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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2-26 23:02
한국인 정체성 혼란과 한반도 지정학 , 미국의 한반도 정책 동인: 두려움(Fear)
 글쓴이 : 현포
 



한국인 정체성 혼란과 한반도 지정학

오늘날 국가안보 측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많은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의 국익이 아니고 주변국의 국익을 위해 노력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MIT 공대 석좌교수인 노암 촘스키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처럼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여당 및 야당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지도자들이 국가안보는 강대국에 의존한 상태에서 당리당략 차원에서 국가안보 문제를 접근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77년에 발간한 "The Reluctancy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이란 제목의 University of Virginia 대학 박사학위 논문(이 책은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었다.)에서 Matray, James Irving는 이처럼 주장했다.

문제는 한반도가 미국, 중국, 일본 및 소련이란 주변 4강의 이익이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 지역이란 사실이다. 이들 국가의 경우 한국인들의 여론이 자국에 유리한 방향이 되도록 적극 노력했다.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이 국익이 아니고 주변국 이익을 대변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남한 지역에서 미국은 한국인들을 반공사상으로 무장시키고자 노력했다. 물론 북한 지역에서 소련은 반미사상으로 무장시키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대립되는 이념으로 인해 6.25 전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미국의 많은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문제는 해방 직후 대부분 한국인들이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를 신봉했다는 사실이었다. 해방 이후 여론 조사에 따르면 남한의 한국인 가운데 80% 정도가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를 지지했다고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미국은 이 같은 한국인들을 반공사상으로 무장시키고자 노력했다. 미국 자료에 따르면 그 와중에서 10만 이상의 한국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6.25 전쟁을 통해 한국인들이 철저한 반공을 부르짖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이 한국사회를 반공국가로 만들기 위한 노력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에 미 군사고문관으로 일했던 하우스만 대위의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들을 반공사상으로 무장시킨다는 차원에서 미국이 착안한 것이 친일파들의 대거 기용이였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해방 이후 하지 중장의 친일파 기용이 급조된 성격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아니었다. 이미 1943년 미국은 한반도를 점령한 이후 일제 치하에서 일했던 한국인과 일본인을 이용하여 자신의 점령 지역을 통치해야 할 것으로 구상했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다. 아니 대부분 젊은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있는 듯 보인다.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해방 이후 친일파가 득세하게 된 것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해방 얼마 전 조선총독의 도움으로 여운영을 중심으로 전국에 100여개의 인민위원회가 생겼으며, 1945년 9월 초순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들 조직이 조선총독부 중심의 한반도 행정 조직을 인수하여 어느 정도 잘 운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후 한반도에 진주한 하지 중장을 포함하여 미국인들은 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 미국은 자신의 정책을 지원해줄 정당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저술한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제목의 책을 포면 이 같은 미국의 노력으로 출범한 정당이 한국민주당(KDP)이었다고 한다. 인촌 김성수 중심의 한국민주당은 지주, 재벌, 지식인을 기반으로 했는데 이들 가운데에는 민족주의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일반적인 성향은 친일파였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은 조선의 행정 조직을 소위 말하는 친일파들로 체웠다. 당시 이 같은 경향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는 나중에 한국군의 근간을 이룬 군사영어학교 1기생의 신분을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미 해병소장 출신으로서 오하이오 주립대학 사학과 교수였던 밀레는 "Captain James H. Hausman and the formation of the Korean Army, 1945-1950"란 제목의 논문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생 110명 가운데 108명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78명이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13명이 참모총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군사영어학교 1기생 가운데 일본군 출신이 절대 다수로 많았던 것은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군사적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측면도 있지만 광복군과 같은 독립군 출신과 비교하여 반공의식이 투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같은 미국의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와 접하고 있던 모든 국가에 적용되었다. 베트남은 또 다른 경우였다.                        

"Asia's Unknown Uprisings Volume 1: South Korean Social Movements in the 20th Century"란 제목의 책을 보면 베트남 지도자 호지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여 투쟁하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호지명이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전후 미국은 호지명을 적대시했다. 북한 김일성 또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공조하여 일했다고 한다. 전후 미국의 정책에서 반공이 매우 중요해지면서 이들이 갑자기 미국의 적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친일파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국가나 국가안보에 관한 국민의 인식은 국익을 중심으로 일치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분열되어 있다고 한다. 본 블로그에 올린 많은 글에서 필자가 주장한 바처럼 한국인들은 국가안보 관련 기본적인 개념도 무시한 채, 기본적인 사실 왜곡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인 주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분명히 말해 이들의 행위는 노암 촘스키가 말한 바처럼 국익이 아니고 특정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은 한반도가 4강의 이익이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 지역이란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국가안보를 강대국에 의존해온 결과였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로 몰려 남한 지역에서 10만 이상의 양민이 학살되었으며, 6.25 전쟁을 통해 많은 양만이 죽었던 것도 이 같은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유지해온 관행을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불행을 방지하고자 하는 경우 한국인들은 국가안보 문제를 국익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거짓 자료에 입각하여 국민을 기만하는 사람들을 엄중 처벌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 동인: 두려움(Fear)

본 블로그에 올린 여러 글에서 필자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일관성이 있는 이유를 언급한 바 있다. 한편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관한 책의 저술을 위해 노력했다.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한 1941년 12월 8일 이후 70여 년 동안 한미관계 측면에서 있었던 주요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는 변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최근 필자는 나름의 변수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두려움(Fear)이란 요인이었다. 지난 70여 년 동안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두려움 해소 차원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아태지역 질서 유지 측면에서 한반도 전체가 적대 세력의 수중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반도에서 미국이 느끼는 두려움은 한반도 전체가 적대 세력의 수중으로 들어갈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한 1941년 12월 7일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 재차 관심을 표명했다. 상해임시정부를 부인한 반면 한반도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 진주한 하지는 인민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이란 남한 내부의 기존 기구를 불법으로 매도한 상태에서 친일파 중심의 행정 조직을 정착시켰다. 남한 지역을 반공으로 무장한 집단으로 변모시켰다. 1949년 6월 말경에는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유엔군을 편성하여 한반도 전쟁에 개입했다. 1950년 9월 8일 투르먼은 맥아더의 북진을 허용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밀리자 트루먼의 후임자인 아이젠하워는 정전협정을 추구했다.

1952년 이승만은 부산 정치파동을 초래했다. 불법적인 방식으로 헌법을 바꾼 후 대통령이 되었다. 이 같은 이승만의 행위를 미국이 용인했다. 1953년 이승만은 한미동맹 체결을 주장하며 북진통일을 언급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넘겨주는 경우 한미동맹을 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종전 이후 미국은 한국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경제 발전을 등한시하는 이승만을 매우 싫어했다. 3.15 부정선거의 여파로 시위가 고조되자 미국은 이승만의 하야를 종용했다. 그후 장면 정부가 들어섰다. 장면 정부 1년 기간 내내 시위가 고조되었다. 이 같은 장면 정부를 미국은 매우 싫어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는 미군의 작전통제권을 받고 있던 한국군 일부를 동원했다. 박정희는 경제 부흥을 주장했다.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미국이 사전에 감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미국은 박정희의 행동을 관망했다. 박정희가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반환하기로 결정한 직후 미국은 박정희를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1969년에는 닉슨독트린의 여파로 미 7사단을 철수시켰다. 유신체제가 선포된 1972년 이전까지 미국은 박정희를 매우 좋아했다. 1977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카터는 인권을 외치며 박정희 정부와 갈등을 보였다.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1979년 말경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취소했다. 1979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 12월 12일에는 전두환 소장이 군권을 장악했다.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이 같은 민주화 운동에 대항하여 미국은 전두환을 적극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1980년 8월경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을 보며 1980년대 내내 작전통제권을 거론하며 학생들이 반미 시위를 벌였다. 주한미군 철수를 외쳤다. 그 와중에서 1987년 전두환은 재차 집권을 추구했다. 이 같은 집권 의도에 대항하여 미국은 직선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를 공약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한편 1987년 미국은 노태우 후보에게 작전통제권 전환을 대선 공약으로 발표하도록 만들었다. 작전통제권 전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는 작전통제권 전환 목적으로 취임과 동시에 818 국방계획을 시작했다. 1992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작전통제권 전환을 추진했다. 그런데 1992년 5월 이후 미국이 작전통제권 전환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991년 12월에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이 완벽히 종식되었다.

지금까지 논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부터 냉전이 해체되기 이전까지 한미관계 측면에서의 주요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요인은 무엇일까? 이는 두려움(Fear)란 부분이었다. 냉전 이후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주요 요인 또한 두려움이었다.미국은 한국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 시장경제 등 다양한 것을 주창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미국이 느끼는 두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한 성격에 다름이 없었다. 작전통제권의 역사를 예로 들어보자. 미국이 한미동맹을 체결하면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요구했던 것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노력에 연루될 가능성, 소위 말해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같은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1968년 당시의 1/21 사태와 푸에블로 사태 이후 박정희는 작전통제권 환수를 거론했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곧바로 사이러스밴스를 특사로 파견하여 1억$ 특별 군원을 제시했다. 밴스 특사의 방문은 박정희의 작전통제권 전환 노력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작전통제권 전환 이후 벌어질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학생들이 반미시위를 벌였다.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작전통제권 행사를 놓고 볼 때 미국이 광주민주화항쟁 강제 진압과 관련하여 책임이 있다며 학생들이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했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의 동조로 특전사가 광주에 투입될 수 있었다고 학생들은 주장했다. 그러자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많은 한반도 전문가들이 반미감정 해소 방안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그 일환으로 1987년 미국은 노태우 후보에게 작전통제권 전환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도록 만들었다. 작전통제권 전환을 강력히 요구했다.작전통제권을 전환해주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이 강제 철수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이다.

1988년에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부 들어서면서 전두환 정부 당시와 비교하여 반미감정이 매우 낮아졌다. 한편 중국의 부상을 보며 1992년 이후 미국은 미군의 한반도 지속 주둔 필요성을 느꼈다. 지속 주둔하고자 하는 경우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 행사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작전통제권 전환을 통해 한국군의 능력이 함양되는 경우 한반도에서 미군이 필요 없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제 철수 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1992년 중순 이후 한미연합사령관 리스카시는 작전통제권 전환 불가를 주장했다. 이 같은 미국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반미감정은 제기되지 않았다.

2002년 효순이/미순이 사건을 계기로 반미감정이 고조되었다. 노무현 후보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이 전작권 전환을 주장했다. 주한미군 철수 운운했다. 그러자 미국은 재차 전작권 전환을 추구했다. 전환해주지 않는 경우 한반도에서 강제 철수 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2006년에 접어들면서 한미 양국은 본격적으로 전작권 전환을 추구했다. 그러자 국방부차관 출신의 예비역 육군중장 이정린은 전작권 전환 반대 1,000만 시민 서명 운동을 주도했다. 2010년 5월에는 1,000만 시민 서명이란 목표가 달성되었다. 이 같은 결과를 보면서 2010년 6월 미 외교협회에서 발간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란 제목의 Task Force 보고서에서는 1,000만 시민 서명 운운하며 조건부 전환을 주장했다. 전작권 전환 반대 운동에 1,000만 시민이 서명했다는 점에서 전환해주지 않는 것이 미군의 한반도 주둔 보장 측면에서 보다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작전통제권 전환의 역사를 두려움(Fear)란 요인을 갖고 설명했다. 지난 70년 동안의 한미관계 역사 모두를 두려움이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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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포 18-12-26 23:16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 미국은 자신의 정책을 지원해줄 정당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현포 18-12-26 23:17
 
박정희는 경제 부흥을 주장했다.
사오리 18-12-27 05:24
 
우리 모두는 배우는 과정에 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열심히 배
워서 나중에는 스승이 되어야 한다. 지도자, 힐러 같은 사람이 되
려면, 스승의 자격도 있어야 되고 제자의 자격도 있어야 한다. 지
금은 제자이지만 언젠가는 스승이 될 것을 대비하면서 스승의 자
격까지도 갖춰가야 한다.
겨울 18-12-27 08:47
 
문제는 한반도가 미국, 중국, 일본 및 소련이란 주변 4강의 이익이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 지역이란 사실이다.
겨울 18-12-27 08:49
 
한편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 미국은 자신의 정책을 지원해줄 정당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겨울 18-12-27 08:53
 
한편 중국의 부상을 보며 1992년 이후 미국은 미군의 한반도 지속 주둔 필요성을 느꼈다.
산백초 18-12-27 13:18
 
문제는 해방 직후 대부분 한국인들이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를 신봉했다는 사실이었다.
산백초 18-12-27 13:19
 
미국은 아태지역 질서 유지 측면에서 한반도 전체가 적대 세력의 수중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산백초 18-12-27 13:20
 
1988년에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늘배움 18-12-27 15:13
 
이처럼 대립되는 이념으로 인해 6.25 전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미국의 많은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늘배움 18-12-27 15:14
 
어느 국가나 국가안보에 관한 국민의 인식은 국익을 중심으로 일치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분열되어 있다고 한다.
늘배움 18-12-27 15:16
 
2006년에 접어들면서 한미 양국은 본격적으로 전작권 전환을 추구했다.
바람의언덕 18-12-27 18:18
 
한반도가 미국, 중국, 일본 및 소련이란 주변 4강의 이익이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 지역이란 사실이다. 이들 국가의 경우 한국인들의 여론이 자국에 유리한 방향이 되도록 적극 노력했다.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이 국익이 아니고 주변국 이익을 대변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바람의언덕 18-12-27 18:20
 
한국인들을 반공사상으로 무장시킨다는 차원에서 미국이 착안한 것이 친일파들의 대거 기용이였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해방 이후 하지 중장의 친일파 기용이 급조된 성격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아니었다. 이미 1943년 미국은 한반도를 점령한 이후 일제 치하에서 일했던 한국인과 일본인을 이용하여 자신의 점령 지역을 통치해야 할 것으로 구상했다.
바람의언덕 18-12-27 18:20
 
해방 이후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다. 아니 대부분 젊은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있는 듯 보인다.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해방 이후 친일파가 득세하게 된 것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 때문이었다.
바람의언덕 18-12-27 18:22
 
군사영어학교 1기생 가운데 일본군 출신이 절대 다수로 많았던 것은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군사적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측면도 있지만 광복군과 같은 독립군 출신과 비교하여 반공의식이 투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람의언덕 18-12-27 18:24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는 미군의 작전통제권을 받고 있던 한국군 일부를 동원했다. 박정희는 경제 부흥을 주장했다.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미국이 사전에 감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바람의언덕 18-12-27 18:28
 
미국은 아태지역 질서 유지 측면에서 한반도 전체가 적대 세력의 수중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반도에서 미국이 느끼는 두려움은 한반도 전체가 적대 세력의 수중으로 들어갈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게리 18-12-28 17:48
 
오늘날 한국의 여당 및 야당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지도자들이 국가안보는 강대국에 의존한
상태에서 당리당략 차원에서 국가안보 문제를 접근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게리 18-12-28 17:49
 
한반도가 미국, 중국, 일본 및 소련이란 주변 4강의 이익이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 지역이란 사실이다;;;.
게리 18-12-28 17:50
 
문제는 해방 직후 대부분 한국인들이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를 신봉했다는 사실이었다;;;.
게리 18-12-28 17:57
 
해방 이후 친일파가 득세하게 된 것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 때문이었다;;;.
게리 18-12-28 18:08
 
냉전 이후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주요 요인 또한 두려움이었다;;;.
호반도시 18-12-30 05:12
 
해방 이후 친일파가 득세하게 된 것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 때문이었다.
^ ( ㅡ ) ^
해오 18-12-31 14:04
 
지난 70년 동안의 한미관계 역사 모두를 두려움이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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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4 <천주집>무등산의 기운과 동림사의 겨울 공부. 구름으로 용을 따르던 시절 (21) 게리 12-28
9493 마이클 L. 파워, 제이 슐킨의 《비만의 진화》 * 현명한 게으름 (22) 사오리 12-27
9492 한국인 정체성 혼란과 한반도 지정학 , 미국의 한반도 정책 동인: 두려움(Fear) (25) 현포 12-26
9491 세상일, 순조로움보다.../주자(朱子)의 인(仁)과 다산의 인/ 선거제도와 ‘갑’질의 정치 (30) 선유도 12-26
9490 혜민의《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 '그냥 써라~' (29) 사오리 12-25
9489 기도와 선순환의 도구, 내 안의 위대한 힘 (27) 호반도시 12-24
9488 토요일 오후 공양음식 생각에 (23) 고기먹는땡중 12-22
9487 two. 스테로이다 남용,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 한, 양방의 밥그릇 싸움 (22) 대포 12-21
9486 스테로이다 남용,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 한, 양방의 밥그릇 싸움 (24) 대포 12-21
9485 <천주집>“그른 일로 이익 보려다 손해보는 게 세상”. 다산의 답안 받아 본 정조 (24) 게리 12-20
9484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 (35) 흰두루미 12-19
9483 기도하면 원하는 소원이 다 이루어질까! -틱낫한과 소년 (25) 호반도시 12-19
9482 조관희의《청년들을 위한 사다리 루쉰》 * 루쉰이 평생 고민했던 것 (27) 사오리 12-18
9481 세살림 칠성도군의 길 (31) 향수 12-17
9480 미국 러시아 'INF 갈등'이 뭐길래...한반도에 어둠이 드리운다 (26) 봉평메밀꽃 12-14
9479 ‘南北군사합의’ 대토론회(용산 전쟁기념관)에 관한 우려와 기대! (23) 현포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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