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만 4천 년 전 인도네시아의 토바(Toba) 화산 폭발 때문에 사피엔스의 개체수는 급감하여 겨우 2천명 선이었다. 그 이후로도 인류의 멸종을 걱정할만한 사건들이 더러 있었다. 1918년~1919년에 유행한 이른바 스페인 독감(A형 독감 바이러스의 변형인 H1N1)은 대략 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이는 1차 대전 사망자의 3배 이상이었으며 당시 전 세계 인구의 5% 정도였다(당시 조선에서도 이른바 “무오년 독감”이라고 알려진 인플루엔자에 의해 742만 명 정도(44%)가 감염되어 14만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보다 6세기 전에는 바이러스가 아닌 세균이 유럽을 초토화시켰었다.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사람에 전파되는 페스트균이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되어 유럽에서만 1억 명 가량(유럽인구의 1/3)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흔히 흑사병(Black Plague)라 불리는 이 전염병은 스페인 독감과 함께 ‘대유행(pandemic)’의 대표적 사례로 간주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또 한 번의 대유행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년 12월 중국 후베이 성에서 박쥐를 보유 숙주로 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2019-nCoV)가 우환시의 일부 주민들을 감염시켰고 그들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일부 사람들도 빠르게 감염되면서 사망자도 점점 늘고 있다. 급기야 며칠 전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중국의 이웃인 우리도 사실상 초비상이다. 현재(2020.2.7.) 전 세계 확진자 수는 31,398명, 사망자 수는 638명이고, 한국의 경우 확진자 24명(사망자 0)이다. 중국 우한(武漢) 내 감염자 수가 7만5천 명을 넘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그런데 이번 사태가 1세기 전의 스페인 독감과 다른 점은 바이러스의 유형만이 아니다. 가장 큰 차이는 글로벌 네트워크의 차이다. 우선, 항공 교통의 발달로 중국의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는 하루 만에 아프리카로 전달된다. 전 세계가 사실상 일일 생활권이다. 두 번째는 통신 네트워크의 차이다. 기존 레거시 미디어뿐만 아니라 유튜브, 페이스북 같은 개인 미디어와 SNS 덕분에 우리는 현재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거의 생중계로 지켜볼 수 있다. TV만 틀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파 소식이 업데이트되고, 유튜브만 열만 감염 현장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물론 이렇게 엄중한 순간에도, 아니 이런 순간일수록 클릭을 먹고사는 가짜 뉴스꾼들도 활개를 친다.
이로 인해 공포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시민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마스크 가격은 폭등했고, 그 마저도 구입하기 힘들고, 공적 모임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으며, 심지어 대학교 개강마저 연기되고 있다. 중국에서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입국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전세계적으로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고개를 들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대처 방식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생존의 관점에서 불가피한 행동이라고는 할 수 있다. 인류 진화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수렵채집기를 상상해보자. 집단에 전염병이 돌면 개인은 물론이고 집단 전체가 몰살 위기에 빠진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위협에 대한 해결책을 진화시켰다. 그 중 하나는 미지의 신에게 저주를 풀어달라고 애원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상한 음식, 썩는 냄새, 피부의 발진 등에 대해 혐오(역겨움) 반응을 보이는 방식이다. 애원 행위는 우연히 통할 뿐이었지만, 혐오 반응은 꽤 효과적이었다. 혐오의 기능은 위협의 원인으로부터 회피하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의학 용어로) 병원체와 감염 숙주에 대한 회피 반응은 명확히 생존과 번식에 큰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전염병은 한 개인만 회피한다고 해결될 병이 아니고 모든 구성원이 회피 행동에 동참해야만 피하갈 수 있는 위협이다. 즉, 주변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뇌는 병원체에 대한 회피 본능과 집단의 규범을 강조하는 본능이 발동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규범을 중시하고, 규범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고 처벌하려는 경향은 사람들을 집단주의자들로 만든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일수록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진화심리학 연구들이 있다.
250만년 동안의 수렵채집기를 지나 1만 2천 년쯤에 시작된 농경 사회에서도 전염병 자체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회피와 배제 심리는 적응적(adaptive)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농경 시대에 인류는 야생동물을 본격적으로 가축화함으로써 바이러스에게 안방을 내주었다. 야생동물을 보유 숙주로 삼던 바이러스가 농경으로 그 수가 늘어난 가축들을 중간 숙주로 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야생에서 박쥐나 쥐에만 기생하다가 말, 소, 돼지, 낙타처럼 다양한 가축들에게까지 자신의 집을 확장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시기였겠는가? 게다가 인류가 음식과 노동을 위해 가축의 수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니 바이러스는 갑자기 늘어난 부동산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배 식물과 가축의 증가는 인구와 바이러스 수를 폭발적으로 함께 증가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바이러스의 부동산 욕심에는 끝이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산업의 발달로 본격적으로 조성된 대도시는 바이러스에게 허브 공항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제는 210억 마리 가축과 77억의 인류가 다 그들이 노리고 있는 땅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간판 필자인 데이비드 쾀먼(David Quammen)은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에서 인수공통감염병(zoonosis, 인간과 동물을 공통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질병)의 대유행이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최근에 <뉴욕타임즈> 칼럼에서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은 새로운 사건이 아니며 우리 인간이 선택한 삶의 양식이 빚어낸 하나의 결과라고 말한다. 즉, 바이러스의 숙주인 가축과 그 가축을 길들인 인간의 수가 이렇게 많은 한, 그리고 심지어 세계의 전 지역이 지구촌으로 이렇게 엮여 있는 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결코 마지막 불청객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아니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급한 불부터 끄자면, 바이러스 발생지인 우한 혹은 중국으로부터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편 전 세계적인 대유행이 되지 않게끔 글로벌 예보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한다. 제 3국을 거쳐 입국하는 감염자를 놓치면 확산을 줄일 수 없다. 물론 백신과 치료법도 신속히 개발해야 한다. 신속하고 값싼 진단법도 발명해야 한다. 하지만 좀 더 길게 보자면,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 발생 및 확산을 감지하고 예보하는 글로벌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대유행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아쉽게도 이번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데이터 사이언스나 AI기술을 활용했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중국은 세계 최고의 안면인식 기술을 가진 AI강국이 아니었나?)
바이러스가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을까? 인구가 2천명 정도였던 7만 4천 년 전쯤이라면 바이러스에게 절호의 기회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바이러스도 77억의 인류를 멸절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단번에 멸절에까지 이르기에 인간은 너무 크고 많고 똑똑하다. 조금 원시적이고, 현대 사회에서는 때로 무례하지만, 나름의 회피 전략도 한 몫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피엔스가 탐욕을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줄이지 않는다면 바이러스는 매년 우리를 주춤하게 할 것이다.