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historia)란 무엇인가?
“아테네 사람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네 사람들이 벌인 전쟁에 관해 썼다. 두 쪽이 서로 전쟁을 시작하자, 이 전쟁은 커져서 앞서 일어났던 전쟁보다 말할 값어치가 훨씬 더 높아지리라는 기대감(?) 때문에 곧바로 쓰기 시작했다. 증거는 충분했다(tekmairomenos).
힘이 가장 크게 부풀어 오른 상태에서 두 쪽 모두 철저한 준비를 하고 난 다음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헬라스의 다른 도시들이 어떤 도시는 곧바로, 어떤 도시는 이리저리 잰 다음, 양쪽으로 각각 모둠지어 가는 것도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움직임은 헬라스 사람들과 다른 말을 쓰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도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말하자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나는 이 전쟁에 앞서 일어났던 일들과 훨씬 더 옛날에 일어난 일들은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훤히 찾아낼(heurein) 수는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멀리 올라가 살펴본 다음(skopounti) 믿을 수 있겠다 싶은 증거로부터 따져볼 때, 전쟁을 잣대로 삼아도 그렇고, 다른 일들에 비추어보아서도 그렇고, 그것들은 이만큼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투키디데스, ‘역사’ 1.1)
그리스 거의 모든 지역을 휩쓸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 가운데 일부를 기록한 투키디데스의 머리말이다.
그는 이 전쟁이 지금까지 일어났던 전쟁들 가운데 가장 큰 전쟁이라고 믿었다. 거대한 동방의 제국인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전쟁(기원전 490년)도, 대규모 함대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트로이아 땅을 침략하여 벌였던 전쟁(기원전 13세기)도 이 전쟁에 견주면 별것 아니었다는 확신이다.
그는 믿을 만한 자료들과 증언들(akoas, 1.20)을 찾아내(heurein) 탄탄한 증거로 삼고,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그럴 법한 그림을 그려내(eikazein, 1.9)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가는 가운데 믿음을 굳게 다져나갔다.
자신은 사실을 기록하였기에, 허구를 만들어내는 시인들과는 전혀 다르다며, 시인들과 자기 사이에 또렷한 금을 긋는다. 그어진 금 너머엔 뮈토스 냄새가 나는 한갓 꾸며낸 이야기(mythos)가 있다. 하지만 자기는 진리를 찾아가며 글을 썼다고 한다. 이른바 역사(historia)를 한단다.
여기서 ‘히스토리아’는 ‘본다’는 말에서 자라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 직접 보길 원하며, 직접 보기 위해 부지런히 현장을 찾아다닌다.
아니면 직접 본 사람에게서 듣고자 하거나, 직접 본 사람에게 직접 들은 사람을 이리저리 찾아다닌다. 이 모든 노력과, 그 노력 끝에 다다른 앎과 깨달음이 바로 히스토리아다.
직접 본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는 믿음, 설득력 있다.
철학자들이 이성(logos)과 대화의 능력으로 따져 나가며 진리를 찾겠다고 외칠 때, 그 외침이 왠지 막막하고 붕 떠 있거나 텅 빈 것 같다면, 그 허전한 틈새로 역사의 상식은 스며든다.
‘내가 직접 보고 말하는 것인데, 도대체 당신은 무슨 근거로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것인가?’ 감각이란 사태를 왜곡시킬 뿐이라는 철학적인 반박, 왠지 트집 같을 때, 히스토리아는 더욱 단단하게 사실을 밝히며 진리를 드러내는 노력으로 값을 갖는 법이다. 시인들의 노래와 신화에 비하면 더더욱 그렇겠다.
-시인은 뮤즈를 부른다, 진실을 위해-
투키디데스는 히스토리아의 뜻에 충실하게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은 그래서 믿을 만한 값을 갖는다. 그렇다면 그가 시인을 진실의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는 것은 히스토리아가 갖는 힘에서 비롯된다.
호메로스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기원전 750년 안팎으로 서구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썼다는 전설의 시인이다. ‘일리아스’의 이야기는 그가 살던 때로부터 약 600년 가까이를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호메로스가 600년 전 이야기를 한다고? 트로이아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고, 거기에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등 뛰어난 영웅들이 참전하여 전투를 벌였다고 하자.
그런데 호메로스가 거기에 간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본 것도 아닌데, 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는 인간들의 전쟁 속에 끼어들어 별짓 다한 제우스와 헤라 등 수많은 신들의 움직임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의 노래는 정말 사실일까?
그가 혼자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을 것이고, 그렇게 전설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나긴 소문의 출발점에는 진짜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투키디데스 말대로 그리스 사람들이 처음으로 연합군을 짜서 멀리 배를 타고 나가 다른 땅에서 10년간 전쟁을 벌였다면(1.3), 이는 그리스 사람들에겐 잊지 못할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에게로 가보자. 그들은 목숨을 건 전쟁을 10년간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전쟁의 기억은 그들에겐 그 무엇보다도 진하게 새겨져 있다. 그들을 기다린 고향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기억은 함께할 만하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으레 전쟁이 이야기되고 또 이야기되었겠다. 연회장의 밝고 유쾌하며 얼큰한 분위기 속에서 있던 사실보다는 부풀려진다. 그러나 직접 전쟁을 겪어야 했던 사람에게 그 부풀림은 가책거리가 되질 않으며, 듣는 사람들에겐 시빗거리가 되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서 있던 사람들의 주관적인 느낌은 객관적인 서술과 묘사를 훨씬 넘어선 곳에서 생생한 진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냉정한 서술은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겠으나, 오히려 주관적인 느낌의 진실을 잔혹하게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 사라져감에 따라, 후손들의 상상 속에서 사실의 소문은 더욱 부풀어 간다.
더욱 과감하게 전설로 무르익는다. 전쟁의 시점으로부터 600년쯤 흐른 후라면? 마침내 찬란한 신화가 된다.
거기에서 창칼깨나 휘둘렀던 사람들은 모두 영웅이 되고 신들의 자손이 된다.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엔 신들의 입김과 기상이 배어 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는 과연 사실인가? 아니면 황당한 허구인가? 생각해보라. 아킬레우스의 투구에 반사되는 햇빛은 그냥 그것이 아니다. 패배의 공포와 죽음의 두려움이 밀려오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우뚝 선 그의 모습에서 뿜어나는 빛은 신들이 쏘아 올리는 구원의 신호탄이다.
신의 가호를 또렷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징표다. 사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 신화는 그렇게 그리스 사람들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역사요, 진실로 간직된다. 이를 허구라 말하는가? 거짓이라 말하는가?
호메로스는 이렇게 외친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를. 이는 무수한 고통을 아카이아인들에게 주었고,/ 수많은 굳센 목숨을 하데스에게 보냈으며/ 영웅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로/ 만들고 있었지요. 그리고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었나이다.”(‘일리아스’ 1.1-5) 그의 기원에는 이런 울림이 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뮤즈(Mousa) 여신을 부르고 있다. 이제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와 최고의 권좌를 누리는 제우스의 따님이신 뮤즈 여신들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나를 통해서. 나는 보지 못했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다 보셨으니.’
“말씀하소서 이제 나에게, 뮤즈들이시여, 올림포스에 살고 계시는 여신들이여,/ 당신들은 여신들이라 어디든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나/ 우리들은 소문만 들을 뿐,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그 누가 다나오스인들의 지휘관이며 사령관이었는지./ 그 무리를 내가 이야기할 수도 이름 부를 수도 없나이다./ 설령 내게 열 개의 혀와 열 개의 입이 있다 할지라도/ 지칠 줄 모르는 목소리와 강철 같은 심장이 있다 할지라도/ 만일 올림포스의 뮤즈들께서, 아이기스를 가진 제우스의/ 따님들께서 일리오스로 갔던 이들 모두를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하여 이제 함선들의 지휘관과 함선들을 모조리 말하겠나이다.”(2.484-493) 진실을 보증하기 위하여 시인은 뮤즈를 부르는 것이다.
-신화(mythos)와 역사(historia) 사이, 거짓과 진리 사이-
진리란 무엇이고,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리스에서 이것은 감추어진 것,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 잊혀진 것을 드러내는(a-) 아레테이아라는 말로 매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면” 진리라 했다.
거꾸로, 없는 것을 있다고,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면 거짓(pseudos)이 된다는 말이다. 진리와 거짓 사이.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것을 있다고, 없는 것은 없다고 밝혀줄 때 진리며, 그렇지 못할 때 거짓이기에 그 사이의 금은 아주 뚜렷하다.
투키디데스는 두 쪽으로 선명하게 쪼개진 마당 안에 신화와 역사를 떼어놓아 자리를 잡아주었다. 하지만 신화는 그렇게 간단하게 거짓으로 짝지어지진 않을 것 같다.
역사가 쉽게 진리와 짝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투키디데스는 트로이아 전쟁을 포장하고 있는 신화의 껍데기를 벗겨내어 전쟁의 진상을 역사의 이름으로 밝혀내겠다고 하겠지만, 호메로스는 인간들의 사건 속에 깃들어 있어 역동하는 초인간적인 힘을 신화의 이름으로 밝혀낸 것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화라는 것이 사실 속에 감추어진 어떤 소중한 비밀을 드러내는 반면, 역사라는 이름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뭔가 중요한 것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덮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