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생이 마갈궁(磨蝎宮)의 운명인지라, 단지 ‘허무(虛無)’라는 두 글자뿐입니다.(此身一生磨蝎, 只是虛無二字.)” 1820년 9월 4일에 다산이 영남 쪽의 어떤 벗에게 보낸 친필 편지에서 한 말이다. 18년의 긴 유배 끝에 40세의 중년은 57세의 중늙은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 집은 낡고 퇴락해 더 이상 기억 속의 그 집이 아니었다. 둘러보면 허망하고 허무했다.
“허무할 뿐입니다”
편지에서 자신의 일생을 마갈궁의 운명이라 말한 대목이 목에 컥 걸린다. 고대의 점성가들은 이 운세를 타고 난 사람은 높은 재주에도 평생 좌절과 비방 속에 곤고히 살다 갈 운명으로 보았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한유(韓愈)와 송나라의 소식(蘇軾)이 마갈궁이었다.
소동파는 ‘동파지림(東坡志林)’에서 한유가 쓴 ‘삼성행(三星行)’이란 시를 보고 그가 마갈궁임을 알았는데, 자신도 같은 마갈궁이어서 평생 비방과 기림을 많이 받아, 그에게서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고 쓴 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마갈궁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으로는 허균(許筠)과 박지원(朴趾源)이 더 있다. 허균은 ‘해명문(解命文)’에서 마갈궁의 운명을 타고난 자신의 불우를 탄식했다.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정리한 ‘과정록(過庭錄)’에는, 북경에 간 집안사람이 그곳 점쟁이에게 연암의 사주를 보이자, “이 운수는 마갈궁이오. 한유와 소식이 이것과 같았소. 반고(班固)나 사마천 같은 문장이지만, 일 없이 비방을 부를 것이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적혀 있다.
일 없이 비방을 부를 것이오
평생 구설을 달고 다니다 비명에 죽은 조선 최고의 천재 허균, ‘열하일기’ 한편 한편이 나올 때마다 앞 다투어 베끼느라 장안의 종이 값이 올랐다는 조선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이 마갈궁의 운명을 타고 났다. 그리고 정조 임금 곁에서 절정의 시기를 꿈꾸다가 급전직하 18년간의 유배로 세상에서 내쳐진 조선 최고의 학자 다산 또한 자신이 마갈궁의 운명이었노라 술회했다. 세 사람 모두 우뚝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구설과 비방이 평생을 따라 다녔다.
마갈궁의 운명을 지닌 이들의 행동 특성은 이렇다. 첫째, 압도적 재능과 총기를 타고난 천재들로 특히 문장에 뛰어나다. 둘째, 수틀린 꼴을 두고 못 보아, 이로 인해 말 못할 시련을 겪더라도 무릎 꿇거나 타협하려 들지 않는다. 셋째, 쉽게 갈 수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골라 고통을 자초하고, 옳지 않은 길은 죽어도 안 간다. 넷째, 설령 일확천금의 기회가 생겨도 거들떠보지 않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한다. 그러니 그 운수가 순탄할 리 없다.
신참례 거부 소동
1789년 3월 13일에 대과 합격 방이 붙었다. 다산은 오랜 수험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벼슬길에 발을 디뎠다. 며칠 뒤 판서 권엄이 주관한 축하연이 열렸다. 이른바 신참례(新參禮)라는 것으로 급제자에게 갖은 재주를 부리게 하여 곤욕을 안겨주는 악명 높은 신고식이었다.
먼저 급제자의 얼굴에 먹칠을 해서 까마귀를 만들었다. 급제자들이 깜둥이 얼굴로 들어서자 다들 이제부터라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곧이어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기, 절름발이 걸음으로 게 줍는 시늉하기, 부엉이 울음 흉내내기 등의 짓궂은 요구가 쉼 없이 이어졌다. 소리가 적다고, 시늉이 그게 뭐냐고 타박하고, 부엉이 울음에 고양이 소리를 낸다고 다시 시켰다. 난감한 표정 앞으로 깔깔대는 키득거림이 가득했다. 이 통과의례가 끝나야만 합격을 축하하는 질펀한 술자리가 제대로 시작될 터였다.
다산은 제 차례가 와도 꿈쩍도 안 했다. “이 사람, 왜 이러나? 즐거운 자리가 아닌가?” 곁에서 옆구리를 찔러도 다산은 까마귀 얼굴로 정색을 한 채 들은 체도 않았다. 들떠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다산은 끝내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 좌장 격이던 권엄이 벌떡 일어나 “우리가 고고한 군자를 모셨네 그려!”하고는 나가 버렸다. 먼저 우스개 노릇을 했던 다른 합격자들이 머쓱해졌다. 잔치는 그 길로 파장이 났다.
신참 주제에 가르치려 들다니
한동안 신참의 무례한 행동으로 조정 안에 말이 들끓었다. 얼마 뒤 권엄이 다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처음 만나 윗사람들과 허물없이 잘 지내자고 해온 오랜 장난의 일을 그토록 정색을 하고 거부하면, 시킨 사람은 대체 뭐가 되느냐는 나무람이었다. 다산이 답장했다.
먼저 망령되고 경솔한 행동으로 선배와 어른께 잘못을 범해 송구하기 짝이 없다는 뜻을 적고,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본마음을 간곡히 말씀드릴까 한다고 썼다. 먹물은 남이 바른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았지만,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슴 속에 지닌 지라 난잡하고 우스운 형용만은 차마 흉내 낼 수가 없었다고 썼다. 불공스러운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님을 알아달라고 청을 올렸다. ‘다산시문집’ 권 18에 실린 ‘권판서에게 올리는 글(上權判書書)’에 내용이 자세하다.
수백 년 관습적으로 행해오고, 누구나 그러려니 알고 있던 일이었는데, 다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건방진 놈, 신참 주제에 가르치려 들어!” 다산의 데뷔는 이렇듯 시작부터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정조는 며칠 뒤인 3월 20일에 기다렸다는 듯이 서영보(徐榮輔) 등과 함께 다산을 왕립학술기관인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임명했다. 다산의 규장각 시절이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내 한 몸 죽고 살고는
강진 유배가 만 8년째로 접어들던 1809년 가을, 맏아들 정학연이 다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님, 임금께서 능행하실 때 소자 앞길을 막고 징을 울려 아버님의 억울함을 호소하렵니다. 탄원서의 초고를 보내오니 살펴보아 주소서.” 부친의 억울함이 풀려야 자식들도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설 수 있을 터였다.
다산은 아들의 편지를 받고, 벗 김이재(金履載)에게 글을 썼다. “아들아이가 내 억울함을 탄원하겠다고 초고를 보내 왔기에 그러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그리하라고 시켰다고 할 게 아닙니까? 제 몸이 살아 돌아가느냐 마느냐는 그저 이 한 몸의 기쁨과 근심일 뿐이지만, 지금은 온 백성이 다 구렁에 빠져 죽게 되었으니 이를 장차 어찌한단 말입니까? 관리의 탐욕은 열배나 더하고, 굶어죽은 시체가 가을인데도 도로에 널렸습니다. 저하나 살고 죽고를 따질 계제가 아니지요.” 그해는 혹독한 흉년이었다.
문집 권 19에 실린 ‘김공후에게 보냄(與金公厚)’은 워낙 긴 편지라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문맥으로 간추려 풀었다.
“아양을 떨고 동정을 애걸하라니”
강진에서의 유배가 10년째로 접어들 무렵인 1810년 9월, 맏아들 정학연은 마침내 능행에 나선 임금의 행차를 막고 격쟁(擊錚)하여 아비의 방면을 청했다. 이에 유배를 풀어 고향집으로 방축하라는 왕명이 내렸다. 하지만, 홍명주(洪命周)와 이기경(李基慶)의 극렬한 반대로 해배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로도 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보다 못한 아들이 1816년 4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님, 한번만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셔서 석방을 빌어보시지요.” 다산의 답장은 이랬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시비(是非)와 이해(利害)가 그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 이롭게 되는 것이 가장 좋고, 옳은 일을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른 일을 해서 이익을 얻는 것이 세 번째고, 그른 일을 하다가 해를 보는 것은 네 번째다. 첫 번째는 드물고, 두 번째는 싫어서, 세 번째를 하려다 네 번째가 되고 마는 것이 세상의 일이다. 너는 내게 그들에게 항복하고 애걸하라고 하는구나. 이는 세 번째를 구하려다 네 번째가 되라는 말과 같다.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하리. 이는 그들이 쳐 놓은 덫에 내 발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냐? 나도 너희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죽고 사는 문제에 견주면 가고 안 가고는 아무 것도 아니지. 하찮은 일로 아양 떨며 동정을 애걸할 수는 없지 않느냐?”
다산은 아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18년간의 유배를 견디면서 살려달라는 편지 한 장 쓰지 않았다. 부끄러운 것이 없고 잘못한 일이 없는데 제가 먼저 굽히는 것은 마갈궁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산의 답안 받아 본 정조 "제 마음으로 공부해 견해가 분명하구나"
<4> 따르되 추종하지 않는다
성호(星湖)로부터 시작된 큰 꿈
다산의 학문은 어디서 왔나? 아버지 외의 스승은 누구인가? 결혼 이듬해인 1777년, 서울 생활을 시작한 16세의 다산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처음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훗날 다산은 자질(子姪)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내 큰 꿈(大夢)은 성호 선생을 사숙(私淑)하는 가운데서 깨달은 것이 대부분이다.” 사숙은 마음으로 스승을 삼아 본받아 배운다는 말이다. ‘자찬묘지명’에서는 또 이렇게 썼다. “열다섯에 장가들었는데, 마침 아버님이 다시 벼슬하여 병조좌랑이 되시는 바람에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이가환(李家煥) 공이 문학으로 한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자부(姊夫)인 이승훈(李承薰)이 몸을 단속하고 뜻을 가다듬어,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뒤따르고 있었다. 내가 그가 남긴 책을 보고서 기쁘게 학문할 마음을 먹었다.”
성호는 다산이 두 살 때인 1763년에 이미 세상을 떴다.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로구나. 성호의 책을 읽는데 이런 자각이 왔다. 질문의 경로를 바꿔, 오로지 자기의 생각에서 나온 힘 있는 목소리였다. 성호는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메모한 뒤, 자신의 견해를 펴 보였다. 그의 글에는 질문이 살아 있었다. 당연시되던 경전의 행간이 성호가 질문을 던지자 문득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변했다. 전복시키고 해체하니 성인의 본뜻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다산은 성호의 책을 통해 질문의 방법과 태도를 익혔다.
다산의 공부는 혼자 하는 사숙 공부였다. 물어도 대답 없는 스승을 모시고, 자기가 묻고 스스로 답해야 하는 공부를 했다. 혼자 하는 공부라 선입견이 없었다. 기성관념에 끌려 다니지 않았다.
율곡이 옳습니다
22세 나던 1783년 2월에 다산은 세자 책봉을 축하해 열린 증광시(增廣試)에 응시해 경전의 뜻을 풀이하는 과목으로 초시에 합격했다. 잇달아 4월의 회시(會試)에서 생원이 되었다. 성적은 썩 높지 않았다. 이것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할 자격을 얻었다.
이듬해 1784년 여름, 정조는 ‘중용’에 대해 70조목에 걸친 문제를 냈다. 제출해야 할 답안이 70가지라니, 모두들 난감했다. 더욱이 첫 문제가 사단칠정과 이기(理氣)의 나뉨에서 퇴계와 율곡의 견해차를 논하는 난제였다. 어느 것 하나 붓을 대기가 쉽지 않았지만 첫 문제가 특히 어려웠다. 함께 공부하던 제생들은 짜 맞춘 듯 모두 퇴계의 사단이발(四端理發)을 정론으로 내세웠다. 다산은 생각이 달랐다. 그에게는 율곡의 기발설(氣發說)이 명쾌하고 막힘이 없었다. 율곡의 손을 든 다산의 개성적인 답안은 당시의 일반적 논의에서 많이 빗겨나 있었다. 비방하는 의론이 시끄럽게 일어났다.
견해가 분명하고 적확(的確)하다
며칠 뒤 정조가 승지 김상집(金尙集)에게 말했다. “이 답안은 세속을 훌쩍 벗어났군. 오직 제 마음으로 가늠한 것이라 견해가 분명하고 적확할 뿐 아니라,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귀하다 할 만하다. 1등으로 하라.” 다들 그 결과에 경악했다.
이 말을 듣고 물러나온 김상집이 홍인호에게 물었다. “정약용이 누군가? 문학은 어떠한가? 오늘 경연에서 유시하시기를, ‘성균관 유생들이 질문에 대답한 것은 대부분 거칠고 무잡스러운데 정약용의 대답만 특이하더군’이라고 하셨다네.” 다산이 정조의 눈에 든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에 앞서 정조는 ‘사칠속편(四七續編)’을 지었는데, 오로지 율곡의 학설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다산은 물론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두 사람은 우연히 기맥이 맞았던 것이다. 다산의 ‘제 마음’으로 하는 공부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세상이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여도 마음으로 승복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질문의 포인트를 명확하게 갈라 논거를 들어 핵심을 찌른다. 선입견 없이 문제에 집중한다. 이것이 평생을 일관한 다산의 공부 방식이었다. 다산은 눈치 보지 않았다. 문로에 따라 정해진 공부를 해 왔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막힌 길을 새로 내고 자물쇠를 철컥 열었다
강진 유배 시절 흑산도의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이렇게 썼다. “성호 노인의 책이 100권에 가깝습니다. 혼자 생각해 보니, 우리가 천지의 큼과 일월의 밝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노인의 힘입니다.(星翁文字, 殆近百卷, 自念吾輩能識天地之大日月之明, 皆此翁之力.)” 이문달(李文撻)에게 보낸 답장에서도, “지금 바른 학문은 쇠퇴하고 속된 논의가 드셉니다. 그래도 퇴계 선생의 뒤에 다시금 성호 옹이 있음에 힘입어 우리가 남기신 글을 사숙하여 또한 그 문로를 얻기에 충분하였습니다.(今正學衰熄, 俗論膠固, 尙賴退陶之後, 復有星翁, 使吾輩私淑於殘編斷簡之中, 亦足以得其門路.)”라고 썼다.
22세 때 경기도 안산에 있던 성호의 옛집을 지나면서 지은 시도 있다. 제목이 ‘섬촌 이선생의 옛집을 지나다가(過剡村李先生舊宅)’이다. 뒷부분 절반만 인용한다.
맑은 기운 동관(潼關)으로 모여들더니
환한 글이 섬천(剡川)에 환히 빛났네.
담은 뜻 공맹과 아주 가깝고
풀이는 공융 정현 뒤를 이었지.
덤불에 한 줄기 길을 내시고
굳게 닫힌 자물통을 철컥 여셨네.
지극한 뜻 못난 나는 가늠 못하나
움직임이 오묘하고 깊기도 하다.
淑氣聚潼關, 昭文耀剡川.
指趣近鄒阜, 箋釋接融玄.
蒙蔀豁一線, 扃鑰抽深堅.
至意愚莫測, 運動微且淵.
성호는 평안도 벽동군에서 태어나 광주부 섬촌, 지금의 안산에 뿌리 내렸다. 오래 끊겼던 경학의 전통이 퇴계로 이어 도통(道統)이 전해지고, 성호가 이를 받아 공맹의 본뜻이 비로소 환하게 드러났다. 성호의 질문은 한나라 때 공융(孔融)과 정현(鄭玄)의 주석 전통을 이은 것이다. 경학의 차원이 여기서 한층 높아졌다. 덤불에 막혔던 길이 한 줄기 다시 열리고(豁一線), 굳게 닫혔던 녹슨 자물통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抽深堅). 얼마나 통쾌한가? 하지만 내 공부가 얕아서 그 은미(隱微)하고 깊은 뜻을 가늠할 길 없어 안타깝다고 썼다.
질문을 본받고 답을 버리다
그렇다고 다산이 성호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가장 다산다운 점이다. ‘상중씨(上仲氏)’에서는 “‘성호사설’은 지금의 소견에 따라 마음대로 간추려 뽑게 한다면 아마도 ‘무성(武成)’과 같게 될까 염려됩니다. 한 면에 10줄 20자씩 쓴다면 7,8책이면 적절할 듯합니다. ‘질서(疾書)’ 또한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라고 했다.
젊은 시절 자신을 압도한 성호의 학문이 공부에 눈을 뜬 뒤에 거듭 보니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부분이 많이 보였다. ‘무성(武成)’은 ‘서경’의 편명이다. 고문본 ‘상서’에만 들어 있어서 흔히 위작(僞作)으로 꼽는 부분이다. 맹자는 자신은 ‘무성’편에서 두세 가지만 취할 뿐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다산의 말뜻은 자신에게 맡겨 ‘성호사설’과 ‘질서’를 간추리게 한다면 현재의 방만한 글 중에서 고작 열에 두셋 정도만 남기고 다 빼 버리겠다는 의미다. 지금 남은 ‘성호사설’이 30권 분량인데, 이것을 정수만 간추려 7,8책으로 압축하자고 말한 셈이니 쉽게 할 말이 아니다.
다산은 한 수 더 떠서, “성호가 쓴 예법의 법식에 관한 내용은 너무 간결한 것이 문제인데다, 지금 풍속과 어긋나면서도 고례(古禮)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 책을 만약 널리 배포해 식자의 안목을 거치게 된다면 대단히 미안한 노릇이니, 이를 장차 어찌 하올런지요?”라고까지 했다.
젊은 시절 다산을 압도했던 성호의 학문이 중년 이후에는 열에 일고여덟은 걷어 내야 할 군더더기로 보였다. 이 같은 거침없는 태도는 때로 오만으로 비춰졌다. 다산은 성호에게서 배웠다. 그가 배운 것은 선입견을 배제한 공정한 논의와 정론을 향해 가는 치열한 탐구의 태도였다. 다산은 당연시 되던 것에서 의문을 일으켜 질문을 구성하고 전략을 세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본받고자 했지, 답 자체는 아니었다.
급제자 곤욕주는 악명 신고식 관행
얼굴에 먹칠하고 동물 흉내 시켜…
다산은 자기 차례에도 꿈쩍 안해 ;;;
게리18-12-20 11:34
57세 중늙은이로 고향 돌아와선
“낡은 집 둘러보니 허망하고 허무”
곤고하던 일생 ‘마갈궁 운명’ 자조 ;;;
게리18-12-20 11:41
다산은 자질(子姪)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내 큰 꿈(大夢)은 성호 선생을 사숙(私淑)하는 가운데서 깨달은 것이 대부분이다.” ;;;
산백초18-12-20 11:51
18년의 긴 유배 끝에 40세의 중년은 57세의 중늙은이가 되어 돌아왔다.
산백초18-12-20 11:55
강진에서의 유배가 10년째로 접어들 무렵인 1810년 9월, 맏아들 정학연은
마침내 능행에 나선 임금의 행차를 막고 격쟁(擊錚)하여 아비의 방면을 청했다.
산백초18-12-20 11:58
며칠 뒤 정조가 승지 김상집(金尙集)에게 말했다. “이 답안은 세속을 훌쩍 벗어났군. 오직 제 마음으로 가늠한 것이라
견해가 분명하고 적확할 뿐 아니라,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귀하다 할 만하다. 1등으로 하라.” 다들 그 결과에 경악했다.
수양버들18-12-20 16:13
세상에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그리하라고 시켰다고 할 게 아닙니까? 제 몸이 살아 돌아가느냐 마느냐는 그저 이 한 몸의 기쁨과 근심일 뿐이지만, 지금은 온 백성이 다 구렁에 빠져 죽게 되었으니 이를 장차 어찌한단 말입니까? 관리의 탐욕은 열배나 더하고, 굶어죽은 시체가 가을인데도 도로에 널렸습니다.
수양버들18-12-20 16:14
“세상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시비(是非)와 이해(利害)가 그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 이롭게 되는 것이 가장 좋고, 옳은 일을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 그 다음이다.
수양버들18-12-20 16:15
“내 큰 꿈(大夢)은 성호 선생을 사숙(私淑)하는 가운데서 깨달은 것이 대부분이다.” 사숙은 마음으로 스승을 삼아 본받아 배운다는 말이다.
수양버들18-12-20 16:23
“이 답안은 세속을 훌쩍 벗어났군. 오직 제 마음으로 가늠한 것이라 견해가 분명하고 적확할 뿐 아니라,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귀하다 할 만하다. 1등으로 하라.” 다들 그 결과에 경악했다.
수양버들18-12-20 16:24
선입견 없이 문제에 집중한다. 이것이 평생을 일관한 다산의 공부 방식이었다. 다산은 눈치 보지 않았다. 문로에 따라 정해진 공부를 해 왔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수양버들18-12-20 16:25
다산은 성호에게서 배웠다. 그가 배운 것은 선입견을 배제한 공정한 논의와 정론을 향해 가는 치열한 탐구의 태도였다. 다산은 당연시 되던 것에서 의문을 일으켜 질문을 구성하고 전략을 세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본받고자 했지, 답 자체는 아니었다.
겨울18-12-20 17:40
우리나라에서 마갈궁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으로는 허균(許筠)과 박지원(朴趾源)이 더 있다.
겨울18-12-20 17:42
다산은 아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18년간의 유배를 견디면서 살려달라는 편지 한 장 쓰지 않았다.
겨울18-12-20 17:44
그렇다고 다산이 성호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가장 다산다운 점이다.
늘배움18-12-21 07:45
“이 운수는 마갈궁이오. 한유와 소식이 이것과 같았소. 반고(班固)나 사마천
같은 문장이지만, 일 없이 비방을 부를 것이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적혀 있다.
늘배움18-12-21 07:48
다산의 답안 받아 본 정조 "제 마음으로 공부해 견해가 분명하구나"
늘배움18-12-21 07:50
다산은 당연시 되던 것에서 의문을 일으켜 질문을 구성하고 전략을 세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본받고자 했지, 답 자체는 아니었다.
호반도시18-12-24 02:26
강진 유배 15년째 맏아들 편지에
“하찮은 일로 애걸할 수 없다” 답장
호반도시18-12-24 02:28
마갈궁의 운명을 지닌 이들의 행동 특성은 이렇다.
첫째, 압도적 재능과 총기를 타고난 천재들로 특히 문장에 뛰어나다.
둘째, 수틀린 꼴을 두고 못 보아, 이로 인해 말 못할 시련을 겪더라도 무릎 꿇거나 타협하려 들지 않는다.
셋째, 쉽게 갈 수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골라 고통을 자초하고, 옳지 않은 길은 죽어도 안 간다.
넷째, 설령 일확천금의 기회가 생겨도 거들떠보지 않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한다.
그러니 그 운수가 순탄할 리 없다.
호반도시18-12-24 02:29
다산의 답장은 이랬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시비(是非)와 이해(利害)가 그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 이롭게 되는 것이 가장 좋고, 옳은 일을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른 일을 해서 이익을 얻는 것이 세 번째고, 그른 일을 하다가 해를 보는 것은 네 번째다.
첫 번째는 드물고, 두 번째는 싫어서, 세 번째를 하려다 네 번째가 되고 마는 것이 세상의 일이다.
호반도시18-12-24 02:35
정조는 대다수 성균관 유생들과 달리 퇴계 대신 율곡이 옳다고 주장한 다산의 답안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호반도시18-12-24 02:39
다산은 당연시 되던 것에서 의문을 일으켜 질문을 구성하고 전략을 세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본받고자 했지, 답 자체는 아니었다.
사오리18-12-25 04:26
영혼으로 통하는 소울메이트 한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간절히 원한다고 만나지는 것도 아닙니다.
열심히, 맑게, 진실되게 살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귀한 선물입니다.
다시 없는 일생의 행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