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지방에 전해 오는 민요 중 가장 유명한 민요는 <밀양 아리랑>일 것입니다.날좀 보소 날좀 보소 날조곰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좀 보소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리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담 넘어 갈 때는 큰 맘을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이 <밀양 아리랑>은 전라도 지방에 전해 오는 <진도 아리랑>과 강원도 지방에 전해 오는 <강원도 아리랑>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다른 지방의 아리랑에 견주어 <밀양 아리랑>은 특히 가락이 흥겹고 장단도 빠르며 경쾌합니다. 각 지방의 민요가 그 고장의 풍토나 인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때 <밀양 아리랑>이 이렇듯 흥겹고 경쾌한 것은 밀양 지방의 땅이 풍족하고 인심이 넉넉한 데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의 <밀양도호부>편에 보면 밀양이 “긴 내를 굽어 당기고 넓은 들을 팽팽히 얼싸안고 있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밀양군은 오늘날에도 경상남도 안에서 가장 농업이 성한 곳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갖가지 민속놀이가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밀양 백중놀이>나 <밀양 새터 가을굿>이나 <감내의 줄당기기>나 <용호놀이> 같은 놀이들이 새롭게 발굴되어 소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백중놀이>는 밀양의 이름을 나라 안에 널리 떨치게 만들어서 밀양하면 백중놀이를 연상할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하늘 위에 상제님 천하 용왕님
바람기 순조롭고 벌구잡충 없이 하며
금년 농사 잘도 해서 총각 신세 면케 하고
앞논에 용신님 뒷논에 용신님
들쥐도 막아 주고 나는 새도 막아 주고
회기종도 막아 주고 흰무리도 막아 주소
농신제 축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백중놀이는 힘겨운 세벌 논매기를 끝낸 백중날, 곧 9월 보름을 전후한 용날에 동네 머슴들이 모여서 벌이는 놀이였습니다.
마당 한가운데에 저릅대로 만든 '농신대'를 세우고 동네 사람들이 쌀이나, 콩, 돈, 축원문을 넣은 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세 번 절하며 그 해의 풍년과 복을 빈 다음, 그 해에 농사를 제일 잘한 장원을 지게 목발로 만든 ‘작두말’에 태우고 머슴들끼리 놀이판을 벌입니다.
그 판에 양반이 끼어들어 거드름을 부리며 '양반춤'을 추면 머슴들과 부엌 일하는 여인들인 '정지꾼'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 병신춤으로 양반을 놀리고, 쫓겨난 양반은 범부 차림으로 다시 나타나 서민들과 어울려 '범부춤'을 흥겹게 춥니다.
그런 다음 북잽이들이 큰 북을 메고 나와 밀양 백중놀이에만 유일하게 전해오는 '오북춤'을 춥니다. 이 오북춤은 '오행'과 '오기'가 순조롭기를 빌며 '오체'가 성하고 '오곡'이 잘되고 '오복'을 누릴 수 있기를 비는 뜻이 담겨 있는데, 이 오북춤이 끝나면 모든 놀이꾼과 구경꾼이 한데 어우러져서 마지막 뒤풀이를 합니다.
하보경 명인은 밀양 읍내에서 이 놀이를 제일 오랫동안 놀아온 춤꾼입니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정확하게 기억 못할 만큼 오래 살다 돌아가신 그는, 나이는 잊어버렸어도 백중놀이에 대해서만은 어느 것 하나 잊어 버린 것이 없을 만큼 뼛속 깊이 이 놀이가 배어있는 분이었습니다.
1909년인가 1905년인가에 하성옥의 큰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이미 밀양 읍내에서 이름난 북잽이였습니다.
부친은 놀이를 좋아해서 읍내에서 놀이가 벌어질 때는 앞장을 서서 놀았고, 어느 때는 풍물패를 조직해서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 다니며 서너 달씩 집을 비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단체가 해산되면 집에다 악기를 풀어놓고 흩어지는데, 돈을 못 벌었거나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열흘이나 보름씩 그의 집에서 쉬어 가기도 했습니다. 하보경 소년은 어려서부터 늘상 그 어른들이 치는 풍물소리를 듣고 그 어른들이 추는 춤을 보며 자랐고, 틈만 나면 그들에게서 춤과 악기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밀양보통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이미 웬만한 장단이나 춤은 따라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눈이 무서워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놀이를 좋아할 망정 아들만은 공부를 착실히 해서 면서기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아들이 남 앞에서 북치고 노는 것을 엄하게 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절마다 벌어지는 푸짐한 마을 놀이 때면 그는 엉덩이가 들썩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밀양은 산이 좋고 들이 넓고 물이 좋고 하니께네, 보리도 잘되고 나락도 잘돼, 소 없는 집이 없고, 머슴없는 집이 없는 기라. 백중날 날받이 옷도 해주고 음식도 해주고 푸짐하게 노는데, 우째 신이 나는지 하루 종일 따라 다녀도 재미가 있는 기라.”
천성이 춤과 놀이에 무한히 끌려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데다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악기와 춤의 기초를 다진 그가 얌전하게 학교 공부나 하길 바란다는 것은 고양이 앞에 생선을 놓고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결국 그는 열여섯 살 무렵에 아버지 몰래 놀이판에서 북을 치고 말았습니다.
솜씨를 인정받은 그는 스무 살 무렵에는 춤까지 출 수 있게 되었는데, 같은 쪽의 손과 발이 함께 움직이는 '걸음새'와, 퉁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배김새'와, 턱을 묘하게 끄덕거리는 독특한 '고개놀림'과 같은 양반춤의 진한 맛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배어 나오자, 보는 구경꾼들이 탄성을 올렸습니다. 그 뒤로 그는 일약 멋진 춤꾼으로 읍내에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장옥도라는 처녀와의 혼담도 쉽사리 이루어져 장가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는 밀양 멋쟁이로 이름이 드높아져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는 재미에 맛을 붙일 무렵, 아버지가 병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스물네 살쯤 되었을 때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본계’ 계원이 되었습니다.
보본계는 백년이 넘게 내려오는 밀양 읍내의 놀이계로, 마흔 명쯤 되는 계원들이 정초에 읍내를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해주고, 봄에 한차례 모여서 걸판지게 노는 단체였습니다. 이 계원들은 저마다 악기나 노래나 춤에 재주가 있어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읍내 한량들이 서로 다투어 계원이 되고 싶어했지만, 웬만큼 솜씨가 없으면 계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계에 젊은 계원이 되었으니 한량인 그로서는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나쁜 짓’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서운 아버지도 안 계시겠다, 물려받은 재산은 넉넉하여 부농 소리를 듣는 살림이니 의식주 걱정없겠다, 얼굴 잘생기고 젊고 멋있겠다,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겠다, 아무튼 그에게는 '방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셈이었습니다.
어디에 놀이판이 벌어졌다 하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가고, 씨름판이 벌어졌다 하면 다시 바람같이 달려가서 심판을 보며 신나게 놀고, 어디에 예쁜 기생이 있다 하면 부리나케 옷 빼입고 놀러가는 통에 그 많던 재산이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윷놀이에 미치지만 않았어도 부친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밀양의 하보경, 삼칸집 너머로 던져도 모가 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이름난 내기 윷꾼이던 그는 결국 재산을 다 날린 다음 손을 톡톡 털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말기의 전쟁 바람은 밀양에도 불어 닥쳐 놀이판은 금지당하고, 술 마시고 놀음을 하면 잡혀가고, 쇠로 된 악기는 모두 전쟁물자로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고생스럽고 재미없는 시절을 간신히 넘긴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친구들과 ‘5.3 친목계’를 조직하여 마음껏 놀기로 작정했습니다.
보본계의 뜻을 이어받아 조직된 5.3친목계에는 타관 객지에 흩어져 있던 재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북춤 잘 추는 김상용 명인, 권채입 명인, 이재원 명인, 김달수 명인과 꽹과리 잘 치는 정한목 명인, 김타업 명인과 징 잘 치는 김석화 명인 등이 중심이 되어 정초에 지신밟기 하고 봄에 한차례 크게 놀았습니다.
그 단체가 점점 발전하여 1960년에 한국사단법인 밀양국악협회가 탄생되었고, 1980년에는 민속예술보존협회가 생겨났습니다. 그해 10월에 제주시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뒤 중요 무형 문화재 68호로 지정받고 하보경 명인이 <양반춤>과 <범부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게 되자, '밀양백중놀이'는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여기 저기 초청공연을 갖게 되고, 1981년 8월에는 미국의 국제 무용단 초청으로 하보경 명인이 대표로 미국에도 갔다오고, 1982년에는 김타업 명인이 상쇠 예능보유자로 지정 받게 되고, 거의 해마다 두세 번은 민속제나 예술제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으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백중놀이의 참가자들은 모두 저마다 재주가 뛰어나고 신명이 넘쳐 흘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흥겨움에 겨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중에서도 하보경 명인의 춤은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아버릴 만큼 뛰어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하얀 띠를 맵시있게 두른 그가 십 년이 넘게 기른 하얀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하얀 도포를 입고 검은 관을 쓰고 미투리 신고 하얀 부채를 손에 들고 '양반춤'을 추거나, 하얀 중의적삼에 상투를 꼽고 웃댕기를 매고 미투리 신고서 '범무춤'을 추거나, 흰 중의적삼에 상투 꽂고 짚신 신고 큰북을 메고 북채를 손에 들고 딱딱딱 하면서 '북춤'을 출 때면 그의 말대로 “미국 처녀도 반해서 볼따구에 뽀뽀를 할” 지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