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크고지의 영웅들》을 읽었다. 책 제목만 보고 ‘수퍼 히어로’들의 ‘영웅담’을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실망할 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몸에 총탄을 맞고도 적군 수십명을 기관총으로 쓸어버리는 식의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어느 날 갑자기 영장을 받고 징집된 10대 후반의 젊은이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이제 겨우 안정된 삶을 누리기 시작하려던 예비군 아저씨들이다. 젊은이들은 그래도 나름 로망을 품고, 예비군 아저씨들은 속된 말로 ‘× 밟았네’하는 심정으로 병영으로 들어선다.
그들의 일상은 뻔하다. 땅 파고, 사역하고, 점호 때는 복장불량으로 주번사관의 지적질을 당하고, 부사관의 눈을 피해 땡땡이를 치려다가 들통나고, 병영 내에서 몰래 술을 마시려 하고, 상관에게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두고두고 갈굼을 당하고, 기회가 있으면 장교를 골탕 먹이려 들고, 시간나면 축구하고, 황당한 안전사고로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나오고, 휴가 때면 술과 여자를 찾아다니고, 그러다가 제대할 때가 되면 선임 하사가 찾아와서 “너는 군인 체질”이라며 말뚝 박으라고 꼬시고 ...
아마 대한민국의 많은 남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것이다. ‘군대는 어디나 다 똑 같네.ㅎㅎ’
하지만 대한민국의 군필자들과 다른 점들도 있다. 이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70년 전 영국의 젊은이들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렇고 그런’ 군대 생활 와중에 실제로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치러야 했던 전투는 후크고지 전투. 후크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사미천 좌측 군사분계선을 끼고 있는 해발 200미터 남짓한 고지다. 이 고지를 둘러싸고 1952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 휴전협정시까지 영연방군-미군과 중공군 사이에 4차례나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듀크 오브 웰링턴 연대 소속 장병들은 바로 이 후크고지를 지켜낸 이들이다. 이들은 쏟아지는 포탄 사이를 뚫고 달려야 했고, 참호까지 쳐들어온 중공군과 육박전을 벌여야 했으며, ‘재수 없게’ 정찰대로 선발되면 적진에 침투해서 가슴 졸이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때로는 고향 친구나 입대 동기들이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들은 대개 영국 워킹 클래스 출신이었다. 존 코프시 이병의 말처럼 ‘고작 열여덟살 아니면 열아홉 먹은 소년들이었고 태어난 이래로 집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가 본 적도 없었고’. 에드윈 워커의 말처럼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해서는 북쪽 군대가 남쪽을 침략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뿐이 아니었다. 많은 영국인들이 자기 나라 군대가 코리아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몰랐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대단한 ‘수퍼 히어로’들이 아니라, 영장 한 장으로 징집되어 군대라는 낯선 세계로 ‘끌려간’ 한 때의 나 자신, 그리고 오늘날 우리 아들이나 조카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그들이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영국군은 5만6000여명이 파병되어 5000여명의 전사상자, 실종자, 포로를 냈다. 1953년 11월 12일 영국군이 철수할 때, 부산 유엔묘지에서 번즈 신부는 그곳에 묻힌 장병들을 이렇게 추도했다.
“우리는 비록 한국을 떠나지만, 그대들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대들은 이미 이곳의 흙이고 공기이며 자유의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치른 것은 이역만리 한국의 전쟁터로 투입된 병사들만은 아니었다. 그들을 보낸 아내, 어머니는 이웃들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 아들 때문에 속을 태우면서 그들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 책 말미에는 남편을 전쟁터에 보냈던 오드리 러시워스라는 여성의 수기가 실려 있다. 제2차세계대전의 상흔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던 궁핍한 시절, 예비군으로 소집되어 나간 남편의 빈자리는 컸다. 그녀와 그녀의 아기들은 어떤 날은 코코아 한 잔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만큼 가난에 시달리면서, 전선에 나갔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된 가장을 기다려야 했다.
영국은, 그리고 다른 참전국들은 남을 도울 여력이 있어서 군대를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어려웠지만 군대를 보낸 것이었다. 그것이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자기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자기들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와 대한민국이 참전용사들에게 보내는 감사에 대해 참전용사들이 자부심을 느끼고 고마워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책을 편집한 참전용사 케네스 켈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60년이나 흐른 뒤에 한국에 다시 와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떠나왔던, 전쟁으로 분단된 국가가 아닌, 자신들의 나라에 자신들이 쌓아올린 업적들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시민들의 나라 대한민국. 절망과 죽음의 시간에 도움을 주었던 모든 국가에 항상 감사함을 표하는 아름다운 나라, 대한민국으로 말이다.”
대한민국이 참전용사들의 이 자부심과 감사를 배신한다면, 참전용사들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