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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성리학의 틀에 눌러 앉아 고리타분한 공리(空理)와 공담(空談)에 빠져 있던 무렵, 일본은 태평양을 건너온 영국인을 사무라이라는 상층 계급의 일원으로 포용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일본이 지닌 문명의 포용성과 개방성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17세기 당시 일본 지도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 영국 모험가와의 대화를 즐겼다. 자신이 딛고 선 땅 너머 세상에 시선을 던지며 질문을 해댔다. 그는 당시의 모든 주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폭풍우의 태평양을 건너 표착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1564~1620)를 만난 그는 대화를 통해 세계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예수회와는 다른 개신교인 애덤스 일행의 방일(訪日) 목적은 무엇인가,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 요인은 어디 있는가, 희망봉 경유의 항로를 두고 왜 드넓은 대양을 건너서 왔는가 등을 물었다.
그러나 비슷한 무렵의 조선은 어땠을까? 그로부터 53년 후 조선 땅에 당도한 네덜란드의 하멜 일행을 만나 조선 국왕 효종이 던진 질문은 간단했다. “어디에서 무슨 목적으로 왔나?” 하멜의 답도 단답형이다. 조선은 이방인에게 무심했다. 본국 송환을 청원하는 하멜 일행에게 효종은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하멜이 파악하는 조선인의 세계 인식은 단순했다. 세계에는 12개의 나라가 있으며 동해 저편은 망망대해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세계관이다. 하멜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 나라가 다른 나라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은 세상의 변화, 살아 있는 정보와 지식에 무관심했다. 죽은 가치와 정체된 문명만을 사랑했다. 대륙의 눈치만 보고 해양의 가치를 외면했다.
문명의 자부심과 유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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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서구를 만날 실력, 그들로부터 학습할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 그들의 도전에 기꺼이 응전하려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문명의 자부심과 다른 문명도 기꺼이 수용하려는 유연성이었다.
1611년 봄 런던 상인들에게 흥미롭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편지가 날아든다, 윌리엄 애덤스라 불리던 영국 선원이 일본에서 보낸 편지에 그가 미지의 땅인 일본에서 10년 넘게 살며 쇼군의 궁성에서 가장 높은 신분에 올라 있다는 내용이었다.
윌리엄 애덤스는 영국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바다에 도전하며 항해사로 살다 일본에서 귀족으로 죽었다. 고국인 영국을 평생 그리면서도 일본 문화에 철저하게 적응하며 일본의 대외정책 수립에 중요한 조언을 한다. 일본 여인과 결혼했고 나중에는 미우라 안진(三浦按針: 미우라의 항해사)이라는 사무라이가 된다.
그는 처음 붕고라 불리던 현재의 큐슈 오이다겐(大分縣)의 해안에 표착(漂着)했다. 때는 1600년이다. 대서양을 건넜고, 마젤란 해협을 지났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 같은 환상적이지만 위험천만한 모험을 겪으며 남미대륙을 통과했다. 이어 태평양을 건너 암스테르담 출항 후 19개월 만에 일본에 왔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영국 항해사로 일본에 최초로 도달한 영국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발탁한 막부의 외교 고문이다. 태국을 방문한 첫 영국인, 유럽인 최초의 일본 사무라이다.
16세기 말 영국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인기를 모았던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였다. 선원들은 모험에 나서며 성공을 거두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들이 목표로 잡은 목적지의 하나가 극동, 일본이다. 포르투갈이 지키는 희망봉 항로, 스페인이 확보한 태평양 항로를 피해 제3의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노력은 처절했다. 강추위와 얼음, 그리고 유빙(流氷)이 떠다니는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다.
서양식 범선 건조에 성공하자 파격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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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거친 바다, 사나운 원주민, 괴혈병과 괴질, 바람과 파도, 선원 반란, 아사 직전까지 가는 단말마의 고통을 극복하며 태평양을 건넌다. 윌리엄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탐험 선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상선 ‘리푸데호’의 항해사로 참여했다.
1600년, 오랜 항해로 너덜너덜해진 배 한 척이 일본 붕고에 도착한다. 일본에 표착한 후 당시의 도쿠가와 막부를 위해 다방면에 걸쳐서 얼마나 실질적인 공헌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당시 도쿠가와 막부 실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에게 베푼 파격적인 대우에서 그 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도쿠가와의 명령으로 두 척의 서양식 범선 건조에 성공하자 봉토를 받고 영주의 대우를 받는 귀족 사무라이에 오른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미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 사람이 조총을 가지고 표착한 이래, 이들의 창의적인 기술 정보에 관심을 가진다. 도쿠가와 막부는 외국의 난파선이나 표착선 등의 해난 사고를 귀찮은 외교처리 문제로 여기지 않고 소중한 정보와 지식 습득의 기회로 삼았다.
윌리엄은 영국 켄트의 어촌 마을인 길링엄에서 태어나 12세 때부터 런던 템스 강변의 라임하우스에서 자랐다. 어려운 살림에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 하고 바다에 뜻을 두고 조선업자 니콜라스 디킨스의 견습생으로 항해와 조선술을 배웠다. 선박 건조보다 항해에 소질이 있었다.
1588년에 견습생 과정을 마치면서 해군에 입대했다.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아르마다 해전 발발 시점에는 ‘리처드 더필드호’를 지휘해 보급을 맡았다. 아르마다 해전 뒤 결혼해 런던 바르바리 상인조합에 취직한 뒤 10년간 북아프리카의 해안을 항해하면서 영국 양모(羊毛)를 수송했다. 35세 때 로테르담에서 인도 제도의 향로제도에 파견할 대규모 선단을 비밀리에 조직한다는 소문을 듣고 기회의 나라 네덜란드로 향한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와 가톨릭 국가 사람들은 이미 희망봉을 돌아 연안 항해를 통해 인도와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일본에 상륙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개신교 국가 사람에게 일본은 미답의 땅이었다. 호기심과 풍부한 기술을 갖춘 뱃사람인 윌리엄이 일본을 향한 모험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식을 두고 떠나는 괴로움도 그의 모험심과 호기심을 꺾을 수 없었다. 1598년 윌리엄은 어느덧 35세의 장년이었다.
1600년 4월 그가 탄 리푸데호는 분고우스키(豊後臼杵)의 쿠로시마(黑島)에 도달했다. 기력을 상실해 자력으로 상륙하지 못한 선원들은 우스키 성주가 보낸 조그만 배로 간신히 일본 땅을 밟았다. 일본 측은 배 안에 실렸던 대포와 화승총, 탄약과 같은 무기를 몰수한 다음 오사카 성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지시를 구했다.
5월 12일 실질적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는 처음 그들과 만난다. 예수회의 농간으로 리푸데호를 해적선이라 믿고 있던 이에야스였으나 사정을 듣고 나자 달라졌다. 그들의 노정과 항해 목적,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분쟁을 겁내지 않고 설명하는 윌리엄이 마음에 들어 오해를 풀었다. 잠시 선원들을 투옥했지만 집요하게 처형을 요구하는 선교사들을 묵살한 이에야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접견을 거듭한 끝에 이들을 석방토록 한 뒤 에도로 초청했다.
일행의 원래 출항 목적은 남미의 서안에 도착해 화물을 팔고 은으로 교역하는 일이었다. 이 미션이 실패할 경우 다음 과제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 일본으로 항해한 뒤 은을 확보하고 몰루카(향신료 제도)에서 향신료를 얻어 유럽으로 돌아올 작정이었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을 출발한 배는 괴혈병, 괴질, 남미 원주민의 습격 등의 고통을 겪는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할 무렵 다섯 척의 선단은 와해돼 한 척만 남는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본행을 결정한다. 다섯 척의 배 중 한 척만이 남아, 100명 중 24명만의 선원을 태우고 유령선처럼 일본에 도착했다. 그것도 6명은 거의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에도에서 그는 귀국을 청원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이에야스는 쌀과 봉급을 줘 위로하고 외국 사절과의 대면이나 외교 교섭에 있어서 통역을 맡기거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 기하학·수학·항해술 등의 지식을 이에야스 측근에게 가르친다.
하멜 일행은 잡초 뽑는 것이 역할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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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에는 120t 선박을 완성시킨다. 이에 만족한 이에야스는 귀국 만류 차원에서 윌리엄을 쇼군 알현이 가능한 250석의 하타모토(旗本)에 임명하고 칼을 차는 것을 허용했으며 영지(領地)도 하사한다. 그는 영국과 네덜란드 등과의 대외 협력 중재자로 나선다.
1653년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동인도회사 소속의 스페르베르 호는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 해안에 표착한다. 36명이 제주에 상륙한다. 이듬해 서울로 압송돼 훈련도감 소속으로 활약하다 전라도 강진과 여수의 병영에서 노역이나 잡무에 종사했다. 본국 송환을 거절하는 조선의 방침에 맞서 여러 번의 탈출을 시도한 끝에 표류 13년 만인 1663년 현종 7년 동료 7명과 탈출에 성공한다.
그들은 일본에서 조사를 받고 이듬해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조선이 그들에게 얻은 것은 별로 없다. [하멜표류기]란 보고서가 남아 당시 조선의 실정을 유럽인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록만 얻었을 뿐이다.
낯선 나라에서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신분으로 13년 28일을 보냈다. 배가 난파된 곳은 켈파르트라 불린 제주도였고 승무원은 64명, 대포는 30문, 선원 중 28명이 죽고 36명이 상륙했다. 하멜을 포함한 8명이 세 번째 시도 끝에 탈출했을 때는 총 생존자는 16명이었다. 탈출하지 못 한 사람은 남원에 3명, 순천에 3명, 여수에 2인 등 8명이었다. 탈출 뒤 일본의 고토에 상륙해 여러 조사를 받고 나가사키의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 보내진다. 이들 8명은 첫 일본 상륙이었다.
그들이 제주에 상륙했을 때 조선의 지휘관은 술 한 잔씩을 줬고 약 1시간 뒤에 갑작스러운 음식으로 탈 날 것을 우려해 죽을 줬다. 저녁에는 쌀밥을 줬다. 이들은 답례로 은잔에 레드와인을 따라 조선 관원들에게 돌렸다. 조선 관리들은 우호적이었다. 은잔도 돌려줬을 뿐 아니라 이들을 텐트까지 바래다줬다.
당시 제주 목사는 이원진으로,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나중에는 향연을 베풀어주기도 했다. 곧 일본으로 보낼 것이라고 말하는 등 조정의 답신을 자기 일인 양 함께 기다렸다. 하멜은 기독교인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이교도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들의 통역으로 나선 사람이 이들에 앞서 난파한 뒤 조선에 상륙한 3인 중 유일한 생존자인 벨테브레다. 그가 하멜과 만났을 때는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를 거의 잊고 있어서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한 달 정도 같이 지낸 뒤 다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효종을 알현했고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본행은 좌절했다. 이어 일행은 벨테브레의 훈련도감에 배속되기에 이른다.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말썽 소지가 있어 이들의 존재를 숨기던 조선 정부는 청나라와의 대외 마찰을 우려해 이들을 강진으로 보내고 나중에는 전라도 각지에 분산·배치한다. 이들로부터 바깥의 정보와 기술을 얻으려는 의도는 조선에 거의 없었던 듯하다.
조선 조정은 그저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만 중요시한 것 같았다. 사실 이들이 이후 한 일은 관가 뜰의 풀 뽑기, 화살 줍기 등 잡무가 고작이었다. 나머지는 생존을 위해 장사를 하거나 땔감을 구하는 일이었다. 점차로 중앙권력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던 이들 중 탈출의 염원을 안고 때를 기다리다 8명만이 탈출에 성공한다.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해 1년 정도 체류하면서 하멜은 표류기를 작성했다. 원래는 동인도회사에 밀린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일지인데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을 소개한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원본과는 다른 허구와 과장된 삽화가 가세하면서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일본이 서양을 품에 안아 들이는 자세는 조선과 천양지차였다. 1543년의 일이다.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의 철포(鐵砲)가 도래했다. 중국으로부터 표착한 포르투갈의 배는 일본에 큰 충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문명의 융합’이라는 자세로 수용한다. 그러나 이웃의 조선에게는 큰 재앙으로 발전한다. 포르투갈로부터 조총(鳥銃)을 입수한 일본인은 바로 복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실전에 사용한 것은 1575년의 일이다. 입수한 지 35년 전후다.
‘소중화의 자부심’에 젖어 스스로 벽을 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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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달랐다. 미우라 안진의 일본 표착과 하멜의 조선 표착을 비교해보면 너무나 명확하다. 하멜은 범죄자 취급을 받아 감시에서 놓여날 수 없었다. 청나라 사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숨겨야 하는 외교적 골칫덩이였다. 비슷한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이 너무도 달랐다. 조선의 외국인관(觀)은 이처럼 편협했다. 반면 일본은 자신들과 다른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발전시켰다. 물건과 사람을 보는 안목이 우리와 달랐던 것이다.
조선은 그러나 대항해 시대 유럽 해양문명과의 접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며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 했다. 소중화의 자부심에 젖어 스스로 벽을 쌓고 눈과 귀를 막았다. 기존의 편집된 세계가 지닌 가치에 함몰해 변화하는 세계에 문을 닫았다. 대륙에서 넘어온 진부한 가치의 노예로 전락해 변화하는 세상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섬나라인 일본의 사정은 달랐다. 모든 문명은 바다를 통해 건너왔다. 일본에서 바다는 문명의 소통로였던 셈이다. 섬나라는 고독함과 안전함의 두 가지 이미지를 지닌다. 외부의 정보에 민감한 체제를 가진다.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바다 건너의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일방적인 정보 편식(偏食)으로 하나의 가치나 정보만을 믿는 폐단은 없었다.
표류하는 조선, 바다 포기한 중국, 대양 건너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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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는 쇄국령을 내리고 대외 접촉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 네덜란드 상관(商館)을 열고 막부가 대외 무역을 독점하는 한편 외국선이 입항할 때마다 풍설서(風說書)라는 종합정보 보고서를 막부에 제출토록 했다.
대양의 바람과 파도를 넘어 동아시아에 도착한 서구의 해양민족은 도착한 국가의 ‘그릇 크기’에 따라 쓰임새가 갈렸다. 시대적인 시간차는 존재하지만 조선에 표착한 하멜은 13년 넘게 잡역에 종사하고 붙잡혔다가 일본으로 도망쳤다. 조선은 겨우 그의 기록, [하멜표류기]로 유럽에 이름을 알린다.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미 활약하고 있던 일본 땅에 도착한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는 일본에서 서양식 범선을 건조하고 포르투갈에 의해 잘못 알려졌던 일본인의 유럽 인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이베리아 반도에 가톨릭 국가 말고도 개신교 국가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나중에 네덜란드가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한 유일의 공식 교역국이 되는 계기다. 종교와 무역의 분리 대응원칙도 이로부터 발전한다.
하멜이 조선에 표류하던 시절 조선 국왕 효종은 국법을 언급하며 하멜 일행의 송환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일본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윌리엄 애덤스 일행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우한다.
양국 지도자가 갖고 있던 세계관의 차이에서 양국의 근세사는 크게 갈리고 만다. 이념 지향적이던 효종은 국법을 언급하며 하멜의 송환을 저지했다. 청나라 눈치를 봤던 것이다. 하멜 일행의 전략적 가치에는 아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윌리엄 애덤스 일행을 활용하며 민첩하게 세계의 동향을 파악했다. 아울러 이들에게 서양식 범선을 제작토록 하는 등 다양하게 자신과 다른 세계의 문명을 수용했다.
눈먼 장님을 자처한 조선의 쇄국과 세계에 귀를 활짝 열었던 일본은 여러 분야에서 격차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 나라의 수준에서 또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일본의 지도자는 질문과 호기심의 크기에서 조선의 국왕과 차원이 달랐다.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쟁을 겪으면서도 서양의 이질문명을 수용하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을 두려워하며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일본은 세상의 변화와 흐름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모시는 나라도, 특정한 이데올로기도 없었다.
대항해 시대 동아시아의 인문적 지형(地形)은 분명했다. 표류하는 조선, 바다를 포기한 중국, 대양을 건너간 일본이다. 일본은 태평양을 건너기도 했고 그들을 찾아온 미지의 문명을 한 자락이라도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이해하고, 또 품으로 떠안았다. 그러면서 점차 나 아닌 바깥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일본 문명의 ‘심성’은 유연하며 물 흐르듯 했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독서회 [고전만독]을 이끌고 있으며,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주요 관심 사항은 대항해시대 문명의 소통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