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식처럼 알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와 핵무기 등의 논의는 이제 생활속의 이야기 거리가 됐다. 그래서 그런지 누구나 원자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보통 작은 원자핵 주변을 전자들이 뺑뺑 돌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이는 100년전 닐스 보어가 그린 원자구조와 비슷하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원자의 모양과는 꽤 거리가 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원자내의 공간이 아파트처럼 층과 호로 나누어져 있어, 전자들은 아무데나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몇층 몇호에 몇 개의 전자가 입주해 있다는 식으로 존재한다.1) 그리고 몇층 몇호까지 전자가 입주해 있느냐에 따라 원자의 성격이 달라진다. 즉 양자역학을 사용하면 전자들의 입주 현황을 바탕으로 각 원자들의 특성을 이론적으로 예측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론적으로 원소 주기율표를 유도해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소주기율표는 양자역학이 나오기 훨씬 전에 나온 것이지 이론적으로 유도된 것은 아니다.
지난 세기에 수많은 소립자가 발견되면서 표준모형이 만들어 졌던것처럼, 19세기에는 많은 새로운 원소들이 발견되면서 원소주기율표가 만들어졌다. 19세기 과학자들은 물질의 궁극적 구성요소가 원자라고는 믿고 있었으나, 원자핵과 전자의 존재는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다만 그 때까지 발견된 수 십 가지의 원소들을 특성 별로 분류해 보면서 원소들이 어떤 주기성을 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로부터 주기율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주기율표는 곧 원자들이 서로 별개의 것들이 아니고, 서로 연관된 무엇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소주기율표는 과학자들이 원자가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했던 결정정인 모티브였던 것이다. 또한 주기율표를 써서 이 원소와 저 원소를 섞으면 어떤 반응이 나고, 어떤 물질이 빠져나오고, 어떤 물질이 합성될지를 설명하고 예측할 수도 있으니, 화학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였다. 이런 면에서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 1834-1907)는 현대과학에 이정표와 같은 업적을 남긴것이고, 인류사에 매우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큰 과학적 업적과 인류에의 공헌을 생각하면 노벨상이 생각난다. 그런 사람에게 상을 주라는 것이 노벨의 유언이었으니까. 그러면 갑자기 의문이 생긴다. 멘델레예프는 왜 노벨상을 받지 못하였을까? 그거야 주기율표가 나온 때는 1860년대이고 19세기에는 노벨상이 없었으니 당연히 못 받았던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면 잘못 집은 것이다. 멘델레예프는 엄연히 그가 73세가 되던 1907년까지 살았었고, 1906년까지 노벨상 후보로 노벨상 선정 위원회의 추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멘델레예프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사연에 대해 한걸음 더 들어가 볼 필요가 생긴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그만의 천재적 상상력에 의해서 펑하고 튀어나온 것이 아니듯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도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발견된 것은 아니다. 멘델레예프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자고 나면 새로운 원자들이 발견되던 때였다. 또한 멘델레예프 외에도 영국의 존 뉴랜드(John Newland), 독일의 로다 마이어 (Lothar Mayer) 등 많은 과학자들이 원소의 주기성을 찾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던 시절이었다. 상대성이론이 탄생하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기기 위한 충분한 조건들이 만들어 지고 있었던 것이다. 멘델레예프는 꿈에서 본 주기율표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한다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한 가지 일에 집중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멘델레예프는 1869년에 러시아화학 학회에서 원자량과 원소 성질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논문을 발표하고, 또 독일학회지에 논문을 발표한다. 주기율표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1869년에 독일 학술지에 실린 멘델레예프의 최초의 주기율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특별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기성을 바탕으로 몇 가지 원소의 존재를 미리 예견한 것에 있다. 그가 알루미늄과 비슷한 에카알루미늄 (eka-aluminium)이 존재할 것이라는 예언은 1875년 프랑스의 브아보드랑(Boisbaudran)이 발견하였고, 또 다른 예언인 에카실리콘(eka-silicon)은 1882년 독일의 화학자 빙클러(Winkler)가 발견하게 된다.2)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빛을 발하게 되면서 그는 화학계의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후 속속들이 새로운 원소들이 발견되면서 주기율표는 점점 완성되어 가고 화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3)
학문적 지위와 명성을 갖추게 된 멘델레예프는 초창기 노벨화학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06년에 노벨위원회는 스웨덴 아카데미에 멘델레예프의 노벨상 수상을 추천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보통은 노벨위원회가 추천한 후보를 아카데미가 그대로 승인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카데미가 주최한 전원회의에서 위원중 한 명이었던 피터클라슨이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물론 5명의 위원 중 나머지 4명은 멘델레예프를 추천하고 있었다. 피터 클라슨은 멘델레예프 대신 프랑스의 앙리 무아상(Henri Moissan, 1852-1907)을 노벨상으로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었다. 앙리 무아상은 당시 기술로는 매우 어려웠던 불소(F)를 최초로 분리해 발견해 낸 사람으로 그 역시 매우 훌륭한 화학자였음은 의심 할 여지가 없었다.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했던 아카데미는 클라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주저하게 된다. 게다가 클라슨은 의외로 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왔는데, 그 중 하나는 멘델레예프에게 노벨상을 주려면 이탈리아의 카니짜로(Cannizzaro)와 공동수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4) 그런데 카니짜로는 1906에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지 않았으므로, 그 해에 멘델레예프에게 단독으로 노벨상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같이 줄 수 있다는 설득과 함께.
게다가 1903년도 노벨상 수상자이자 스웨덴 아카데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스반테 아레니우스 (Svante Arrhenius)도 멘델레예프의 수상을 반대하고 나선다. 그는 주기율표가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진 업적이고 이미 교과서적인 지식이란 이유를 들어 멘델레예프가 노벨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위원들을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심은 아레니우스가 멘델레예프를 개인적으로 싫어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의 “산-염기 반응”에 대한 이론을 멘델레예프가 강하게 비판하였고 그래서 두 사람은 사이가 좋은 편이 못 되었다. 결국에 가서는 아카데미는 만장일치 대신에 투표로 그 해의 노벨상을 결정하기로 하였고, 결국 안팎으로 계속되는 설득에 위원들이 한사람씩 넘어가면서 앙리 무아상을 수상자로 결정하게 된다.
멘델레예프는 훌륭한 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경제학 논문만도 100여 편을 발표한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혁명적이어서 황실의 미움을 사 정작 고국인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서는 외면을 당했고, 정치 시위를 하던 학생 편에 서서 맞서다가 1890년에는 교수직도 던져버리고 만다. 노벨상을 놓친 것 까지 보면 그의 말년은 결코 행복하지 만은 않았던 것이다.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신기하게도 앙리 무아상은 노벨상을 받고 스톡홀름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죽는다.5) 노벨상을 아깝게 놓친 멘델레예프는 1907년 2월 2일에, 그리고 앙리 무아상은 2월 20일에 죽었다. 18일 간격으로 두 사람이 모두 죽은 것이다. 앙리무아상은 55세였으니 일찍 죽은 편이다. 혹자는 억울한 멘델레예프의 저주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도 할 수 있겠다. 과학자는 저주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에게 남기고 이글을 마치겠다. 끝으로 이 글을 잘 못 해석하여 앙리무아상의 인격과 업적을 폄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밝힌다. 그 역시 노벨상에 걸맞는 훌륭한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1) 몇층, 몇호 그리고 입주 등의 단어들은 비유이고, 물리학자들은 이를 어떤 양자 상태에 분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2) 에카알루미늄은 오늘날의 갈륨이고 에카실리콘은 게르마늄이다.
3)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원자량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판 주기율표와 많이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율표는 원자번호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는 물리학자 모즐리(Henry Moseley)의 공헌에 의해 만들어졌다.
4) 카니짜로는 원소들의 원자량 결정에 큰 업적을 남겨 주기율표 작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5) 급성맹장염이라고 알려져있다.
<삼천포>
필자가 바르셀로나에 소재한 고에너지물리연구소에서 포스트닥 생활을 할 때였다.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후 프로트비노(Protvino)나 둡나(Dubna)에서 일하던 핵물리학자들이 대거 서유럽 물리학 연구소의 인력시장에 유입될 때였다. 엄청나게 훌륭한 물리학자들을 포스트닥 인건비로 고용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우리 연구소에도 러시아 물리학자 한분이 오셨는데 그 분은 나와 같은 사무실을 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부를 땐 사샤라하고 쓸 땐 알렉산드르라고 했다. 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때까지 내가 만난 러시아 친구들이 모두 사샤였기 때문이다. 사샤는 모든일을 보드카로 해결 했는데, 실제로 자신이 소련의 가속기 연구소에서 일을 할 때 고에너지 빔에 노출되는 사고를 당했었는데, 곧바로 보드카를 잔뜩 마셔 목숨을 건졌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보드카는 정말 향도 좋고 맛도 좋은 매력적인 술이다. 게다가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보드카의 표준을 정했다는 매우 과학적인 술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보드카 속에 들어 있는 알콜분자수와 물분자수는 정확히 1:5이다. 왠지 과학자의 순결하고 단순한 영혼이 보인다. 알콜분자는 (C2H5OH)로 분자량이 46g/mol이고, 물분자(H2O)는 18g/mol인데, 알콜의 밀도는 0.8g/cm3, 물은 1g/cm3이니까, 1:5의 비율은 부피비로는 대략 40:60이 된다. 바로 이것이 보드카의 표준이 알콜 40% (또는 40도)인 이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1940년대부터 러시아에서 통용되던 보드카는 40도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런 얘기는 이성과의 데이트때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분자수와 분자량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칫 로맨틱한 분위기가 깨질 수 있으므로, 보드카의 향과 분위기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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