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빛으로’ 시리즈를 연재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이 글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헤르메스 신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은 서양고전문헌학이 제도적으로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17세기로 돌아가자. 이와 관련해서 두 명의 프랑스 출신, 베네딕트 교단 소속 사제 문헌학자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말문을 열고자 한다. 리샤르 시몬(1638~1712)과 장 마빌론(1632~1707)이 그들이다.
시몬은 성경사본학의 시조다. 그는 ‘구약성경의 판본 역사에 비판적 접근(critical history of Old Testament)’이라는 저서를 1678년에 출판하고, 1689년에는 신약성경의 사본전승사 연구를 착수하는데,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문헌전승사(Textgeschichte)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가능케 한 사람이다.
이렇게 시작된 문헌 연구는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 파울 마스의 문헌계보도(stemma codicum)론으로, 예컨대 웨스트 같은 서양고전문헌학자에 의해서 비판본(textcritic)에 대한 학문으로 발전한다.
마빌론은 생 제르망 출판사에서 43년 동안 근무한 출판인으로, 이 기간 중에 ‘고문헌에 대하여(De re diplomatica)’를 저술한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한 것인데, 이를 통해서 그는 고문서학의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이 저술이 고대 라틴 문헌 필사본의 역사와 진위 문제를 단순한 직감에 기초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비교를 통해서 해명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공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18세기로 넘어가자. 18세기 서양고전문헌학의 핵심은 서양고전문헌학이 파리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는 데에 있다.
한편으로 서양고전문헌학은 영국에서 꽃피게 된다.
이러한 발전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 리차드 벤틀리(1662~1742)다.
그는 호메로스 비판본 편집을 준비했는데, 이 과정에서 희랍어의 디감마 현상(digamma aolicum oinos Foinos)을 발견한다. 이 디감마는 필사본 어디에도 표기되지 않은 소리다. 그러나 그는 알렉산드리아 주석학자들의 작품과 비문 연구를 통해서 디감마가 라틴어의 v 에 해당하는 발음임을 밝혀낸다. 이는 문헌학, 언어학, 운율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벤틀리는 이와 같은 전문적인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은 다음에 있을 것이다. 그의 학제간 연구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일리아스’ 제14권의 내용을 담고 있는 2세기경의 파피루스(프린스턴대).
그는 당대 유명한 학자들과 함께 매주 한 번씩 일종의 콜로퀴움을 열었다. 이 콜로퀴움에 참여했던 이들은 예를 들면 로크, 뉴턴 같은 학자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벤틀리는 학제간 논의를 했는데, 1692년에 화학자 보일이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교회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보일의 입장은 과학과 신앙은 동반자로, 과학이 신앙이 세운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버클리를 비롯한 당시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과학으로 인해 무신론의 확산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과학계와 종교계 사이에는 뜨거운 논쟁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형국이었다.
바로 논쟁 전선에서 벤틀리는 ‘보일 독해(Boyle Lecture)’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보일의 입장을 옹호하고 정당화한다. 이에 대해서 물리학자 뉴턴은 벤틀리의 증명 시도 중에 일부 수학적 오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벤틀리의 논증과 논거가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벤틀리의 이러한 학제간 활동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이라 하겠다. 물론 이러한 만남이 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벤틀리의 명민한 지적 능력도 작용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발라, 에라스무스를 거쳐 서양고전문헌학, 더 나아가 인문학의 배경에 이성주의, 합리주의라는 중요한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럽 대륙의 한 구석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의 고전 문헌학의 방향과 기본 골격을 결정하게 될, 새로운 방법에 입각한 서양고전문헌학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방법’이 바로 교육(education)과 연구(research)의 결합이다. 이 방법의 핵심은 기존 교육이 암기 중심의 교육 방식이었다면, 연구를 통해서 교육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육과 연구의 이와 같은 결합을 체계적으로, 본격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하이네(1729~1812)다.
교육과 연구의 결합은 빌헬름 본 훔볼트의 주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 지적 소유권은 하이네에게 있다 할 수 있다. 훔볼트가 원래 하이네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적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더 따진다면, 이 주장의 발원자는 고고학자 빈켈만(1717~1768)이다.
빈켈만의 고고학 연구는 하이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하이네가 문헌에 대한 실증 연구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과정에서 빈켈만의 고고학적 실증 연구 중시 태도가 한 몫을 단단히 했기 때문이다.
하이네의 문헌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이후 서양고전문헌학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하는데, 예컨대 그의 제자였던 볼프(1759~1824)의 ‘호메로스 문제들에 대한 서문’ 박사 논문도 실은 하이네 연구 전통 위에서 진행된 것이었기에 그렇다.
볼프는 이 논문에서 호메로스 텍스트의 통일성을 연구하는데, 이를 통해서 호메로스 작품이 오래 시간에 걸쳐 퇴적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러한 연구는 작가가 호메로스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직업 가객들일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 주장은 아직도 논쟁 중이다.
소위 ‘단일론’이냐 ‘분석론’이냐를 놓고 싸우고 있는데, 어쩌면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맞느냐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논쟁 중에 많은 중요한 사실들이 새로이 발견되었고, 또한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밀만 패리 같은 사람은 단일론 진영에 속하는데, 그는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직업 가객의 암송 능력을 연구하고, 이 연구 방법을 호메로스 직업 가객의 경우에 대입시킨다.
결론은 그러니까 한 직업 가객이 예컨대 ‘일리아스’ 24권을 다 외울 수 있었고, 따라서 한 시인이 ‘일리아스’를 지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패리의 연구 방법은 나중에 월터 옹이 ‘문자 문화와 구술 문화’의 차이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하이네의 실증주의 연구 전통은 볼프의 제자였던 뵈크와 베커로 이어진다. 베커는 아리스토텔레스 편집자로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서양고전문헌학자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배였던 훔볼트가 1810년 베를린에 세운 훔볼트 대학에서 활약하게 되는데, 이들은 연구에 입각한 교육을 구현하게 된다.
그러니까 일종의 교과서가 있어서 이 교과서를 매년 반복-암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문헌 텍스트를 편집하고, 그 텍스트를 연구하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이겠지만 이는 가히 교육의 혁명적인 전환이었다. 당시 유럽의 유수 대학들은 아직도 옛날 수도원식 독해와 암기 중심의 강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즉 늘 가르치던 내용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방식을 그들은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연구와 교육의 결합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하이네의 통합 정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하겠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이네가 이 통합 정신의 실천을 위해서 단지 구호 차원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하이네는 연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자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도서관을 건립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 도서관이 괴팅겐 대학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후대 대학 도서관의 전범 역할을 담당한다. 예컨대 하버드 대학 도서관도 괴팅겐 대학 도서관의 구조와 제도를 모방하였다.
하이네가 도서관장으로 재직시 수집한 장서수가 20만권에 이르렀다. 이는 도서관 없이는 어떤 연구도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이네가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 도서관에 기초해 괴팅겐 대학은 이후 4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다. 연구와 교육의 결합 노력이 가져다 준 결실이라 하겠다.
또한 하이네는 학술원(Goettingen Akademie)을 결성한다. 이 학술원의 초기 모습은 오늘날의 학회 규모에 해당하는 연구자 모임 정도에 불과했지만, 흩어져서 개별적인 연구에 그쳤던 학자들이 이 학술원을 통해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학자들은 연구의 결실을 공동으로 누리고, 개인 차원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거대 학문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번 연재에 소개했던 ‘라틴어 대사전(Thesaerus linguae Latinae)’이다. 물론 이 프로젝트의 제안자는 볼프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업이 실천 가능했던 것은 하이네가 기초한 학술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학술원은 대학 외부의 제도와 권력으로부터 학자들을 보호해 주는 역할도 담당했다. 아울러 대학 외부의 사회에 대학이 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통로 역할도 수행하였다.
연구사 차원에서 하이네의 또 다른 공로는 학술잡지를 만들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학술잡지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회보(periodica, 오늘날의 저널이란 말은 이 단어에서 의미 번역한 것이다)를 통해서 그는 학회와 학자들의 연구 동향, 그리고 학자들 간에 벌어지는 학적 논쟁을 학회 회원들에게 알렸다.
이를 통해서 학자들은 연구 동향과 최신 연구 성과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필요한 경우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연구와 교육의 결합을 통해서 연구 중심의 현대 대학 탄생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하이네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현대 대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의 중심에 인문학이 자리잡고 있고, 그 인문학이 더 정확히는 서양고전문헌학이라는 샘에서 연원하고 있다는 사실(史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