼마 뒤 1931년에 박록주는 경제적으로 그녀를 후원하는 김종익과 재혼하였습니다.
사랑을 잃은 김유정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폐결핵 등의 병을 얻은 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며 소설쓰기에 매진합니다.
드디어 1935년 『따라지 목숨』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되고 『노다지』가 중앙일보에 가작으로 당선된 뒤,『봄봄』,『금따는 콩밭』,『만무방』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1936년에도『동백꽃』,『봄과 따라지』,『슬픈 이야기』등을 연이어 발표하여 뛰어난 소설가로 유명해지고, 이상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과 교류도 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삼십여 편의 작품을 남겨 놓은 채, 아내도 없고 슬하의 자식도 없이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