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 담론방 > 자유게시판


 
작성일 : 22-10-03 10:22
취함의 미학
 글쓴이 : 하얀민들레
 

취함의 미학

“건배(乾杯)!” 우리는 술자리에서 무심코 이 말을 외친다. 콩글리시인 ‘원샷(one shot)’도 있다. 요즘은 잔을 꺾어 마시기도 하지만 한때는 시원하게 단숨에 잔을 비우지 않으면 눈총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인류 사회에서 술을 공유하지 않는 것, 즉 내민 술잔을 거부하는 것은 심각한 거절이나 적대 행위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왜 인류는 오래전부터 술을 마셔왔으며 건강에 해롭다고 여겨지는 술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못 끊게 되는 걸까.

『취함의 미학(Drunk)』에는 술을 비롯한 취성(醉性)물질의 역사와 의미가 총망라돼 있다. 인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술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냥 이 책을 열고 술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기만 하면 된다. 술을 생산하지 않는 문화권에선 카바, 환각제가 가미된 담배, 대마초 같은 취성물질이 사용됐다.

주제가 술이라서 그런지 흥미롭기도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지은이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교수의 박학다식과 깊이 있는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단순한 ‘술 예찬론’이 아니다. “술은 문명 창조의 기폭제였다”는 식의 어찌 보면 다소 엉뚱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주장을 학술적으로 너무나도 강력하게 뒷받침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역사학·고고학·인류학·인지과학·사회심리학·유전학·문학·생물학·신경과학·화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잘 엮어 고급술처럼 빚은 역작 중의 역작이다.

‘포도주 저장고의 수사들’이라는 제목의 그림. 오스트리아 화가 요제프 하이어의 1873년 작품이다. [사진 고반출판사]

인류는 으깬 곡물을 물에 담가 두면 그 혼합물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하고 그것을 마시면 취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됐다. 이것이 술 생산의 기원에 대한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설명이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 술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은이는 ‘빵보다 맥주가 먼저(beer before bread)’라는 이론에 기울어져 있다. 술이 제공되는 대대적인 잔치는 농업이 정착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농경이 시작되기 전 수렵채취 시대에도 세계 전역에서 잔치, 제의, 주연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대규모 모임이 열렸다는 비슷한 증거들이 실제로 많이 남아 있다.

술은 우리 뇌의 이성(理性) 중심지인 전전두엽피질(PFC)을 손상시킨다. 따라서 술을 마시면 이성이 망가지고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금지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인류는 지금껏 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은이는 “취성물질은 인간에게 적어도 일시적으로 더 창의적이고 문화적이며 공공적이게 함으로써 즉, 인간의 유인원 본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곤충처럼 살 수 있도록 했다”며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진정으로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점점 더 많은 수의 동식물을 길들이며 새로운 기술을 축적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초대형 동물로 만들어 준 문명을 창조하게 했던 스파크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지금에 와서는 술의 역기능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 순기능 또한 많다. 술은 이성의 힘을 잠시 내려놓게 하고 창의적 통찰력을 높이는 데 실제로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의 인류학 이론은 술을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보기도 한다. 라틴어에는 ‘술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라는 말이 있다. ‘취중진담’과 비슷한 말이다. 술 취한 상태에서 하는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교활하고 통제되고 계산적인 자아에서 나오는 의사소통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중요한 친목행사, 사업 협상 및 종교의식에서 술에 취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무로 여겨진다. 물리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악수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함께 취함으로써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지적으로 무장 해제를 할 수 있게 된다. 헨리 키신저는 덩샤오핑에게 “우리가 마오타이주를 충분히 마시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예부터 성대한 술자리는 전사와 군주를 결속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술을 주고받는 것은 충성심과 헌신의 강력한 상징으로 작용했다. ‘엑스터시(ecstasy)’라는 말은 ‘자기 바깥에 서 있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취함으로써 자신을 버리는 것은 종종 어떤 사람이 집단과 완전히 동일시되거나 집단에 흡수되었다는 문화적 신호로 작용한다.

모처럼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술 한잔도 나누지 않고 밥만 먹고 헤어진다는 게 가능할까. 지금은 회식 문화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가벼운 음주도 없이 식사만으로 파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썩 건강해 보이는 ‘공동체’는 아닌 듯싶다.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현대인이라고 하더라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몸에 밴 오랜 전통과 습관을 털어내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술을 단순히 ‘진화의 실수’로 치부하기엔 그 함의가 너무나 크다. 이 책은 여러모로 인류 사회의 본성과 문명의 진화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저자 :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 밀알가입은 hmwiwon@gmail.com (개인신상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 군자금계좌: 농협 356-0719-4623-83안정주
※ 통합경전계좌 : 국민은행 901-6767-9263노영균sjm5505@hanmail.net
※ 투자금 계좌: 하나은행 654-910335-99107 안정주

하얀민들레 22-10-03 10:22
 
“건배(乾杯)!” 우리는 술자리에서 무심코 이 말을 외친다. 콩글리시인 ‘원샷(one shot)’도 있다. 요즘은 잔을 꺾어 마시기도 하지만 한때는 시원하게 단숨에 잔을 비우지 않으면 눈총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하얀민들레 22-10-03 10:23
 
‘빵보다 맥주가 먼저(beer before bread)’라는 이론에 기울어져 있다. 술이 제공되는 대대적인 잔치는 농업이 정착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얀민들레 22-10-03 10:24
 
최근의 인류학 이론은 술을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보기도 한다. 라틴어에는 ‘술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라는 말이 있다.
하얀민들레 22-10-03 10:25
 
취함으로써 자신을 버리는 것은 종종 어떤 사람이 집단과 완전히 동일시되거나 집단에 흡수되었다는 문화적 신호로 작용한다.
겨울 22-10-04 08:11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인류 사회에서 술을 공유하지 않는 것, 즉 내민 술잔을 거부하는 것은 심각한 거절이나 적대 행위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겨울 22-10-04 08:11
 
술을 생산하지 않는 문화권에선 카바, 환각제가 가미된 담배, 대마초 같은 취성물질이 사용됐다.
겨울 22-10-04 08:12
 
인류는 으깬 곡물을 물에 담가 두면 그 혼합물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하고 그것을 마시면 취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됐다.
겨울 22-10-04 08:13
 
술은 우리 뇌의 이성(理性) 중심지인 전전두엽피질(PFC)을 손상시킨다. 따라서 술을 마시면 이성이 망가지고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금지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인류는 지금껏 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겨울 22-10-04 08:15
 
술을 단순히 ‘진화의 실수’로 치부하기엔 그 함의가 너무나 크다. 이 책은 여러모로 인류 사회의 본성과 문명의 진화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늘배움 22-10-04 11:30
 
왜 인류는 오래전부터 술을 마셔왔으며 건강에 해롭다고 여겨지는 술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못 끊게 되는 걸까.
늘배움 22-10-04 11:31
 
주제가 술이라서 그런지 흥미롭기도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지은이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교수의 박학다식과 깊이 있는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늘배움 22-10-04 11:32
 
지은이는 ‘빵보다 맥주가 먼저(beer before bread)’라는 이론에 기울어져 있다. 술이 제공되는 대대적인 잔치는 농업이 정착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늘배움 22-10-04 11:34
 
술은 이성의 힘을 잠시 내려놓게 하고 창의적 통찰력을 높이는 데 실제로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늘배움 22-10-04 11:35
 
예부터 성대한 술자리는 전사와 군주를 결속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술을 주고받는 것은 충성심과 헌신의 강력한 상징으로 작용했다.
산백초 22-10-05 11:31
 
역사학·고고학·인류학·인지과학·사회심리학·유전학·문학·생물학·신경과학·화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잘 엮어 고급술처럼 빚은 역작 중의 역작이다.
산백초 22-10-05 11:31
 
농경이 시작되기 전 수렵채취 시대에도 세계 전역에서 잔치, 제의, 주연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대규모 모임이 열렸다는 비슷한 증거들이 실제로 많이 남아 있다.
산백초 22-10-05 11:32
 
술 취한 상태에서 하는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교활하고 통제되고 계산적인 자아에서 나오는 의사소통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산백초 22-10-05 11:33
 
헨리 키신저는 덩샤오핑에게 “우리가 마오타이주를 충분히 마시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산백초 22-10-05 11:33
 
아무리 현대인이라고 하더라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몸에 밴 오랜 전통과 습관을 털어내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Total 9,907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공지 1• 3 • 5 프로젝트 통장을 드디어 공개합니다. (70) 혁명위원회 09-12
공지 진법일기 70- 1.3.5 프로젝트가 의미하는것은 무엇인가? (61) 이순신 09-19
공지 혁명을 하면서~ <아테네의 지성! 아스파시아와 페리클레스> (12) 현포 07-31
공지 히틀러, 시진핑, 그리고 트럼프 (15) FirstStep 06-23
공지 <한 지경 넘어야 하리니> (21) 고미기 07-28
공지 트럼프, 폼페이오, 볼턴을 다루는 방법들 (32) 봉평메밀꽃 07-18
공지 판소리의 대표적 유파로 '동편제'와 '서편제'가 있습니다. (27) 흰두루미 06-20
공지 소가 나간다3 <결結> (24) 아사달 03-20
9874 최수철 칼럼(기독교의 성경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사랑"이라고 한다. (20) 사막여우 10-06
9873 취함의 미학 (19) 하얀민들레 10-03
9872 노벨상 밥 먹듯 타던 일본의 미래가 어두운 이유 (18) 빨간벽돌 09-26
9871 게코노믹스 - 거대시장을 개척하라 (3조원에 달하는 일본 무알콜 시장) (17) 빨간벽돌 09-13
9870 최수철 칼럼 (할아버지의 눈물) (21) 사막여우 09-07
9869 로드러너(땅 뻐꾸기) (13) 정수리헬기장 09-06
9868 최수철 칼럼 (독일과 한국의 처참한 비교) (20) 사막여우 09-01
9867 실패와 쇼크의 30년(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20) 하얀민들레 08-31
9866 인공지능 험난한 여정(2) (21) 빨간벽돌 08-30
9865 포노사피엔스 (Phono Sapiens) (20) 빨간벽돌 08-25
9864 광고계와 현실세계 휘어잡는 가상인간 (20) 빨간벽돌 08-18
9863 선택할 자유 (20) 하얀민들레 08-16
9862 인공지능 험난한 여정(1) (20) 빨간벽돌 08-09
9861 클라우드 국가가 온다. (22) 하얀민들레 08-04
9860 호모이코노미쿠스 (18) 하얀민들레 08-03
9859 이국종 교수를 떠나게 만든 대한민국 현실 (13) 빨간벽돌 07-25
9858 아! 홍콩 3년만에 모든 것을 무너뜨리다. (19) 빨간벽돌 06-30
9857 마음의 법칙 (19) 하얀민들레 06-17
9856 악인의 탄생 (18) 하얀민들레 06-09
9855 선생님과 아버지 (12) 빨간벽돌 05-02
9854 뻐꾸기 (8) 정수리헬기장 04-29
9853 뱀잡이수리 (6) 정수리헬기장 04-16
9852 한글이긴 한데.. (7) 빨간벽돌 04-08
9851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20) 하얀민들레 04-08
9850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14) 하얀민들레 03-31
9849 민스크 협정과 우크라이나 침공 (21) FirstStep 03-29
9848 "좋은 의사보다 좋은 상사가 건강에 더 중요" (18) FirstStep 03-20
9847 진인(眞人)이 나와서 포교할 때 (12) 현포 03-13
9846 찰리멍거의 말들 (26) 하얀민들레 03-10
9845 요즘애들 (18) 하얀민들레 02-23
9844 [퍼온글] 긍정적 동료를 통한 긍정적 Spill-over 효과 Vs. 부정적 동료를 통한 부정적 Ripple effect (19) FirstStep 01-29
9843 [선우정 칼럼] 남한 땅 팔면 일본 열도 살 수 있게 해준 文 대통령 (20) 빨간벽돌 01-07
9842 개복치 (10) 정수리헬기장 12-31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