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 한국에 삶을 바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 그들은 누구이며 이 땅에 무엇을 남겼는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한국은 가난하고 비위생적이며 황폐한 땅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폐허에서 신음해야 했다. 이렇듯 척박한 이역만리의 나라에 스스로 찾아와 젊음과 열정, 재산, 심지어 자신과 가족의 생명까지 바치며 헌신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기독교 복음 선교만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 문명화, 선진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피폐한 시대 기꺼이 자신의 삶을 불살라 한국인의 벗이 되었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유산과 교훈을 되돌아본다.
- 책속으로 -
선교사들의 불결함에 대한 토로는 비단 관찰자로서의 기록이 아니다. 자신과 가족이 전염병의 재물이 되었다. 지금도 나이가 든 세대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살 수 있었을까?’라는 문장이 이따금 스쳐갈 것이다.
우리는 민족이란 단어가 가진 마력에 사로잡혀 너나없이 그 시절을 미화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시대는 아니었다. 가난, 부패, 불결, 전염병, 정치 혼란 등이 보통 사람들의 삶을 질곡 같은 세월로 만들었다. 깨어 있는 사람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미로 같은 세월의 연속에 크게 좌절하고 낙담했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내한하던 시절의 조선이란 나라는 천장은 비가 새고 담벼락은 장대비에 허물어져 내려 주저앉기 직전의 토담집 같은 신세였다. (74쪽)
에비슨은 “서울에는 시설을 제대로 갖춘 병원이 한 군데도 없고 간호사도 없이 의사 혼자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습니다”라고 한국 사정을 소개하면서, “만약 3~4명의 의사가 잘 설비된 하나의 병원에서 같이 진료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내친김에 에비슨은 5월 말 북장로회 총회에서 병원 설립 홍보를 했다.
강연을 경청했던 루이스 세브란스는 1만 달러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에비슨의 말에 루이스 세브란스는 “받는 당신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큽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기부 약속이 이뤄지자 선교본부가 1만 달러를 더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렇게 2만 달러가 확보된다. 이 기금을 기초로 1904년 11월, 서울역 맞은편 지금의 연세빌딩 자리에 기증자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병원’이 설립된다. 루이스 세브란스는 1만 달러 기부에 그치지 않고 곧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 세브란스빌딩 소재지 부근)의 대지 구입비로 5,000달러를 더 내놓는다. (181쪽)
선교본부의 승인이 떨어지자 애오개 시약소(1888년 12월), 남대문 시약소(1890), 동대문 시약소(1892) 등을 연다. 신촌과 마포가 갈리는 오른쪽에 우뚝 서 있는 아현감리교회는 애오개 시약소에서 출발한 교회다. 그래서 교회 창립 120주년을 기념해 지은 예배당은 ‘스크랜턴기념예배당’으로 명명되었다. 애오개는 작은 고개라는 뜻으로 죽은 아이를 내다 버리는 곳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사활인서’가 있던 곳이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이곳에 애오개 시약소를 설치했다. 남대문에서 한국은행 방향으로 300m 가다 보면 상동교회가 있다. 이곳에도 상동 시약소를 세웠다. […] 스크랜턴은 시약소에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을 위해 전도 책자를 구비해놓았을 뿐 아니라 전도인까지 상주시켜서 복음을 전파하는 곳으로 활용한다. 결국 1893년 정동 시병원의 시설과 장비를 옮겨 1895년 상동에서 본격적인 진료에 들어간다. 부지 안에 한옥을 한 채 빌려서 예배실로 꾸미고 주일 집회도 연다. (223-224쪽)
임종을 지켜본 마거릿 프리차드(변마지, Margaret F. Pritchard, 1900~1988) 간호 선교사의 말을 통해 쉐핑의 참된 면모를 알 수 있다. “쉐핑은 생필품을 가난한 자들에게 모조리 주었고, 집에는 옥수수 두 홉밖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덮고 잘 이불까지 내어주었습니다.” 게다가 시신까지 의료 연구용으로 제공하고 떠났다. 1934년 7월 7일, 서서평이 저세상으로 떠났을 때 장례는 광주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13명의 양딸과 수백 명의 걸인과 나환자들이 뒤따르면서 “어머니! 어머니!”라고 울부짖는 통곡 소리에 식장이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 광주시 남구 양림동의 선교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306쪽)
어느 추운 겨울날, 서울 시내에서 미군 병사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다. 인부들이 치우는 쓰레기 더미라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아이들의 사체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때부터 “이 아이들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시카고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해결책을 구하는 절박한 마음과 기도가 끊어지질 않았다.
중간 기착지인 시애틀에서 기적 같은 일을 만난다. 50달러가 든 봉투였다.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한국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는 메모와 함께 1,000달러짜리 수표가 들어 있는 우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완슨 목사는 50달러와 1,000달러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가르쳐준 사건으로 해석했다. 이렇게 해서 고아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한다. (360쪽)
개신교는 만민평등 면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다. 신분, 남녀노소와 관련해서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선교사들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여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나섰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설의 설립 과정을 보더라도 남자 학교와 여자 학교 사이에 우열을 가리지 않았다. 내한 선교사 비율조차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고, 여자 선교사들 눈에는 조선 여인들이 억압받는 것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아마도 여성 선교사들의 왕성한 활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의 남녀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389쪽)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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