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乾杯)!” 우리는 술자리에서 무심코 이 말을 외친다. 콩글리시인 ‘원샷(one shot)’도 있다. 요즘은 잔을 꺾어 마시기도 하지만 한때는 시원하게 단숨에 잔을 비우지 않으면 눈총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인류 사회에서 술을 공유하지 않는 것, 즉 내민 술잔을 거부하는 것은 심각한 거절이나 적대 행위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왜 인류는 오래전부터 술을 마셔왔으며 건강에 해롭다고 여겨지는 술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못 끊게 되는 걸까.
『취함의 미학(Drunk)』에는 술을 비롯한 취성(醉性)물질의 역사와 의미가 총망라돼 있다. 인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술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냥 이 책을 열고 술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기만 하면 된다. 술을 생산하지 않는 문화권에선 카바, 환각제가 가미된 담배, 대마초 같은 취성물질이 사용됐다.
주제가 술이라서 그런지 흥미롭기도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지은이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교수의 박학다식과 깊이 있는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단순한 ‘술 예찬론’이 아니다. “술은 문명 창조의 기폭제였다”는 식의 어찌 보면 다소 엉뚱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주장을 학술적으로 너무나도 강력하게 뒷받침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역사학·고고학·인류학·인지과학·사회심리학·유전학·문학·생물학·신경과학·화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잘 엮어 고급술처럼 빚은 역작 중의 역작이다.
인류는 으깬 곡물을 물에 담가 두면 그 혼합물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하고 그것을 마시면 취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됐다. 이것이 술 생산의 기원에 대한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설명이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 술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은이는 ‘빵보다 맥주가 먼저(beer before bread)’라는 이론에 기울어져 있다. 술이 제공되는 대대적인 잔치는 농업이 정착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농경이 시작되기 전 수렵채취 시대에도 세계 전역에서 잔치, 제의, 주연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대규모 모임이 열렸다는 비슷한 증거들이 실제로 많이 남아 있다.
술은 우리 뇌의 이성(理性) 중심지인 전전두엽피질(PFC)을 손상시킨다. 따라서 술을 마시면 이성이 망가지고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금지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인류는 지금껏 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은이는 “취성물질은 인간에게 적어도 일시적으로 더 창의적이고 문화적이며 공공적이게 함으로써 즉, 인간의 유인원 본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곤충처럼 살 수 있도록 했다”며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진정으로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점점 더 많은 수의 동식물을 길들이며 새로운 기술을 축적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초대형 동물로 만들어 준 문명을 창조하게 했던 스파크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지금에 와서는 술의 역기능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 순기능 또한 많다. 술은 이성의 힘을 잠시 내려놓게 하고 창의적 통찰력을 높이는 데 실제로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의 인류학 이론은 술을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보기도 한다. 라틴어에는 ‘술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라는 말이 있다. ‘취중진담’과 비슷한 말이다. 술 취한 상태에서 하는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교활하고 통제되고 계산적인 자아에서 나오는 의사소통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중요한 친목행사, 사업 협상 및 종교의식에서 술에 취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무로 여겨진다. 물리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악수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함께 취함으로써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지적으로 무장 해제를 할 수 있게 된다. 헨리 키신저는 덩샤오핑에게 “우리가 마오타이주를 충분히 마시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예부터 성대한 술자리는 전사와 군주를 결속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술을 주고받는 것은 충성심과 헌신의 강력한 상징으로 작용했다. ‘엑스터시(ecstasy)’라는 말은 ‘자기 바깥에 서 있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취함으로써 자신을 버리는 것은 종종 어떤 사람이 집단과 완전히 동일시되거나 집단에 흡수되었다는 문화적 신호로 작용한다.
모처럼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술 한잔도 나누지 않고 밥만 먹고 헤어진다는 게 가능할까. 지금은 회식 문화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가벼운 음주도 없이 식사만으로 파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썩 건강해 보이는 ‘공동체’는 아닌 듯싶다.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현대인이라고 하더라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몸에 밴 오랜 전통과 습관을 털어내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술을 단순히 ‘진화의 실수’로 치부하기엔 그 함의가 너무나 크다. 이 책은 여러모로 인류 사회의 본성과 문명의 진화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저자 :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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