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왓지국의 수도 웨살리에서 연화제(燃火祭)라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넘쳐나는 인파와 볼거리 속에서 한 바라문이 황금으로 된 미인상을 넣은 제단을 끌고 다니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가씨들, 이리 와 보세요. 여기에 공양을 올리면 멋진 사람을 만나게 된답니다.”
온갖 장신구로 치장한 어여쁜 소녀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굴리며 여기저기서 몰려들었다.
그 속에는 밧다라는 소녀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제단 가까이로 다가가자, 제단의 미인상은 순간 빛을 잃은 듯 색이 바래보였다. 그녀의 빛나는 아름다움에 상대적으로 빛을 잃은 듯 보였던 것이리라.
여하튼 이 모습을 본 바라문은 이 아이야말로 핍팔라야나의 배필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부모를 만나 라자가하에 사는 대부호 바라문의 아들인 핍팔라야나와 부부의 연을 맺어 주자고 청했다.
이 바라문이 황금의 미인상을 넣은 제단을 끌고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그는 핍팔라야나라는 청년의 아버지의 스승으로 아들의 결혼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던 제자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핍팔라야나는 대부호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일찍부터 출가에 뜻을 둔 탓에 세속적인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장성한 그에게 날마다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님을 포기시키기 위해 그가 내보인 것은 황금으로 만든 미인상.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데려온다면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아들을 앞에 두고 난감해하는 제자를 위해, 바라문은 미인상을 모신 제단을 끌고 다니며 핍팔라야나의 신부감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이 바라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밧다와 핍팔라야나는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핍팔라야나는 물론이거니와 밧다 역시 이미 출가에 뜻을 두고 살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한 방에서 각자의 침대를 쓰며 서로 살을 맞대는 일 없이 살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하나의 침대만 남겨 두고 치워버렸지만, 핍팔라야나가 자면 밧다가 일어나고, 밧다가 자면 핍팔라야나가 일어나서 경행하는 등 몇 년의 세월이 흘러도 두 사람은 동침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자고 있는 밧다의 손에 독사가 기어오르려는 급박한 상황을 눈앞에 두고도 핍팔라야나는 그녀와의 피부 접촉을 피해 옷으로 그녀의 손을 치울 정도였다. 이렇게 두 사람은 12년 동안이나 한 방에 살면서도 서로 접촉하는 일 없이 청정한 생활을 했다.
결혼 생활 중에도 청정 지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가업을 이어받게 된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다가 기름 짜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름을 짜라는 밧다의 명을 받은 하녀들은 “기름을 짜면 많은 벌레들이 죽게 되는데, 이 살생의 죄는 주인인 밧다에게 가겠지”라며 수군거렸다. 우연히 이를 듣게 된 밧다는 즉시 기름 짜는 일을 멈추게 한 후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 무렵 논과 밭을 돌아보고 있던 그녀의 남편 역시 힘들게 일하는 노예와 혹사당하는 소의 모습 등을 바라보며, “아, 모든 중생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구나”라며 우울해하고 있었다.
함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출가.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남편 핍팔라야나가 먼저 집을 나섰다.
그 후 머지않아 밧다 역시 집을 나섰다. 어디 한 곳 의지할 데도 없이 좀처럼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한 채 방황하던 그녀는 어느 날 한 유행외도를 만나 그 밑으로 출가하게 되었다.
그녀는 열심히 수행·정진했지만, 욕정에 눈먼 이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이성을 잃고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외도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그녀는 푸라나라는 외도들의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호소했지만, 푸라나는 “나는 이 외도들로부터 존경받으며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 만약 그들을 처벌한다면 모두 내 곁을 떠나 버릴 것이다. 그러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라며 발뺌을 했다.
밧다는 애욕의 더러움으로 가득 찬 축생과도 같은 무리들 속에서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남편인 핍팔라야나는 부처님을 만나 귀의하고 소욕지족의 두타행자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바로 마하캇사파, 즉 대가섭이다.
캇사파 가문은 인도에서도 명문에 속하는데, 핍팔라야나는 캇사파 출신이었다. 그런데 승단에는 캇사파 3형제라 불리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 마하캇사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하캇사파는 석가족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보며 세속에 두고 온 밧다를 떠올렸다. 좋은 스승을 찾게 되면 연락하겠노라 그녀에게 남긴 약속도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선정에 들어가 관찰해보니 밧다는 한 외도 밑에서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한 비구니를 불러 부탁했다. “갠지스강 주변에서 한 외도 밑에서 수행하고 있는 밧다 카필라니라는 수행자에게 가서 ‘당신의 남편 캇사파는 나와 같은 스승 밑에서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금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저희 스승 밑에서 함께 수행합시다’라고 말해주시오.”
밧다 앞에 나타난 비구니는 마하캇사파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밧다는 물었다. “당신의 스승은 어떤 분이십니까?” 많은 외도들을 대하며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경멸감을 느끼고 있던 그녀였기 때문이었을까.
미지의 스승에 대한 불안감과 호기심이 담긴 질문이다. 비구니는 대답했다. “제 스승님은 32대인상(大人相)으로 몸을 장엄하고 계시며, 80종호·16불공불법·10력·4무소외·대자대비를 구족하고 계십니다. 스승님의 모든 성문 제자들도 이와 같습니다.”
안도감을 느낀 밧다는 그녀를 따라 나섰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을 만나게 된 밧다는 부처님에 의해 마하파자파티 고타미의 비구니승가로 보내져 구족계를 받게 되었다.
세세생생 선업 깨달음도 빨라
그런데 출가 후에도 눈에 띄는 아름다운 미모로 인해 그녀는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발우를 들고 탁발을 하러 다니는 절세미인의 모습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출가했을까?” 이 말을 들은 밧다는 이후 탁발하러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탁발을 그만둔 이유를 전해들은 마하캇사파는 “만약 부처님께서 내가 걸식한 음식의 반을 밧다비구니에게 줄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구나”라고 했다.
비구들로부터 이 말을 들으신 부처님은 “나누어 주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라며 허락해 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걸식으로 얻은 음식의 반을 밧다에게 전해 주었다.
그런데 그때 츌라난다는 비구니가 이를 보고 조소하며 빈정거렸다. “성자 마하캇사파는 출가하기 전에 밧다랑 한 집에서 12년이나 함께 살면서 범행을 닦았다고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삿된 정이 남아 걸식한 음식을 반반씩 나누어먹고 있구나.”
이 말을 들은 마하캇사파는 밧다를 찾아가 더 이상 음식을 나누어 줄 수 없으며, 이 상황은 밧다 스스로가 이겨내고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설했다.
밧다는 그의 말을 듣고 대용맹심을 일으켰다. 걸식하러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밤낮으로 정진한 그녀는 멀지 않아 법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신통력을 얻었으며, 안락을 얻었다. 훌륭한 한 명의 수행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밧다에 대한 구성원들의 관심은 특별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와 더불어 승가 최고의 비구로 손꼽히는 마하캇사파의 세속시절의 아내가 아니던가.
게다가 빼어난 미모로 인해 언제나 눈에 띄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수행자들의 궁극적인 목표인 깨달음도 빨리 얻자 더욱 더 관심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비구니는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다. “밧다비구니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지요?” 부처님께서는 그녀가 전생에 쌓은 갖가지 공덕에 대해 설하시며 이미 오랜 과거생에 원을 세우고 세세생생 선업을 닦아왔다고 말씀하셨다.
밧다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던 셈이다. 속세에서는 남편이었지만 이제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수행자로 거듭나 그녀를 따뜻하면서도 엄격하게 이끌어주는 동료수행자 마하캇사파,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수행자로서의 멋진 행보를 믿고 지켜보며 격려해주신 부처님.
훗날, 밧다가 읊었다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해진다.
“부처님의 자손이자 상속자인 캇사파는 마음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전생을 알고, 또한 천상과 지옥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성자 캇사파는 생존을 멸하고 직관지를 완성했습니다. 즉 이 3종의 명지(明知)에 의해 그는 3종의 명지를 갖춘 바라문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밧다카필라니에게도 3종의 명지가 있으며, 죽음의 악마를 물리치고, 악마와 그 군대를 함께 쳐부수고, 최후의 신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세간에 재난이 있음을 보고 우리 두 사람은 출가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더러움을 멸하고, 마음을 제어하고, 청량해져, 편안함을 얻은 것입니다.”
부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세간을 넘어 출세간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 서로를 격려하고 존경하며 수행자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목표를 나란히 성취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생연분이 아닐까.
이자랑 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무지를 두려워하라.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릇된
지식을 두려워하라. 허위의 세계에서 그대의
눈을 멀리하라.
(석가모니)
물방울이 그릇을 채우듯이 어리석은 자는
악을 채운다.
(법구경)
배우는 바가 적은 사람은 들에서 쟁기를 끄는
늙은 소와 같이 몸에 살이 찔지라도 지혜는 늘지
않는다.
(법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