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이 몰려오고 있는 미ㆍ중 무역 갈등을 둘러싸고 다음주(2018년 5월 셋째주) 무역협상이 제2라운드에 돌입한다. 중국 측에선 류허(劉鶴)부총리가 협상단을 이끌고 지난 3월에 이어 다시 미국을 방문한다. 일단 5월 3~4일 열린 1라운드에선 상호 의견차를 확인하는 차원에 그쳐 협상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미국 측의 공세 강도가 중국의 예상 범위를 넘어선 것은 확실해보인다. 중국의 주류 경제학자 리다오쿠이(李稻葵) 칭화대 교수는 블름버그 통신에 “트럼프 대통령은,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짖어대는 개들 같은 협상팀을 보냈다”며 “그들은 거래의 기술이 떨어졌다”고 성토했다.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공세적으로 중국팀을 코너에 몰아넣었다는 미국 측 보도도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협상에서 중국팀에 내놓은 요구 수위가 기존 입장보다 더 강화됐다고 전했다. 협상팀 내 강경파의 목소리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의미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대미 무역 흑자를 2000억 달러(약 215조원) 줄이라고 요구했다. 시한은 2년이다. 지난해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 3370억 달러의 약 3분의 2 수준이다. 액수만 문제 삼은 게 아니다. 가히 전방위 압박의 시작이다. 모든 서비스와 농업 부문을 개방하라고 압박했고 중국이 ‘제조 2025’를 내걸고 전략 산업에 부과하는 보조금도 모두 폐지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은 중국의 ‘제조 2025’를 대표적인 불공정 국가개입 사안으로 정조준했다.
미국이 짠 협상 구도가 워낙 살벌해 좀처럼 타협의 실마리를 잡기가 어려워 보이는 모양새다. 게다가 중싱 제재와 화웨이 조사 건과 맞물려 ‘제조 2025’을 손 보겠다는 의사가 확실한 이상 1차 협상에서 교점을 찾기는 난망한 일이라는 지적이다. 이럴 때는 한편으론 싸우면서 다른 한편에선 대화를 하는 특유의 중국식 협상술의 한 단면으로 1차 협상을 자리매김 할 수 있다.
2018년 5월 5일 중국 주재 미국 대사관이 공개한 3~4일 미중 베이징 무역협상 당시 대표단 단체 사진. 왼쪽부터 오른쪽 순으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무역대표부(USTR) 대표, 윌버 로스 상무장관,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류허 부총리, 류쿤 재정부장, 중산 상무부장, 이강 중국 인민은행장. [출처:중앙포토]
시진핑 주석의 경제 책사 출신으로 사실상 경제 사령탑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를 업고 있는 류허 부총리이지만 결정적으로 피를 말리는 협상 세계에서 쌓은 경력이 없다. 연구하고 토론하고 전략 짜는 게 직업이었던 사람이다.
이 때문에 류허 부총리가 주연 배우로 나서는 중국팀이 좀더 급을 올려 돌파구를 찾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왕치산 부주석의 등판이다.
왕 부주석은 1차 협상에선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배후에서 협상 전략을 총괄했을테니 2차 협상의 핵심 변수로 볼 수 없다는 분석도 있지만 내용 못지 않게 형식과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의 협상 스타일상 왕 부주석의 전면 등장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왕치산은 20여 년 동안 경제ㆍ외교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광둥(廣東)성 부성장으로 중국 최초의 파산금융사인 광둥신탁투자 처리를 맡았다. 2003년 중국의 사스(SARSㆍ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위기 때는 베이징 시장으로 투입돼 불을 껐다. 2008~2012년 부총리로 뛰면서 미ㆍ중 전략ㆍ경제 대화의 중국팀장을 맡았다.
당시 카운트파트였던 헨리 폴슨 전 미국 재무장관은 “결단력 있고 호기심이 강한 인물”이라며 “미국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두 나라가 경제적으로 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티모시 가이트너 전 재무장관도 “문제를 푸는 능력이 뛰어난 구원투수이자 특급 소방수”라고 띄워줬다. 미국 조야에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는 게 왕치산 카드의 잠재력이다.
2018년 3월 17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국가주석과 부주석 등을 선출하는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1차 회의 5차 전체회의가 열린 가운데 국가 부주석에 당선된 왕치산 부주석이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악수를 하고 있다. 69세인 왕치산은 지난해 10월에 열린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7상 8하'(67세는 유임하고 68세는 은퇴한다) 원칙에 따라 은퇴했지만, 이번 전인대에서 복귀했다. [출처:중앙포토]
왕치산은 시진핑 집권 2기 들어 양제츠(楊潔篪)외교담당 정치국원과 류허 부총리를 지휘하며 대미 관계 위기 국면에 대처하기 위한 안보전략ㆍ경제 전문 ‘팀왕치산’을 이끌고 있다.
왕 부주석이 2차 협상 또는 그 이후 협상에서부터 전면에 나서는 구도는 중국 측이 이번 협상 국면을 단발 사안으로 보지 않고 장기 레이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도 나온다. 만약 1차 협상 때부터 왕치산이 등판하면 중국 측이 절박하게 이번 협상에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한 호흡 끊고 가자는 중국의 속내도 감지된다.
치열한 신경전과 기싸움 끝에 호쾌하게 양보 카드를 던져야 할 때를 대비해 왕치산을 아끼고 있다는 말이다.
[출처:셔터스톡]
마침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5월 1일 이번 협상은 적어도 1년은 소요될 것이라고 에둘러 밝혔다. 길든 짧든 이 기간 중 안보전략과 경제를 아우르는 ‘팀왕치산’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다.
[출처:구글 사진 캡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ㆍ사드)배치를 둘러싸고 한국 경제에 차이나 불링을 일삼는 거친 중국일까. 아니면 유연하게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며 타협을 모색하는 협상의 달인 중국일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는 앞으로 한·중 경제의 위기 국면에서 중국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가늠하게 하는 중대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왕치산이 보여주는 중국의 얼굴이 자못 궁금해진다. -차이나랩 정용환-
돌아온 왕의 남자 왕치산 외교 사령관으로
지난 3월 17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된 왕치산이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지난 3월 17일 중국 수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 격) 5차 전체회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함께 당선된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이 헌법 선서대 앞에 섰다. 왼손은 헌법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 주먹은 어깨 위로 들고 선서를 마친 왕 부주석은 오른손 주먹으로 선서대를 강하게 내리쳤다. 선서대를 내리치는 소리가 회의장 내에 크게 들릴 정도였다. 이어 주석단 자리로 돌아가면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시 주석과 악수를 나눴다. 홍콩 빈과일보는 “왕치산이 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썼다.
이날 전인대 대의원들의 이목은 왕 부주석에 집중됐다. 그가 투표용지를 넣기 위해 투표함으로 걸어갈 때, 찬성 2969표에 반대 1표로 당선이 확정됐을 때 회의장이 떠나갈 듯 박수 소리가 터졌다. 시 주석보다도 박수 소리가 더 컸다고 현장 기자들은 전했다. 지난 5년간 당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로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호랑이’(고위 간부)부터 ‘파리’(하급 간부)까지 150만명의 부패 간부를 척결한 그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득표수도 전원 찬성표를 받은 시 주석에 이어 두 번째였다. 5년 전 국가부주석에 선출된 리위안차오는 반대표가 80표, 기권표가 37표였다.
상무위원 은퇴 5개월 만에 국가부주석으로
시진핑 집권 2기 5년의 중국 최고지도부 인선을 결정한 작년 10월 19차 당대회 당시 중국 국내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왕치산 당시 상무위원이 차기 최고지도부에 합류할 것인지 여부였다.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의 일원인 상무위원은 칠상팔하(七上八下)의 정년 원칙이 적용된다. 당대회가 열리는 시점에 만 68세를 넘은 사람은 은퇴하고, 67세까지는 유임한다는 원칙이다. 1948년생으로 69세가 된 왕치산은 은퇴가 불가피했다. 그러나 왕치산이 중국공산당 내에서 가장 유능한 인사인 데다, 시 주석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반부패 개혁을 주도해왔다는 점에서 시 주석이 관례를 깨고 유임을 택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결과적으로 시 주석은 당내 규칙에 따라 왕치산을 은퇴시켰다. 대신 그로부터 5개월 만에 평당원으로 돌아간 왕치산을 국가부주석에 발탁해 다시 한 번 그와 함께 일을 하게 했다. 중국은 이번 전인대에서 헌법을 개정해 국가주석과 국가부주석의 임기 제한을 폐지해 왕치산은 시 주석 집권기 동안 계속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왕치산은 시 주석보다 5살 연상이지만 그와 비슷한 경력과 배경을 갖고 있다. 문화대혁명 때인 1969년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산시(陝西)성 옌안 지역으로 하방(농촌으로 내려가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것)됐다. 시 주석도 같은 시기에 옌안으로 하방돼 7년을 살았다. 정치적으로는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나 고관의 자제 등으로 구성된 세력)으로 분류된다. 장인이 혁명 원로인 야오이린(姚依林) 전 부총리로, 그의 둘째 딸인 야오밍산(姚明珊)과 결혼했다. 시 주석의 아버지는 시중쉰(習仲勛) 전 부총리이다.
1973년 시안에 있는 시베이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산시성박물관에서 일했던 그는 1982년 장인의 배려로 당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 연구원으로 임명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개혁·개방 초기였던 1988년에는 중국농업신탁투자공사 사장으로 중용됐고 이후 인민은행 부행장, 중국건설은행 행장, 중국국제금융공사 이사회 의장 등을 거치며 경제 관료로 경력을 쌓았다.
베이징 사스 수습한 ‘소방수’
왕치산은 일반적인 중국 관료들과 달리 강직한 성품에 말도 에둘러 하는 법 없이 직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나 ‘소방수’ ‘특급 구원투수’ 등의 별명을 얻었다.
그가 ‘소방수’로서 유명해진 시기는 아시아 금융위기 때인 1997년이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남부 광둥성의 금융기관들이 위기에 시달리자 중국 정부는 건설은행 행장이던 그를 광둥성 부성장으로 내려보내 수습토록 했다. 왕치산은 서방 채권은행들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 금융위기를 극복해냈다.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해 중국 수도 베이징이 대혼란에 빠졌을 때에도, 중국 중앙정부는 남부 하이난(海南)성 서기로 내려간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왕치산을 ‘구원투수’로 불러들였다. 당시 베이징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시(市) 당국이 사스 발생 현황을 계속 숨긴 탓에 시민들이 당국을 불신하게 돼 사스 확산을 막기 위한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시민들의 협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치산이 내놓은 해법은 정확한 보고와 정보 공개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각급 기관에 “보고를 할 때 1은 1이고 2는 2다. 전쟁터에서 농담은 없다”며 정확한 보고를 지시했다. 왕치산은 이때 ‘군령여산(軍令如山)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확한 보고와 정보 공개가 계속되자 시민들의 신뢰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고, 사스도 진정됐다.
후진타오 전 주석 집권 후반기인 2008년 국무원(정부) 부총리가 된 왕치산은 외교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다. 미·중 전략·경제 대화의 중국 측 대표를 맡아 전 세계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했다. 그를 상대했던 미국 재무장관들은 왕치산을 높이 평가했다. 헨리 폴슨 전 미국 재무장관은 “결단력 있고 호기심이 강한 인물로 철학 토론을 즐기고 짓궂은 농담을 잘하는 역사학자 출신”이라며 “미국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미·중 두 나라가 경제적으로 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티모시 가이트너 전 재무장관도 “문제를 푸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라며 “대단한 해결사에 특급 소방수”라고 했다.
왕치산은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즐겨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전인대 때는 공식 자리에서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시 주석 집권 2기 개혁도 설계, 시 주석이 2013년 집권 1기를 시작하면서 그를 상무위원 겸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에 앉힌 것은 그의 이런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지도층과 관료사회의 부패가 공산당의 집권 기반을 위협할 정도였다. 기율검사위 서기로 취임한 왕치산은 기율위 위원들에게 프랑스 역사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이 쓴 ‘앙시앵 레짐과 대혁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부패가 어떻게 나라를 망치는지 보라는 뜻이었다.
지난 5년간 왕치산은 시 주석 집권1기의 강도 높은 반부패 드라이브를 주도했다.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과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정치국원), 시 주석의 후계자 후보군이었던 쑨정차이 전 충칭시 서기, 장쩌민 전 주석의 군부 인맥인 궈보슝·쉬차이허우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이 줄줄이 왕치산이 휘두른 칼에 날아갔다. 정치국원 이상은 사법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중국 정계의 불문율을 깨고 정·군의 최고위층까지 손을 댔다.
왕치산은 이런 혹독한 반부패 드라이브로 적잖은 적을 만들었고, 작년에는 자신이 부패 의혹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미국으로 도피한 중국의 부동산 재벌 궈원구이(郭文貴)는 왕치산 가족들이 중국 하이난항공의 지분을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했고, 미국 내 호화 주택을 여러 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왕치산의 부인인 야오밍산이 1992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이런 의혹에 대해 일절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왕치산은 반부패 수장의 역할을 넘어 시 주석 집권 2기 당정 개혁 틀을 만드는 데도 관여했다. 시 주석은 작년 19차 당대회와 올해 전인대 헌법 개정 등을 통해 공산당을 헌법상의 집권당으로 명시해 당정일체 원칙을 분명히 하고, 반부패 국가기관인 국가감찰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대규모 당정 개혁을 단행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